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지나간 세계
아사다 지로 지음, 이선희 옮김 / 부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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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생을 다시 썼다.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아사다 지로의 신간 『겨울이 지나간 세계』의 출간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가장 눈길을 사로잡았던 건 <파이란>의 원작 소설가라는 타이틀이었다. 일본 문학 부흥기에 안 읽어 본 작가와 작품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많은 작품들을 읽었었고 덕분에 도서관 우수회원에 선정되어 다른 이용자보다 대출권수가 많은 특혜를 누리기도 했었는데 신인 작가도 아닌 그 유명한 <철도원>, <파이란>의 원작 소설가 아사다 지로를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점은 무척이나 의외다. 심지어 <파이란>은 인생 영화 리스트에 빠지지 않는 작품인데 지금까지 원작 소설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놀라워하고 있다. 그래서 아사다 지로의 신간 『겨울이 지나간 세계』의 출간 소식에 남다른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요즘 감성보다 예전 일본 문학 부흥기 때의 더 이전으로 <철도원>, <파이란>이 처음 개봉했을 당시의 감성을 전해줄 것 같은 근거 없는 기대감을 가지며 『겨울이 지나간 세계』를 읽어가기 시작했다. 

 "하루, 이기적인 부탁이란 건 알지만……."

 말을 하다가 눈을 꼭 감았다. 그렇다. 너무도 이기적인 부탁이다.

 "아빠를 데려가지 말렴."

 천국이 아무리 멋진 곳이라도, 그곳에서 하루야가 행복할 리 없다. 그곳에는 엄마도 아빠도 없으니까. 그 불행 앞에서는 하느님도 부처님도 무력하다는 걸 세쓰코는 알고 있었다. p.316

어중간한 불행이 아니라 확실한 불행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어중간한 불행이라서 왠지 손해를 보는 것 같다.

누구보다 성실하고 모범적이고 평범했던 예순다섯 살 다케와키 마사카즈(이하 다케와키)는 자신의 정년퇴직 송년회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뇌출혈로 지하철에서 쓰러진다. 병원 집중치료실에서 며칠째 의식이 지내고 있는 그의 곁을 가족, 오래된 친구들이 지키고 있을 때 병실에 누워있는 다케와키는 현실과는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정체를 모르는 마담 네즈와, 이리에 시즈카와, 그의 옆 침대에서 일주일째 의식 없이 지내고 있는 사카키바라와(이하 가짱), 그의 첫사랑 후즈키와, 가짱의 첫사랑 미네코와 눈 오는 밤의 레스토랑에서, 한여름의 조용한 바다에서, 상점가의 청결한 대중 목욕탕에서, 공원과 지하철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과거를 돌아본다. 

 내 꿈은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의 소원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내가 그토록 되고 싶었던 평범한 사람 쪽에서 보면 그런 꿈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단순히 콤플렉스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할까 봐 이를 악물고 노력했다. 평범한 사람이 되도록, 평범한 사람으로 보이도록. p.353

"꼴도 보고 싶지 않은 녀석은 우연히 만나면서,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은 만난 적이 없더군. 신은 지독한 심술쟁이일세."

다케와키의 지난 인생을 회상하면서 다케와키와 가짱의 세대를, 그 세대가 헤쳐 나온 일본 역사를 돌아보게 되면서 잔잔하게 따라가는 그 과정은 소설 제목 그대로 겨울이 지나간 세계를 통과하는 것 같다. 촘촘한 밀도의 서사와 마담 네즈와 이리에 시즈카의 정체에 대한 반전과 소설 후반에 몰아치는 신파는 독자들의 마음을 제대로 건드린다. 소설 전반에 깔린 복선과 빈틈없는 반전, 높은 몰입감과 집중력은 서스펜스에 더 어울리지 진한 감동과 위로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아사다 지로는 그런 이야기를 너무나도 아름답고 슬프게 들려준다. '탁월한 이야기꾼'이라는 수식어가 그야말로 탁월하다. 문장, 이야기, 캐릭터, 감성 모두가 완벽한 소설이다. <철도원>, <파이란>처럼 『겨울이 지나간 세계』 역시 영화화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모든 장면들이 다 소중하고 아름다워 각색이 유난히 힘든 작품이 될 것 같다는 노파심이 벌써부터 생기기도 한다.

 당신을 미워하지 않아. 그러니까 당신도 뒤돌아보지 마. 누가 뭐라고 하든 우리에게는 이게 최선의 선택이니까.

 나도 당신도 행복해져야 해. 누가 봐도 최악의 선택이지만 우리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던 이 어찌할 수 없는 밤을, 적어도 우리만의 성스러운 밤으로 만들기 위해. p.416

"그렇지 않아. 모두 불행했을 때의 불행과 모두 행복했을 때의 불행은 다르니까."

『겨울이 지나간 세계』는 개인적인 경험 때문에 서평보다 일기장에 적을 게 더 많은 작품이다. 덕분에 신파가 몰아치는 후반부가 유난히 더 읽기 힘들기도 했는데 그만큼 큰 위로가 되어준 작품이기도 하다. 나도 몰랐는데 『겨울이 지나간 세계』는 나에게 꼭 필요한 작품이었고 겨울이 지나가는 계절에 잘 읽어낸 것 같아 소설의 만족이, 독서의 만족이 남다른 작품이기도 하다. 내가 책을 읽고 서평을 작성하는 이 세계와 다른 차원의 세계 어딘가에서 소설 속 인물들이 살고 있을 것만 같다. 문득문득 그들을 생각하며 안부를 물어보는 날들이 종종 생길 것 같다. 이 세계의 사람들도, 다른 차원의 사람들도 모두가 안녕했으면 좋겠다. 





* 부키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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