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권영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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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환상적인 이야기에 대책 없이 빠지게 만드는데 독보적인 모리미 도미히코의 신작 『열대』가 출간됐다. 모리미 도미히코라는 이름이 이미 하나의 장르가 되어 신뢰감을 주는데 제6회 고교생 나오키상 수상작, 일본 서점 대상 TOP4, 데뷔 15주년 기념작 등 작품을 향한 무수한 수식어들이 작품에 대한 기대심을 한층 높여준다. 『열대』라는 제목도, 제목과 어울리면서도 작가의 작품들에 비해 유난히 난해한 표지 디자인까지 모든 요소들이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를 동시에 키워준다. 


 꼭 저주 같잖아요.

 신조 군이 한 말이 마음에 남아 있었다.

 자신도 같은 저주에 걸리려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소설일 뿐이라고 단언하면서도 마음속 한구석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두 개의 이야기에 매료되어 있었다. 『열대』라는 이야기와 『열대』를 둘러싼 이야기. 이 안과 밖의 두 이야기 사이에는 어떤 불가사의한 통로가 있다는 느낌이 자꾸만 들었다. p.102


학창시절 우연히 헌책방에서 『열대』를 발견하고 흥미롭게 읽어가지만 어느 날 갑자기 『열대』는 사라지고 『열대』라는 책에 대한 정보도, 사야마 쇼이치라는 작가에 대한 정보도 찾을 수가 없다. 시간이 흘러 『열대』에 대한 기억도 잊고 살아가던 주인공은 소설가가 되지만 그에게 슬럼프의 시기가 오면서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열대』에 대한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마침 우연히 참여하게 된 침묵 독서회에서 그는 다시 『열대』를 마주하게 되고 드디어 『열대』에 대해 아는 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소설의 존재를 알고 읽은 독자들도 소수지만 끝까지 읽은 사람도 없는 사야마 쇼이치의 소설 『열대』.『열대』의 수수께끼를 이야기하는 학파가 조직되고 기상천외한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진다.


문학 독자들이라면 설렐 수밖에 없는 소재로 읽기도 전에 반하게 만드는 마력의 소설이다. 누구도 끝까지 읽은 적 없는 수수께끼 같은 소설과 소설의 끝을 위해 결성된 학파 사람들, 소설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벌어지는 액자식 구조의 이야기가 엄청난 흡인력으로 읽힌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도무지 예측이 불가능한 독특한 구조의 이야기를 모리미 도미히코는 촘촘하고 밀도 있게 펼쳐낸다. 묘하게 끌리는 책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사야마 쇼이치의 『열대』는 아껴서 읽고 싶은 책이라면 모리미 도미히코의 『열대』는 단숨에 읽어가게 만드는 책이다. 또한 수수께끼가 쉽게 풀리면 낭만이 없다는 걸 사야마 쇼이치도, 모리미 도미히코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제각각 『열대』를 만납니다." 나카쓰가와 씨는 말했다. "그리고 책장을 넘겨 이야기를 따라갑니다. 이윽고 이야기는 각기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마치 사막을 흐르는 강이 가지를 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럼 그 물줄기들은 어디로 이어질까요. 마술적 정신으로 생각하면 답은 저절로 나옵니다. 어째서 우리는 『열대』의 결말을 모를까요. 어째서 『열대』는 사라졌을까요? p.134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펭귄 하이웨이』 등 지금까지 모리미 도미히코의 원작으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작품들이 많지만 개인적으로 『열대』만큼은 애니메이션화보다는 실사화가 더 어울려 보이는 이야기인 것 같아 원작 소설 영화화도 기대하게 된다. 열대야로 잠 못 이루는 며칠 밤 동안 뒷날 출근 걱정은 뒤로하고 『열대』를 단숨에 읽어갔다. 몇 년 전 『야행』도 딱 이맘때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러고 보니 열대야에 모리미 도미히코 만한 작가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1월엔 박완서, 여름엔 프란츠 카프카와 엘레나 프란테의 나폴리 4부작, 가을엔 아멜리 노통브, 크리스마스에서 연말까지는 해리포터 시리즈 등 어느 계절이나 기간이 되면 챙겨읽는 작가, 작품들이 있는데 열대야엔 모리미 도미히코가 추가됐다. 잠 못 이루는 깊은 밤 이만한 작가가 없지.


* 알에이치코리아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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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걸 수필집 : 내 머릿속에 푸른 사슴 - 현대어로 쉽게 풀어 쓴 근대 여성 문학 모던걸
강경애 외 지음 / 텍스트칼로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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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을 애정하는 독자들에게 마치 선물 같은 시리즈 출간 소식이 들려왔다바로 현대어로 쉽게 풀어  근대 여성 문학 <모던걸 시리즈>. '100 고단한 현실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목소리를 글에 담은 여성 작가들이 있습니다.' 시작하는 편집자의 말이 주는 울림에 본격적인 독서가 시작되기도 전에 웅장함이 밀려온다올해 만난   최고의 기획력이 돋보이는 시리즈에 대한 기대감은 말할 것도 없고 수필집소설집시집  권의 시리즈에 실린 작품에 대한 호기심은 <모던걸 시리즈> 대한 근거 있는 확신과 믿음을 전해줬다

 

바야흐로 2021한국 문단계는 여성작가들이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여성작가들의 작품이 베스트셀러 순위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작년 젊은작가상 수상자는 모두 여성작가들이었다한국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인정받고 있는 우리 작가님들이 많은 덕분에 해외 유명 문학상 수상 소식이 들려와도 예전만큼 크게 놀라거나 흥분하지는 않는 정도가 됐다(큰일 하는 우리 여성작가님들 만세!). 현재 여성작가들의 독보적인 활약이 있기까지거기엔 100 전 고단한 현실에도 꿋꿋이 자신의 목소리를 글에 담은 모던걸이 있었기에 가능한 서사가 아닐  없다『시선으로부터,』의 작가의 말에서 정세랑 작가는 김동인이나 이상에게 있지 않고 김명순이나 나혜석에게 있는 자신의 계보에 대해 고백하기도 했는데 <모던걸 시리즈> 존재 자체만으로도 독자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요소가 무척이나 많은 책이다.

 

 나는 꽃이 피면 어서 지길 바라는 사람이다. 꽃이란 마치 나를 꼭 생포하는 것 같은 요기를 부려 내가 감당해 내기 어렵다. 그 대신 푸른 잎들을 가만히 보면 내 눈은 씻은 듯이 밝아지고, 파아란 잎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내 가슴은 갓 스물인 것처럼 뛴다. 내 마음이 유독 즐거워지는 때라 그런가, 일 년 중에 내 얼굴이 가장 좋아지는 때도 또한 5월인 듯싶다. p.77 노천명 「5월의 구상」 

 

시리즈  제일 먼저 만나본 수필집엔 백신애노천명나혜석김경애 작가의 수필 21편이 실려있다당시의 시대상과 낯선 지명들과 풍경작가로서의 태도나 철학이 녹아든  속에서 당시에 드문 여성작가로서의 사명철학을 엿보고 외국에서 이방인의 시각으로 보는 선진국의 모습을 보기도 한다. 시대를 앞서간 여성작가들이 들려주는 평범한 일상과 주변의 이야기를 읽어가는 동안 2021년을 살아가면서 여전히 무수한 편견 속에 살고 있는 나를 마주하며 허를 찔리기도 하는 등의 재미를 곳곳에서 찾을  있다. 

 

 "멸치는 봄에 잡힌다면서 웬일입니까?"

 내가 물으니, 때때로 이렇게 조금씩은 잡힌다고 하였다. 계집애는 부끄러웠는지 슬금슬금 달아난다. 계집애의 뒷모양을 바라보며 그의 옷이 말할 수 없이 남루한 것을 보았다. 

 "오! 저 계집애는 이 농촌에 사는 가난한 어부의 딸이구나."

 그 머리며 손발의 장대함……. 이번에 내가 여기 온 것은 저들의 생활을 탐구하기 위함이었다. 이 부르짖음으로 가슴이 뜨겁게 흔들렸다. 오냐, 작가로서의 사명이 뭐냐. 이 현실을 누구보다도 똑똑히 보고 또 해부하여 작품을 통해 대중에게 나타내 보이는 데 있는 것 아니냐. 예술이란 그 자체가 민중의 생활과 분리되어 있으면 무슨 가치가 있으랴. p.131 강경애 「몽금포 구경」

 

이토록 멋진 기획이 문장  문장이 권의 책이 권의 시리즈가 전부 귀한 것들로 채워져 괜히 뭉클해지다가 시리즈의 다른 책들도 빨리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진다낯선 시대낯선 지명과 풍경을 배경으로 평범한 일상과 주변의 이야기들이 문학이 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독자들을 만나 읽히는 과정이 특별하고 귀했다오랫동안 음미하고 싶은  특별한 기분을 한국 여성 작가들의 작품으로 독서 목록을 채우는 것으로 채우려고 한다원래도 한국 여성 작가들의 작품이 압도적이었지만 당분간은  압도적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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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자들
루크 라인하트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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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백부터 하자면 나는  SF소설 애송이 독자다. SF작가들의 활약으로 더 이상 SF소설이 마니아층만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면서 신간 소식이 들려오면 반가운 작가들이 생기고 독서목록에서 SF소설 비중이 확장하기는 했지만 아직 경험해야 할 세계가 더 큰 독자라 루크 라인하트의 『침략자들』을 마주하고 두꺼운 두께에 겁이 났던 것도 사실이다. 믿는 건 오직 비채 출판사였다. 지금까지 비채 출판사 책으로 실패한 경험이 전무하니까, 거기에 표지가 심히 내 스타일이니까 믿고 읽어가기 시작했다.


지구를 찾은 새로운 친구 FF('웃기는 친구'가 될 수도 있고, '망할 파시스트'가 될 수도 있고, '사나운 외국인'이 될 수도 있고 '털복숭이 찰싹이'가 될 수도 있는)의 등장으로 인한 긴장과 인간과 외계인의 공존 혹은 외계인의 일방적인 침략을 특유의 유머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침략자들』은 작가의 끝없는 상상력과 특유의 유머와 해학이 돋보이는 소설이다. 인간보다 월등히 지능이 높은 외계인들의 활약 속에서 드러나는 우리 사회의 민낯을 응시하며 씁쓸해지기도 하는데 상상도 못한 사회 풍자 SF소설은 읽는 동안 수시로 허를 찌르고 판을 뒤집는다. 예측이 불가능한 사람은 짜증 나지만 예측이 불가능한 소설은 손에 땀을 쥐게 하고 빅재미를 보장한다. 그야말로 엄청난 소설이다.


 하지만 사실은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글을 쓰려면 언제나 먼저 청중이 누구인지 결정해야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번 희곡의 청중은 반드시 인간일 수밖에 없으므로, 나는 아주 제한된 범위 내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비유하자면, 애완동물을 즐겁게 해주려고 희곡을 쓰는 인간이 된 꼴이었다.

 첫 번째 문제는 FF를 극에서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그들이 인간 관객에게 '진짜'가 되려면 겉보기에 인간이 되는 길밖에 없었다. 내 희곡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FF가 인간과 같은 감정을 지니고 있어서 사랑하고, 증오하고, 질투하고, 탐욕을 부리고, 분노할 수 있는 척해야 할 터였다. 뭐, 어차피 모든 희곡에는 그런 가장이 필요하므로 나는 인간적인 FF를 만들어낼 생각이었다. 

 다음 문제는 FF를 극에 등장시키는 것이었다. 나는 FF의 변신을 인간들이 재미있어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나의 FF들은 극중에서 끊임없이 모습을 바꿔야 할 것이다. 하지만 주로 인간과 비슷한 다양한 모습이 될 것이다.

 다음 문제는 장르였다. 우리 FF들은 모든 인간을 멍청이로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쓸 수 있는 장르는 딱 하나 코미디밖에 없었다. 이 얼마나 적절한가. 내 프랑스 친구들이 내게 '몰리에르'라는 이름을 주었는데, 지금 내가 문득 코미디를 쓰자는 결정을 내리다니!

 마지막으로 스토리를 결정해야 했다. 인간들의 훌륭한 희곡은 모두 기본 요소, 즉 사랑, 증오, 경쟁, 질투, 욕망, 탐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나도 인간들의 가장 강렬한 감정들로 내 희곡을 채워야 할 터였다. 나는 등장인물과 FF 등장인물을 몇 명씩 창조한 뒤 극적인 상황에 던져 넣고, 본성에 나머지를 맡기기로 했다. 물론 인간의 본성을 뜻한다. 

 그러면 코미디 한 편이 탄생할 것이다. p.262-263


인류를 싹 쓸어버릴 수도 있지만 재미를 택해 모래성을 쌓고 문학을 논하고 은행을 해킹하는 FF들은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캐릭터들이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캐릭터들과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이야기는 두꺼운 SF소설에 대한 걱정을 빨리 잊게 만들어줬다. 영화든 시리즈든 영상화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침략자들』에 대한 통찰이 남다르면서도 자신만의 철학을 져버리지 않는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야 한다는 엄격한 기준을 내세우게 된다. 2권을 예고하며 끝을 맺었지만 작가의 죽음으로 2권이 세상에 나올 수 없다는 사실도 한 편의 소설 같다. 그래서 더 특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여러모로 놀라운 경험들의 연속이다.


FF는 지구를 침략했고 루크 라인하트는 독자들의 마음을 제대로 침략했다. 한 권의 소설을 읽었을 뿐이지만 루크 라인하트는 SF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가가 됐다. 더 경험할 수 있는 그의 작품세계가 한정적이라 아쉽다. 맛있는 음식은 아껴두었다가 마지막에 먹는 나는 그의 다른 작품을 최대한 아껴가며 읽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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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지음 / 사계절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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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라곤 어쩌다 한번씩, 잠깐 만나는 조카들이 전부였던 인생이었는데 올초부터 업무의 변화와 함께 어린이 친구들이 일상에 크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김소영 작가처럼 현재 나의 세계 역시 어린이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다. 업무에 대한 만족도도 높고 어린이를 위하는 마음도 언제나 특별한데 어느덧 내 마음속엔 어린이들을 향한 고민도 늘어났다. 아니 비상상황에 직면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상반기 동안 나에게 일어난 변화 중 가장 큰 변화는 특화된 업무가 어린이 친구들에게 쉼없이 주의를 주고 혼내는 것으로 바꼈다는 것인데 분명 이건 심각한 일이다.


 어린이에게 '착하다'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살기에 세상이 거칠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착하다는 말이 약하다는 말처럼 들릴 때가 많아서이기도 하다. 더 큰 이유는 어린이들이 '착한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 두려워서다. 착하다는 게 대체 뭘까? 사전에는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고 설명되어 있지만, 실제로도 그런 뜻으로 쓰이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보다는 어른들의 말과 뜻을 거스르지 않는 어린이에게 착하다고 할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그러니 어린이에게 착하다고 하는 건 너무 위계적인 표현 아닌가. p.32


출간과 동시에 반응이 뜨거웠던 김소영 작가의 『어린이라는 세계』를 이제서야 읽어보게 됐다. 문학에 대한 관심과 현재 업무의 연관성 등을 고려해보면 진작 읽었어야 하는 책인데 개인적으로 지각 독서를 했다. 그만큼 책에 대한 기대도 높을수밖에 없었는데 어린이 독서교실을 운영하는 작가가 내내 따뜻한 시선으로 보여주는 『어린이라는 세계』는 너무 내 책이었다. 어떤 챕터에선 너무나 적나라한 내 상황에 대한 이야기에 괜히 찔리기도 했는데 책의 존재를 진작 알고 있었음에도 왜 독서를 미뤄왔던 걸까, 더 빨리 읽었더라면 그만큼 더 빨리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었을텐데라는 아쉬움과 반성이 쉼없이 밀려왔다. 


 어린이를 만드는 건 어린이 자신이다. 그리고 '자신'안에는 즐거운 추억과 성취뿐 아니라 상처와 흉터도 들어간다. 장점뿐 아니라 단점도 어린이의 것이다. 남과 다른 점뿐 아니라 남과 비슷한 점도, 심지어 남과 똑같은 점도 어린이 고유의 것이다. 개성을 '고유성'으로 바꾸어 생각하면서 나는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매 순간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 간다고 할 때, '다양하다'는 사실상 '무한하다'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p.91


『어린이라는 세계』는 출판계에 일으키고 있는 뜨거운 반응처럼 독자들의 마음을 따뜻을 넘어 뜨겁게 해주는 책이다. 독서 초반 마음을 울리는 구절, 다시금 나의 상황을 점검하고 돌아보게 되는 구절 등에 부지런히 인덱스 테이프를 붙이다가 몇페이지 읽지도 않았는데 여기저기 붙어있는 인덱스 테이프를 보며 인덱스 테이프가 소용없는 책이라고 빠르게 인정하고 인덱스 테이프 붙이기를 그만뒀다. 작가의 모든 시선과 통찰이 중요하고 귀하다. 그러니까 『어린이라는 세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중요하고 귀한것들로 가득하다. 방심하고 있다가 웃음이 터지기도 하고 눈시울이 붉어지고 코끝이 찡해지기도 하면서 한동안 잊고 살았던 과거의 나를 만나기도 하고 너무 모르고 살았던 어린이라는 세계를 조우하기도 한다. 나는 원래 새해에도 계획이나 목표를 세우는 사람이 아닌데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고 난 후 어린이 친구들을 대하고 업무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어린이들에게 느긋한 어른이 되고 싶고 어린이들의 품위를 지켜주는 품위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는 몇가지 바람을 가지고 다짐을 하며 마음을 다시 잡아보는 계기를 가지게 됐다. 


 어린이는 이성으로 가르친다! 이것이 나 자신의 사훈社訓이다. 어린이 한 명 한 명을 존중하고, 그들의 지적 정서적 성장을 돕고, 좋을 때 좋게 헤어지는 것. 직업 윤리와 진실한 자세만 있다면 굳이 '사랑으로' 가르치지 않고도 성과가 있다고 믿는다. 나는 어린이를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를 생각하지 않는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사랑'이란 내가 다루기에 너무 크고 어렵고 조심스러운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마음이 드러날지도 모르니 늘 조심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p.151


『어린이라는 세계』를 보며 좀 더 괜찮은 어른이 되고싶다는 욕심을 가지게 된다. 사라진 줄 알았던 나였던 그 아이를 내 속에서 다시 발견하여 반갑기도 하고 너무 어른이 된 나 자신을 돌아보며 마음이 씁쓸해지기도 한다. 어른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할 책이고 하루라도 빨리 읽어봐야 할 책이다. 그나저나 이슬아 작가의 『부지런한 사랑』을 읽을때도 그랬는데 김소영 작가의 『어린이의 세계』까지 읽고나니 어린이 글쓰기, 독서교실에 대한 로망이 왜이렇게나 크게 생기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럴 능력이 1도 없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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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주는 괴물들 - 드라큘라, 앨리스, 슈퍼맨과 그 밖의 문학 친구들
알베르토 망겔 지음, 김지현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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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속에서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는데 세계 일등 작가 알베르토 망겔이 드라큘라, 앨리스, 슈퍼맨과 그 밖의 문학 친구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끝내주는 괴물들』을 발표했다. 작가의 이름과 작품 제목만으로 이미 반해버렸는데 작가가 직접 일러스트도 그렸다고 한다. 거기에 이 책의 추천사는 무려 살만 루슈디가 썼다. 어떤 괴물들을 선별해 얼마나 풍부한 이야기들을 들려줄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모든 요소가 하나같이 끝내주는 『끝내주는 괴물들』의 존재를 안 이상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괴물은 누구일까? 우리가 차마 같은 인간이라는 분류에 포함할 수 없는, "비인간적인" 행동으로 반면교사 삼는 사람들이 있겠다. 히틀러, 스탈린, 피노체트, 바샤르 알아사드, 연쇄살인마, 강간범 등이 모두 우리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믿고 싶은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괴물이라 불린다. 고대인들은 우리보다 더 현명했다. 그들의 신과 괴물 들은 초자연적 장점과 결함을 갖추긴 했지만 보통 인간의 장점과 결함 또한 갖고 있었다. 폴리페모스는 어수룩했고, 케르베로스는 탐욕스러웠으며, 켄타우로스는 현명했고, 뤼지냥의 용 아가씨는 유혹적이었고, 페가수스는 자신의 속도를, 히드라는 미모를 뽐냈다. 이 괴물들은 우리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부심, 증오, 욕망 그리고 질투와 권태까지도 느낄 수 있고, 그래서 우리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처럼 타인의 친절을 원하고 또 우리처럼 고통에 시달리는,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동료 생명체로서 존중받기 때문에 그토록 오래 기억되는 것이다. 장 콕토는 스핑크스가 오이디푸스를 사랑해서 수수께끼의 답을 직접 속삭여줬기 때문에 파국을 맞았으리라는 설을 제시하기도 했다. p.144-145 「키마이라」


목차만 훑어봐도 얼마나 상상 이상의 책인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드라큘라, 프랑켄슈타인 등 당연하게 떠오르는 괴물들보다 너무 멀쩡해 갸웃거리게 되는 캐릭터들이 더 많다. 거기에 성진, 사오정 등 동서양을 막론하는 캐릭터들도 등장하여 기대감을 부풀린다. 무엇보다 나와 닮은 괴물 캐릭터를 만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알베르토 망겔의 유려한 글 속에서 나도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던 나의 내면을 마주하며 제대로 허를 찔리고 싶다는 욕망도 생긴다. 거기에 지적 허영심을 채우는 건 덤이다.


각 나라에서 가장 사랑받는 동화 속 인물로 그 나라를 정의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예컨대 잉글랜드는 끊임없이 부조리한 사회적 규칙과 편견에 부딪히는 앨리스, 이탈리아는 반항적이고 재미를 좇으며 "진짜 남자아이"가 되고 싶어 하는 피노키오, 스위스는 착한 아이인 체하는 하이디, 캐나다는 총명하고 걱정 많은 생존주의자 빨강 머리 앤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이라면 아마 도로시에게서 자기 모습을 발견할 것 같다. p.276 「에밀리아 부인」


알베르토 망겔이 한국 캐릭터를 한 명 추가할 수 있다면 어떤 인물이 좋을까, 나에게  『끝내주는 괴물』에 캐릭터를 한 명 추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캐릭터를 선정하고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등등 많은 상상력을 가미하며 책을 읽어가는 과정이 내내 즐겁다. 이럴 줄 알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매력적이고 풍부한 이야기로 가득해 독서의 만족도를 높여준다. 알베르토 망겔이 소개하는 캐릭터와 작품들을 다 알았더라면 더 완벽한 재미와 만족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개인적인 아쉬움은 읽어야 할 독서 목록을 채워가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모든 문학 속 인물들이 모든 독자의 동반자로 선택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인물들만이 오랜 세월 우리와 동행한다. p.15 「저자 서문」


오랜 세월 우리와 동행하는 인물들을 알베르토 망겔의 시각으로 살펴보고 이야기를 확장하는 과정을 따라가는 일은 높은 기대치에도 그 이상의 만족감을 선사해주었다. 작가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들만이 오랜 세월 우리와 동행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알베르토 망겔은 오랜 세월 동행하기에 적합한 작가라는데 이견이 없어 보인다. 아니, 감히 동행이 가능할까? 그냥 무조건 따라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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