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알래스카
안나 볼츠 지음, 나현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뇌전증을 앓으며 수시로 일으키는 발작에 대한 불안을 안고 사는 스벤과 총격 사건으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부모님과 그에 대한 상처를 가진 파커는 새 학기의 시작이 반갑지 않다. 스벤 때문에 파커는 바커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고 둘은 절대 좋은 친구가 되지 못할 것 같다. 심지어 불과 얼마 전까지 파커의 반려견이었다가 동생의 개털 알레르기로 입양을 보냈던 알래스카가 스벤의 도우미견이 되어 있다. 알래스카를 스벤의 곁에 단 하루도 머물게 할 수 없다. 알래스카를 데려와야 한다. 

 

 "여기에 다시 와도 될까?"

 여자애가 조심스레 묻는다.

 "당장 내일 밤은 아니고. 음, 어쩌면 내일모레? 그때도 너 집에 있어?"

 꿈만 같은 이야기다.

 저 애가 내가 며칠 뒤 밤에도 침대에 누워 있을지 묻고 있다.

 "데이트 신청이야?"

 내가 묻는다.

 하지만 여자애는 대답하지 않는다. 저 애의 관심은 오직 털 뭉치 괴물뿐이다. 보아하니, 아직 오백 군데도 더 쓰다듬어야 하는 모양이다.

 "다시 올게."

 여자애가 속삭인다. 나한테가 아니라 개에게.

 "꼭 다시 올게." p.68-69

 

『안녕, 알래스카』에서 '안녕'을 당연하게 작별 인사의 안녕으로 인식하여 소중한 반려동물과 이별하는 슬픈 이야기의 소설일 거라고 크게 착각을 해버렸다. 거기에 뇌전증을 앓는 소년의 이야기로 소설이 시작되니 눈물바다를 예상했었는데 소설은 나의 예측을 완전히 빗나갔다. 스벤과 파커의 시점이 교차되어 벌어지는 사건들은 내내 용감하고 씩씩하게 진행되며 사춘기 아이들의 반항심리 속에서 반려동물, 장애, 사이버 폭력 등 현대 사회가 지닌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건드리고 경각심을 일깨워준다. 학교에서 발작을 일으킨 스벤의 동영상이 전교생들 사이에서 떠도는 장면, 알래스카를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다가 결정권을 알래스카에게 주고 난 후 그 과정을 부모의 이혼 과정 속에서 엄마와 아빠 중 선택을 해야 하는 아이들의 상처에 대입하는 장면에서 허를 찔리기도 했다. 

 

 도우미견을 못 본체하고 지나가는 건 아주 쉬운 일이다.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교통정리를 하는 경찰의 볼을 꼬집고 지나가지는 않잖아? 또 비행기 조종 중인 조종사의 겨드랑이를 간지럼 태우지 않잖아? 알래스카도 경찰이나 비행기 조종사와 다를 게 없다. 알래스카가 덮개를 두르고 있으면, 도우미견으로서 일하는 중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멍청한 구경꾼들의 무례한 손놀림을 기다리느라 가만히 있는 게 결코 아니란 말이다. p.112 

 

안나 볼츠는 『안녕, 알래스카』를 통해 사춘기 아이들의 시선으로 현대사회의 병적인 문제들을 건드리면서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라는 묵직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대형마트 안내견 거부 사건, 불법 촬영 인터넷 유포 등을 통해 드러났던 우리 사회의 민낯을 『안녕, 알래스카』를 통해 다시금 들여다보게 된다. 반성할 게 많고 남은 숙제가 많은 이 시대에 『안녕, 알래스카』는 모두가 만나봐야 할 이야기다. 

 

의 표지 이미지는 겨울에 가까워 보이지만 『안녕, 알래스카』는 만물이 소생하는 봄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소설이다. 화성인 스벤과 복면 소녀 파커는 한 뼘 더 성장했고 스벤과 파커의 성장을 지켜보며 나는 어른이 되어 까마득히 잊고 살았던 어린 시절을 마주하고 되새겼다. 무엇이든 가능할 것 같은 근거 없는 용기와 자신감이 솟구친다. 다 잘 될 거다. 스벤도 파커도 알래스카도, 『안녕, 알래스카』도.

 

 

* 문학과지성사로부터 해당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피버 드림
사만타 슈웨블린 지음, 조혜진 옮김 / 창비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7년 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종후보에 오르고 셜리잭슨상 중편 부분을 수상한 작품이자 올해 공개 예정인 넷플릭스 오리지널 무비의 원작 소설이라는 엄청난 타이틀을 지닌 사만타 슈웨블린의 『피버 드림』을 정식 출간 전 가제본 서평단으로 먼저 만나보게 되었다. 작은 판형의 중편소설이 보유한 엄청난 타이틀에 대한 기대와 더불어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은 평소 접하기 힘든 라틴아메리카 문학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낯선 작가, 낯선 장르 등 낯선 것들 투성이지만 낯선 책이 가진 무수한 타이틀과 책을 향한 막강한 추천사들 그리고 창비에 대한 믿음이 어우러져 기대치는 더욱 높아진다.


 -벌레 같은 거예요.

 -무슨 벌레인데?

 -벌레 같은 거요, 어디에나 다 있는.


벌레에 대해 이야기하는 다비드와 자신의 딸 니나가 어딨는지 묻는 아만다의 대화로만 이어진 소설은 끝날 때까지 내내 모호하고 때로 난해하다. 내가 놓치고 있는 게 많다는 확신만 가득한 가운데 다비드와 니나의 현재 시점의 대화와 각자가 들려주는 과거의 이야기를 넷플릭스 영화에서는 어떻게 이끌어갈지 조금도 짐작이 가지 않음과 동시에 감독의, 다른 사람들의 해석이 궁금해진다. 164페이지의 가제본이 쉽게 넘어가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줄거리를 이야기하기도, 감상을 이야기하기도 힘든 소설이지만 그렇다고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더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게 한다. 겨우 읽어낸 소설을 다시 처음부터 들춰보게 하고 넷플릭스 영화도 공개되자마자 빠르게 찾아 볼 준비가 되어있다.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작품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싶다는 갈망이 커진다.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딘가요?

 -어딘지 알아. 우린 응급병동에 있어, 얼마 전부터.

 -얼마 동안인지 아세요?

 -하루. 아님 오일인가.

 -이틀이요.

 -그런데 니나는? 지금 니나는 어디 있니? 드럼통을 나르는 남자들이 우리 옆을 지나가며 빙긋 웃어 보여. 그 사람들은 니나에게 친절하게 굴어. 하지만 지금 아이는 잔디에서 일어나서 나한테 제 옷과 손을 보여줘. 손이 축출하게 젖었지만 이슬 때문은 아니야, 그렇지?

 -네. 일어나실 수 있어요?

 -침대에서 나오라고?

 -전 침대에서 내려갈게요.

 -스프링이 삐걱대.

 -제가 보이세요?

 -왜 내가 못 본다고 생각하니?


낯선 것들 투성이였던 소설과 끝까지 친밀해지지는 못했지만 지금보다 작품을 더 이해하고 작가 사만타 슈웨블린의 작품세계를 더 알고 싶다는 욕심을 내게 만든다. 무엇보다 정식 출간본에 실린 조혜진 번역가의 옮긴이의 말이 궁금하다. 책을 읽는 내내 축적되었던 무수한 모호함들이 조금은 선명해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사만타 슈웨블린은 우리에게 낯선 작가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름이 되었다.'라는 편혜영 작가의 추천사가 나에겐 조금 다른 의미로 동의가 되었지만 『피버 드림』을 처음 읽었을 때의 혼란스러움은 잊지 못할 것 같다. 조만간 예민함을 더해 『피버 드림』 두 번째 독서를 할 예정이다.




* 창비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 가제본을 지원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집행관들
조완선 지음 / 다산책방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번 사건은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음. 첫째, 피해자가 전직 고위 공직자와 기업인, 정치인 등 사회 지도층 인사라는 점, 둘째, 사회의 공분을 유발한 부패의 인물을 살해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 셋째, 살해 수법이 독특하며 여론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는 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민족반역자 중 유일한 생존자 노창룡이 일제강점기 고문 방식으로 잔인하게 살해당한다. 국민들은 범인들에게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고 25년 만에 잘 알지도 못하는 고등학교 동창 허동식을 도와준 최주호 교수는 졸지에 노창룡 살해 사건의 조력자가 되었다. 부패 정치인, 악덕 기업인 등 희생자가 이어지고 허동식을 찾는 최주호 교수는 오히려 허동식 일당의 그물에 걸려들게 되고 수사팀은 용의자를 특정해가며 집행관들을 추격해간다.


조완선 작가의 『집행관들』은 흡인력 있는 전개와 완성도를 높여주는 반전으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여론을 자신들 편으로 만드는 집행관들은 피해자의 범죄 행위에 딱 맞는 살해 수법을 찾으려 공을 들이고 의미를 새겨 넣는다. 사명감을 가지고 자신의 몫을 톡톡히 해내는 집행관들은 대중들의 영웅이 되어 있고 집행관들과 수사기관의 치열한 두뇌싸움은 치열하게 펼쳐진다. 완벽한 범죄 시나리오와 사회를 향한 묵직한 메시지를 거침없이 던지는 엄청난 소설은 <종이의 집>을 자주 연상케 했다. 수사기관이 아닌 범인들을 응원하게 되고 확실한 재미 보장까지 닮은 부분이 많았지만 『집행관』이 뚜렷한 차별점을 보여주는 부분은 독자들이 쉽게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지지 않게 만든다는 점이다. 단숨에 읽히는 흡인력으로 빠른 속도로 읽히지만 독자들을 마냥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던지는 사회적 메시지에 주체적으로 생각하게 하고 많은 질문들을 던지고 한국 사회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게 한다.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었다면 범인들과 같은 과격한 인물이 나오지 않았겠지요."

 "……"

 "그들을 과격하게 만든 자가 누구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법을 제대로 집행하지 못하고 권력자의 눈치를 보는 검찰, 공정한 판결을 내리지 못한 법원, 그리고 이들 위에 군림하는 통치권자가 책임져야 할 일입니다."


집행관 멤버이자 아주일보 정윤주 기자는 사회 정의를 이루지는 못해도 이 사회가 만만치 않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고 말한다. 조완선 작가는 이 사회가 만만치 않다는 걸 『집행관들』이라는 엄청난 소설로 보여준다. 죄를 지어도 벌을 받지 않고 설사 벌을 받아도 솜방망이 처벌이거나 쉽게 사면 받는 현실의 기득권들이 저지르는 사회 부조리들을 응징하며 소설은 독자들에게 공감과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사회적 분노를 행동으로 표출하는 『집행관들』과 그런 집행관들의 행동에 열광하는 소설 속 대중들, 『집행관들』의 독자들의 모습을 통해 이 사회가 만만치 않다는 걸 많은 그들이 봤으면 좋겠다. 『집행관들』을 무조건적으로 응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 다산북스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울이 지나간 세계
아사다 지로 지음, 이선희 옮김 / 부키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인생을 다시 썼다.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아사다 지로의 신간 『겨울이 지나간 세계』의 출간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가장 눈길을 사로잡았던 건 <파이란>의 원작 소설가라는 타이틀이었다. 일본 문학 부흥기에 안 읽어 본 작가와 작품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많은 작품들을 읽었었고 덕분에 도서관 우수회원에 선정되어 다른 이용자보다 대출권수가 많은 특혜를 누리기도 했었는데 신인 작가도 아닌 그 유명한 <철도원>, <파이란>의 원작 소설가 아사다 지로를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점은 무척이나 의외다. 심지어 <파이란>은 인생 영화 리스트에 빠지지 않는 작품인데 지금까지 원작 소설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놀라워하고 있다. 그래서 아사다 지로의 신간 『겨울이 지나간 세계』의 출간 소식에 남다른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요즘 감성보다 예전 일본 문학 부흥기 때의 더 이전으로 <철도원>, <파이란>이 처음 개봉했을 당시의 감성을 전해줄 것 같은 근거 없는 기대감을 가지며 『겨울이 지나간 세계』를 읽어가기 시작했다. 

 "하루, 이기적인 부탁이란 건 알지만……."

 말을 하다가 눈을 꼭 감았다. 그렇다. 너무도 이기적인 부탁이다.

 "아빠를 데려가지 말렴."

 천국이 아무리 멋진 곳이라도, 그곳에서 하루야가 행복할 리 없다. 그곳에는 엄마도 아빠도 없으니까. 그 불행 앞에서는 하느님도 부처님도 무력하다는 걸 세쓰코는 알고 있었다. p.316

어중간한 불행이 아니라 확실한 불행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어중간한 불행이라서 왠지 손해를 보는 것 같다.

누구보다 성실하고 모범적이고 평범했던 예순다섯 살 다케와키 마사카즈(이하 다케와키)는 자신의 정년퇴직 송년회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뇌출혈로 지하철에서 쓰러진다. 병원 집중치료실에서 며칠째 의식이 지내고 있는 그의 곁을 가족, 오래된 친구들이 지키고 있을 때 병실에 누워있는 다케와키는 현실과는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정체를 모르는 마담 네즈와, 이리에 시즈카와, 그의 옆 침대에서 일주일째 의식 없이 지내고 있는 사카키바라와(이하 가짱), 그의 첫사랑 후즈키와, 가짱의 첫사랑 미네코와 눈 오는 밤의 레스토랑에서, 한여름의 조용한 바다에서, 상점가의 청결한 대중 목욕탕에서, 공원과 지하철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과거를 돌아본다. 

 내 꿈은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의 소원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내가 그토록 되고 싶었던 평범한 사람 쪽에서 보면 그런 꿈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단순히 콤플렉스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할까 봐 이를 악물고 노력했다. 평범한 사람이 되도록, 평범한 사람으로 보이도록. p.353

"꼴도 보고 싶지 않은 녀석은 우연히 만나면서,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은 만난 적이 없더군. 신은 지독한 심술쟁이일세."

다케와키의 지난 인생을 회상하면서 다케와키와 가짱의 세대를, 그 세대가 헤쳐 나온 일본 역사를 돌아보게 되면서 잔잔하게 따라가는 그 과정은 소설 제목 그대로 겨울이 지나간 세계를 통과하는 것 같다. 촘촘한 밀도의 서사와 마담 네즈와 이리에 시즈카의 정체에 대한 반전과 소설 후반에 몰아치는 신파는 독자들의 마음을 제대로 건드린다. 소설 전반에 깔린 복선과 빈틈없는 반전, 높은 몰입감과 집중력은 서스펜스에 더 어울리지 진한 감동과 위로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아사다 지로는 그런 이야기를 너무나도 아름답고 슬프게 들려준다. '탁월한 이야기꾼'이라는 수식어가 그야말로 탁월하다. 문장, 이야기, 캐릭터, 감성 모두가 완벽한 소설이다. <철도원>, <파이란>처럼 『겨울이 지나간 세계』 역시 영화화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모든 장면들이 다 소중하고 아름다워 각색이 유난히 힘든 작품이 될 것 같다는 노파심이 벌써부터 생기기도 한다.

 당신을 미워하지 않아. 그러니까 당신도 뒤돌아보지 마. 누가 뭐라고 하든 우리에게는 이게 최선의 선택이니까.

 나도 당신도 행복해져야 해. 누가 봐도 최악의 선택이지만 우리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던 이 어찌할 수 없는 밤을, 적어도 우리만의 성스러운 밤으로 만들기 위해. p.416

"그렇지 않아. 모두 불행했을 때의 불행과 모두 행복했을 때의 불행은 다르니까."

『겨울이 지나간 세계』는 개인적인 경험 때문에 서평보다 일기장에 적을 게 더 많은 작품이다. 덕분에 신파가 몰아치는 후반부가 유난히 더 읽기 힘들기도 했는데 그만큼 큰 위로가 되어준 작품이기도 하다. 나도 몰랐는데 『겨울이 지나간 세계』는 나에게 꼭 필요한 작품이었고 겨울이 지나가는 계절에 잘 읽어낸 것 같아 소설의 만족이, 독서의 만족이 남다른 작품이기도 하다. 내가 책을 읽고 서평을 작성하는 이 세계와 다른 차원의 세계 어딘가에서 소설 속 인물들이 살고 있을 것만 같다. 문득문득 그들을 생각하며 안부를 물어보는 날들이 종종 생길 것 같다. 이 세계의 사람들도, 다른 차원의 사람들도 모두가 안녕했으면 좋겠다. 





* 부키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긴긴밤 -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83
루리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평점 :
품절




책장의 변화를 통해, 도서관 이용 변화를 통해 최근 몇 년간 내 독서 목록에도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소설이 대부분을 차지했던 내 책장이 최근 몇 년 사이에 그림책, 아동, 청소년 소설 코너가 생겼고 도서관 이용도 종합자료실만 들르던 과거와 달리 아동자료실도 자주 이용하며 제대로 즐기고 있다. 덕분에 신작 소식이 들려오면 반가워할 작가의 이름도 늘었고 챙겨읽는 문학상 수상작도 늘었다. 


루리 작가의 『긴긴밤』 출간 소식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건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이라는 화려한 타이틀 때문이었다. 예전이었으면 그냥 지나치고 말았을 테지만 꼭 읽어봐야겠다고 결심한 데에는 작년에 읽었던 허진희 작가의 『독고솜에게 반하면』(제 10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이 작년 독서 BEST에 들 정도로 너무 좋았기 때문이었는데 독서의 만족은 제11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수상작에 대한 기대는 물론이고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수상작에 대한 기대도 더불어 키워주기에 충분했다. 


 노든은 자신이 코뿔소의 겉모습을 가진 코끼리라고 생각했다. 코끼리는 강했다. 마음만 먹으면 바람보다 빨리 달려서 상대를 받아 버릴 수도 있었고, 물소 열 마리보다 무거운 몸통으로 상대를 깔아뭉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코끼리는 무모하지 않았다. 그래서 쉽게 화를 내지 않았다. 화를 내면 그것은 곧 싸움으로 번졌고, 싸움은 죽음을 부르는 일이었다. 코끼리는 스스로의 목숨도, 남의 목숨도 함부로 여기지 않았다. 그것이 코끼리들의 지혜였다. 노든은 현명한 코끼리들이 좋았다. p.13




코끼리 고아원에서 코끼리들의 보살핌으로 자란 코뿔소 노든이 인간의 이기심으로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잃고 동물원 탈출을 함께 꿈꿨던 소중한 친구 앙가부도 잃게 되면서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흰바위코뿔소가 된다. 그 과정과 노든이 버려진 알에서 태어난 펭귄이 함께 바다로 가는 여정을 루리 작가는 아름답고 뭉클하게 쓰고 그려냈다. 노든에게 인생의 행복했던 순간들은 찰나였지만 그의 모든 여정에는 늘 사랑이 함께 한다. 긴긴밤을 함께 공유하고 그 과정을 따라가면서 가슴 따뜻해지고 뭉클해지는 사랑과 용기가 어느새 나에게도 전해진다. 이렇게 작고 예쁜 책에서 이토록 진한 감동을 느끼고 오랫동안 헤어 나오지 못하리라곤 상상도 못했었는데 『긴긴밤』은 여러모로 상상 이상을 전해주는 소설임을 곳곳에서 느끼게 된다.


 멀리서 보면 사막은 황량해 보이고, 그 위를 걷는 나와 노든은 가망이 없는 두 개의 점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가까이서 들여다본다면, 모래알 사이를 끊임없이 지나다니는 개미들과 듬성듬성 자라난 풀들, 빗물 고인 웅덩이 위에 걸터앉은 작은 벌레들 소리, 조용히 스치는 바람과 우리의 이야기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사막은 모래 속에 숨은 생명들로 가득했다. 살아남은 기적은 우리에게만 특별하게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p.107


『긴긴밤』을 읽는 동안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을 잊고 있었다. 장르와 세대의 구분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정도로 엄청나고 그만큼 좋았다는 만족이 컸지만 한편으론 내가 정말 어린이였을 때 이 작품을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에 어린이 독자들에 대한 질투가 남기도 했다(그러니 여러분 하루라도 어릴 때 이 소설을 만나세요). 노든과 코끼리 고아원의 수많은 코끼리들, 아내와 딸, 앙가부, 치쿠와 윔보 그리고 아기 펭귄까지 함께한 『긴긴밤』의 여정을 앞으로 몇 번이고 찾아 읽게 될 것 같다. 또한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의 기억을 오래 간직할 것 같다.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는 작품은 물론이고 일 년에 책 한 권 안 읽는 사람들에게도 자신 있게 건네줄 수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다.


허진희 작가의 『독고솜에게 반하면』의 만족은 『긴긴밤』의 독서로 이어졌다. 루리 작가의 『긴긴밤』의 만족은 루리 작가의 이전 작품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와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공동 대상 수상작인 은소홀 작가의 『5번 레인』에 대한 독서로 이끌어줄 예정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목록에, 눈에 띄게 넓어지는 독서의 저변에 기분이 좋아진다. 『긴긴밤』의 독서 역시 그러했다. 



* 문학동네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