이사
마리 유키코 지음, 김은모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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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악몽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지난 겨울 야마시로 아사코의 『내 머리가 정상이라면』을 읽고 매년 여름마다 공포, 기담소설을 챙겨 읽는 이벤트를 가지겠다는 결심을 세웠었다. 생전 관심을 준 적이 없었던 장르에 막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인지 올여름엔 유독 공포, 기담 소설 출간 소식이 예전보다 많이 들려오는 것 처럼 느껴지는데 『내 머리가 정상이라면』을 출간했던 작가정신 출판사에서 2020년 여름을 겨냥하여 마리 유키코의 『이사』를 출간했다. 마침 공포소설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마리 유키코의 작품이 궁금했었는데 올여름 공포소설을 제대로 만난 것 같아 소설을 읽기도 전에 만족도는 이미 최고치에 달했다.

 

 하지만 사실 '이사'에서 재미를 얻을 수 있는 건 집을 찾는 기간에 한정된다. 집이 결정되면 그때까지 두근대고 설레던 기분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일상에 매몰되고 만다. 뿐만 아니라 바쁜 이사준비와 뒷정리가 오히려 고통으로 다가온다. 특히 이사 당일부터 며칠간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가벼운 신경쇠약에 걸린다. 이런 귀찮은 일은 두 번 다시 하기 싫다, 이제 죽어도 이사 안 한다! 그렇게 마음에도 없는 생각에 빠진다. p.197 「끈」

 

이사라는 공통 주제와 관련된 6편의 도시 괴담이 모호한 분위기와 독특한 구조로 이어진다. 이사할 집을 보러 다니는 사람, 이삿짐을 싸는 사람, 이사센터에서 일하는 사람, 회사 자리 이동으로 이삿짐을 정리하는 사람, 이사 온 이웃사람, '방랑자' 기질을 타고난 '이사 귀신' 등 이사로 일어나는 일들에 관한 다양한 상황에서 펼쳐지는 마리 유키코의 공포소설은 '오싹'보단 '서늘'하다. 이해하지 못할 상황에 놓인 인물들과의 깊은 교감이 이루어지면서 미스터리한 상황과 그에 대한 주인공들의 치밀한 심리묘사, 팽팽한 긴장의 끈이 소설의 몰입도를 높여주는데 소설에 깊이 빠져 빠른 속도감으로 읽어가지만 허를 찌르는 반전에 멍해지며 복선들을 되짚어보게 된다. 

 

여섯 편의 단편에서 마리 유키코가 여지를 남겨두었던 부분은 아오시마 사부로의 작품 해설로 뚜렷하고 명확해진다. 어떤 실제 사건이 소설의 모티브가 되었는지 친절하게 설명해주며 미스터리로 남았던 벽의 구멍의 정체를 알게 되는가 하면 소설보다 더 엽기적이고 불쾌한 실제 상황들을 보며 뒤늦게 간담이 서늘해지기도 한다. 소설이 끝나도 여운이 진하게 남는 데 마리 유키코의 소설 세계에 제대로 홀린 것 같다. 『이사』의 만족도가 높아 자연스레 작가의 다른 작품으로 관심이 옮겨지는데 김은모 번역가의 옮긴이의 말을 보며 작가에 대한 호감과 호기심이 더불어 커진다(김은모 번역가는 마리 유키코 최고의 성덕이자 최고의 홍보대사다). 이야미스 장르의 대가 마리 유키코의 다른 작품들이 너무나 궁금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아아,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결국 나는 내내 비정규직이겠지. 경기가 좋아졌다느니, 취직률이 높아졌다느니 하지만, 그런 건 우리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잖아요. 일단 비정규직으로 시작한 이상, 우리는 중고품인걸요. 기업도 따끈따끈한 대학의 신규 졸업생들을 정사원으로 채용하고 싶을 거라고요. 순결 신앙이랄까요. 요즘 세상에 순결에 연연하는 남자가 그렇게 많겠냐마는, 기업은 그런 점에 엄청 연연하잖아요? 저도 취준생 때 취업과 사람이 그러더라고요. '신규 졸업생'이라는 브랜드의 힘을 써먹을 수 있는 건 일생에 단 한 번뿐이니 유용하게 사용하라고요. 하지만 써먹고 싶어도 저희는 아직 잃어버린 20년인지 25년인지에 속한 세대였잖아요. ……어휴, 진짜 그런 시대에 태어난 게 원망스럽네요. 지금 생각해보면 대학원이라도 갈걸 그랬나 싶어요. 지금쯤 대기업에 합격했을지도…… 이렇게 망상해본들 허무할 뿐이지만요. p.166-167 「벽」

 

『이사』에서 공포적 상황에 직면한 주인공들의 심리묘사와 독특한 소설의 구조, 상상 이상의 반전도 좋았지만 일본은 물론이고 우리 사회에도 만연한 정규직과 비정규직 차별 문제, 직장 왕따, 가정폭력 등의 문제들을 녹여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직면하게 해주는 장치들도 무척이나 좋았다. 또한 여섯 편의 단편은 '이사'라는 소재와 또 하나의 소재로 묶여있는데 작가의 치밀함에 감탄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마리 유키코와의 첫 만남이 여름이라는 점도 기념비적으로 느껴진다. 한 권의 소설을 봤을 뿐이지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단언컨대 마리 유키코는 공포소설 천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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