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략자들
루크 라인하트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1년 5월
평점 :
절판




고백부터 하자면 나는  SF소설 애송이 독자다. SF작가들의 활약으로 더 이상 SF소설이 마니아층만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면서 신간 소식이 들려오면 반가운 작가들이 생기고 독서목록에서 SF소설 비중이 확장하기는 했지만 아직 경험해야 할 세계가 더 큰 독자라 루크 라인하트의 『침략자들』을 마주하고 두꺼운 두께에 겁이 났던 것도 사실이다. 믿는 건 오직 비채 출판사였다. 지금까지 비채 출판사 책으로 실패한 경험이 전무하니까, 거기에 표지가 심히 내 스타일이니까 믿고 읽어가기 시작했다.


지구를 찾은 새로운 친구 FF('웃기는 친구'가 될 수도 있고, '망할 파시스트'가 될 수도 있고, '사나운 외국인'이 될 수도 있고 '털복숭이 찰싹이'가 될 수도 있는)의 등장으로 인한 긴장과 인간과 외계인의 공존 혹은 외계인의 일방적인 침략을 특유의 유머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침략자들』은 작가의 끝없는 상상력과 특유의 유머와 해학이 돋보이는 소설이다. 인간보다 월등히 지능이 높은 외계인들의 활약 속에서 드러나는 우리 사회의 민낯을 응시하며 씁쓸해지기도 하는데 상상도 못한 사회 풍자 SF소설은 읽는 동안 수시로 허를 찌르고 판을 뒤집는다. 예측이 불가능한 사람은 짜증 나지만 예측이 불가능한 소설은 손에 땀을 쥐게 하고 빅재미를 보장한다. 그야말로 엄청난 소설이다.


 하지만 사실은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글을 쓰려면 언제나 먼저 청중이 누구인지 결정해야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번 희곡의 청중은 반드시 인간일 수밖에 없으므로, 나는 아주 제한된 범위 내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비유하자면, 애완동물을 즐겁게 해주려고 희곡을 쓰는 인간이 된 꼴이었다.

 첫 번째 문제는 FF를 극에서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그들이 인간 관객에게 '진짜'가 되려면 겉보기에 인간이 되는 길밖에 없었다. 내 희곡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FF가 인간과 같은 감정을 지니고 있어서 사랑하고, 증오하고, 질투하고, 탐욕을 부리고, 분노할 수 있는 척해야 할 터였다. 뭐, 어차피 모든 희곡에는 그런 가장이 필요하므로 나는 인간적인 FF를 만들어낼 생각이었다. 

 다음 문제는 FF를 극에 등장시키는 것이었다. 나는 FF의 변신을 인간들이 재미있어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나의 FF들은 극중에서 끊임없이 모습을 바꿔야 할 것이다. 하지만 주로 인간과 비슷한 다양한 모습이 될 것이다.

 다음 문제는 장르였다. 우리 FF들은 모든 인간을 멍청이로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쓸 수 있는 장르는 딱 하나 코미디밖에 없었다. 이 얼마나 적절한가. 내 프랑스 친구들이 내게 '몰리에르'라는 이름을 주었는데, 지금 내가 문득 코미디를 쓰자는 결정을 내리다니!

 마지막으로 스토리를 결정해야 했다. 인간들의 훌륭한 희곡은 모두 기본 요소, 즉 사랑, 증오, 경쟁, 질투, 욕망, 탐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나도 인간들의 가장 강렬한 감정들로 내 희곡을 채워야 할 터였다. 나는 등장인물과 FF 등장인물을 몇 명씩 창조한 뒤 극적인 상황에 던져 넣고, 본성에 나머지를 맡기기로 했다. 물론 인간의 본성을 뜻한다. 

 그러면 코미디 한 편이 탄생할 것이다. p.262-263


인류를 싹 쓸어버릴 수도 있지만 재미를 택해 모래성을 쌓고 문학을 논하고 은행을 해킹하는 FF들은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캐릭터들이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캐릭터들과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이야기는 두꺼운 SF소설에 대한 걱정을 빨리 잊게 만들어줬다. 영화든 시리즈든 영상화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침략자들』에 대한 통찰이 남다르면서도 자신만의 철학을 져버리지 않는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야 한다는 엄격한 기준을 내세우게 된다. 2권을 예고하며 끝을 맺었지만 작가의 죽음으로 2권이 세상에 나올 수 없다는 사실도 한 편의 소설 같다. 그래서 더 특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여러모로 놀라운 경험들의 연속이다.


FF는 지구를 침략했고 루크 라인하트는 독자들의 마음을 제대로 침략했다. 한 권의 소설을 읽었을 뿐이지만 루크 라인하트는 SF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가가 됐다. 더 경험할 수 있는 그의 작품세계가 한정적이라 아쉽다. 맛있는 음식은 아껴두었다가 마지막에 먹는 나는 그의 다른 작품을 최대한 아껴가며 읽어보려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