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수집노트 - a bodyboarder’s notebook
이우일 지음 / 비채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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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치 만화가의 유쾌한 늦바람!

스릴 만점 부기 서핑 에세이

 

이보다 더 완벽한 카피가 있을까. 이우일 작가의 에세이 『파도수집노트』의 카피는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마음의 울림을 주는 단어들의 환상적인 조합이다. 누군가에겐 '몸치'라는 단어가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서핑'이라는 단어와  만나 흥미로울 수 있고 누군가에겐 '서핑' 그 차체만으로 반해버릴 수 있을 것이다. 몸치는 맞는데 서핑에 대해선 아는 것도 일절 없고 관심도 그다지 없는 나를 사로잡은 단어는 '늦바람'이었다. 반평생 변변하게 하는 운동도 없이 실내 생활자로 살아온 운동신경이 둔한 작가가 파도를 타는 서핑에 늦바람이 단단히 들어 삼십 년 동안 묵혀둔 장롱면허를 꺼내 운전을 시작하게 만들고 전국은 물론이고 해외까지 종횡무진 누비며 파도를 타는 이야기는 내 안에 자고 있는 늦바람 DNA를 제대로 자극해주기 충분한 소재였다.

 

"넌 왜 그를 사랑하니?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네가 아깝다!"

 

어쩌면 사랑에 빠지는 감정과 다를 게 없는 듯하다. 매혹되는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고, 그럼에도 멈출 수가 없는 것. 그것으로 인해 정신과 육체가 고통스럽고 금전적으로나 인생에 있어서 큰 손해를 보는 것도 같지만, 그럼에도 그만둘 수 없는 것. 파도타기란 그런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것을 내놓아야 한다.

서울에 살면서 틈틈이 파도를 찾아 바닷가를 떠도는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지만 그건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p.87-90



 

서핑, 부기보드는 나를 자극하는 단어가 아님에도 이우일 작가의 『파도수집노트』를 읽어가는 내내 부지런히 자극이 된다. 제주, 강원, 서해, 남해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풍경과 파도타기를 통해 접근하는 철학적 고찰과 질문들이 작가의 에세이와 일러스트를 통해 몰랐던 세계를 알려주고 작가의 시선, 태도는 좋은 자극제가 되어준다. 나에게 『파도수집노트』는 세상엔 다양한 행복이 있다는 걸 알아가는 여정과도 같았는데 '열정', '도전'이 아닌 '늦바람', '재미'가 끝없이 이어지는 점은 『파도수집노트』의 커다란 강점이 되어 색다른 재미로 읽힌다.

 

파도를 탄다는 건 자연과의 조화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모양과 색이 끊임없이 바뀌는 하늘, 그 하늘에 아름다운 선을 그으며 날고 있는 물새들을 물 위에서 하염없이 바라보게 된다는 것. 마침내 도착한 파도에 오르면 다른 하찮은 욕심들은 모두 사라진다는 것. 물을 가를 땐 자신이 바다에 살고 있는 작은 생명체처럼 느껴진다는 것. 파도를 읽고 그것과 하나가 된다는 것. 파도타기는 우리가 자연의 일부라는 걸 깨닫게 해준다. p.165

 

『파도수집노트』는 이우일 작가의 에세이와 일러스트가 주는 다채로운 재미도 컸지만 사철누드제본의 판형을 넘기며 읽어가는 재미도 이색적이었다. 작가의 아내 선현경 그림책 작가의 프롤로그로 시작해 작가의 딸의 에필로그로 끝을 맺는 것도 무척이나 흥미로웠는데 배우자의, 아빠의 늦바람을 응원해주는 든든한 가족의 축하로 시작과 끝을 하는 책이라니 이보다 완벽한 늦바람 에세이가 있을까. 활동적인 운동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나는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서핑을 경험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우일 작가를 통해 파도를 찾는 서퍼들의 모험과 바다와 파도가 주는 새로운 재미를 조금은 알게 된 것 같다. 환경에 적응하며 자신만의 길을 만드는 삶. 남들이 만들어놓은 가치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찾아가는 삶. 그런 인생을 살고 싶다고 작가는 썼지만 이미 충분히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이우일 작가의 '파도타기'가 나에겐 어느 시기에 어떤 장르 혹은 종목으로 올까. 그때가 오면 『파도수집노트』를 다시 꺼내 읽어보고 싶다. 아마 그땐 이우일 작가가 나에게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잘 살아가고 있다고 응원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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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타프 도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7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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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타프 도쿄>는 소문자로 서술되는 도쿄의 이야기다.

여성 살인청부업자의 이야기를 담은 희곡 <에피타프 도쿄>를 집필중인 K와 자신을 흡혈귀라 주장하는 요시야가 '도쿄의 묘비명'을 찾기 위해 도쿄 곳곳을 누비며 도쿄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이야기하는 온다 리쿠의 장편소설 『에피타프 도쿄』는 도쿄, 흡혈귀, 여성 청부살인업자, 묘비명 등 소설의 흥미진진한 소재들이 기대를 높여주지만 소설의 장르와 분위기는 좀처럼 쉽게 짐작이 되지 않는다. 짐작조차 어려운 이야기를 온다 리쿠는 두 주인공의 일상을 담은 Piece, 요시야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이야기 drawing, K가 집필중인 희곡 <에피타프 도쿄>, <에피타프 도쿄> 상영을 위한 메모 등 다양한 장르의 글들을 교차하여 실험적이고 매력적으로 들려준다. 이야기의 짜임과 책의 편집이 소설의 완성도를 높여주는데 독서 전 가졌던 소설에 관한 기대를 넘치게 충족시켜주는 것은 덤이다.


 아시아의 다른 대도시는 발을 들여놓은 순간 인간이 영위하는 생활 냄새가 생생하게 난다. 또 도쿄나 오사카, 하카타 등 일본 국내의 다른 도시도 열차에서 내리면 각각 독특한 냄새가 난다. 열이 있다. 인간의 체온에서 서린 열, 인간이 발하는 열의 냄새.

 그런데 도쿄에 도착했을 때는 그게 없다. 도쿄 역도, 하네다나 나리타 공항도 냄새가 나지 않는다. 무취의 대도시다. 그런 곳에서 굳이 느끼는 게 있다면 콘크리트와 철의 냄새, 조직과 관리의 냄새다. 실은 이건 필자에게 결코 부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질서가 바르게 유지되고 있다는 의미인 터라 안심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 무기질적인, 무미건조한 부분이 고마울 때도 있다.

 도쿄는 항상 누군가가 어딘가를 '청소'하고 있다. 단순한 현상 유지에 그치는 게 아니라, 존재했던 것의 흔적을 지우고 평평하게 고르려는 힘이 적용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재개발된 곳은 그 지역에 축적된 기억을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듯한, 폭력적이라 해도 될 정도로 살균 소독한 '클린'한 느낌이 든다.

 이건 시간 감각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유럽 같은 곳에서 시간은 '떨어져 쌓이는' 느낌인데, 일본에서는 계속해서 뒤로 사락사락 흘러간다. 그 자리에 멈추지 않고 '흘러가버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눈앞의 것이 잇따라 사라지는 데에 익숙하다. 강박관념처럼 '스크랩 앤 빌드'를 되풀이하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p.185-186

 

도쿄는 넓다.

『에피타프 도쿄』는 천부적인 이야기꾼으로 다양한 장르, 넘치는 상상력의 이야기를 거침없이 들려주는 온다 리쿠의 종합 선물 세트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야기의 구성과 다양한 면지의 책의 구성이 이중적인 의미로 다채롭게 펼쳐져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개인적으로 평소 도쿄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감흥도 별로 없었는데 두 주인공의 동행을 따라가며 엿보는 도쿄의 역사와 풍경은 낯선 도시의 이국적인 매력을 진하게 해주었다. 모르는 도시에 대한 철학적인 시선도 이국적이고 흥미로웠는데 영화나 소설을 통해 몇몇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 내가 알던 도쿄와는 또다른 매력을 전해주었다. 2015년에 쓰여진 소설 속 인물은 도쿄 올림픽에 대해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이야기하고 아직 도쿄 올림픽의 여운이 다 가지 않은 2021년의 독자는 과거의 시선으로 읽어가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어쩌면 도쿄는 과자와 비슷한지도 모르겠다.

 여자는 자신이 산 과일 젤리를 떠올렸다. 여러 층의 젤리와 크림이 시원한 그러데이션을 이루는 과자.

 그래, 도쿄는 과자가 아닐까. 보기에는 화려하고 색깔도 예쁘고 먹으면 더없이 맛있는 과자. 깜짝 놀라게 비싸지만, 이렇게 맛있는 게 세상에 있었나 싶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자꾸자꾸 욕심 나서 허겁지겁 먹게 되는 과자.

 이곳은 과자의 도시. 과자의 집. 하지만 그 안에는 폭탄이 장치 돼 있다. 또는 서서히 퍼지는 독이 들어 있다. 모두가 도쿄의 독을 바라고, 동시에 바라지 않는다.

 사랑스러운 독. 중독성 있는 독. 그게 이 도시다. p.296


<에피타프 도쿄>도 생각해보면 도시와 여자의 이야기다. 

지금까지 많은 작품을 따라 읽은 것은 아니지만 『에피타프 도쿄』의 온다 리쿠는 지금까지 읽어왔던 온다 리쿠와는 또 다른 세계를 보여줬다. 소설을 읽기 전 『에피타프 도쿄』의 장르와 분위기를 쉽게 짐작하지 못했던 것처럼 『에피타프 도쿄』 이후의 온다 리쿠 소설의 장르와 분위기도 쉽게 짐작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다음 작품에 대한 호기심이 여느때보다 더 커진다. 어떤 의미에선, 나에게 온다 리쿠는 과자와 비슷한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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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나만 그래? - 언니들이 알려주는 조직생활 노하우 26 쏠쏠 시리즈 1
언니들의 슬기로운 조직생활 지음 / 콜라주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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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지 않다'가 '좋은 사람은 아니다'와 동의어는 아니다. 잘 생각해보자. 새로운 누군가와 함께 일하게 되면 "그 사람, 일 잘해?"가 우리가 하는 첫번째 질문이다. "착해, 안 착해?"는 그다음이다.

 

일을 좋아하는 희귀종인 나는 심지어 좋아하는 일을 하는 복도 가졌다. 하지만 일을 좋아한다는 말이 일을 잘하고 사회생활을 잘 한다는 말과 동의어는 아니어서 여느 직장인들이 그러하듯 말하자니 쩨쩨하고 숨기자니 옹졸해지는 사소한 고민들부터 끝없는 무거운 고민들까지 일에 관한, 일과 관련된 인간관계에 관한 무수한 고민들을 안고 있다. 회사에서 나만 그럴까?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던졌던 그 질문을 제목으로 한 책을 마주했을 때 누가 내 마음속에 들어갔다 왔나 싶어 놀랐다. 이 책은 딱 내 책이라고 한눈에 알아본 것도 반가운데 세상에 <언니들의 슬기로운 조직생활>이라니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 다 알아주는 언니들을 만났다는 반가움이 더해진다. 

 

<언슬조>의 최대 장점 중 하나는 사원부터 부장까지 각 직급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라고들 한다. 회사에서 만난 우리는 각자의 생각을 알지 못해서, 아니 알 수 있는 기회가 적어 서로를 쉽게 이해하기 힘든 것일지도 모른다. 회사의 신입사원들에게 대학원에서 만난 90년대생 동기들을 투영하면 너그럽게 받아들여지는 순간이 있다. 직급으로 만났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가까워지기 힘든 사이일 수도 있다. p.129-130

 

직장 경력 20년 차 부장부터 사원, 프리랜서 PD까지 다양한 직급의 총 직장 경력 82년인 여섯 명의 언니들로 구성된 팟캐스트 팀 <언니들의 슬기로운 조직생활>이 직장인들이라면 한 번쯤 고민하고 궁금해했을 법한 질문에 대해 나눈 이야기들이 담겨있는 『회사에서 나만 이래?』는 업무와 역량, 인간관계와 자기개발 등 회사생활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며 그야말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포인트를 제대로 짚어주면서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거침이 없다. 인생을 잘못 살았나, 왜 내 주위엔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언니가 없을까 싶다가도 나는 누군가에게 이런 언니가 돼줄 수 있나 반문해보면 자신이 없어 슬퍼지다가도 팟캐스트로 매주 꾸준히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이토록 멋진 책을 내주는 언니들이 있다는 존재만으로 마음이 든든해진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난 것 같아 엄청난 위로가 되기도 하고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다짐과 함께 동기부여가 되기도 한다. 

 

일하는 나에게 높은 가치를 매기는 것에 죄책감을 가지지 말자. '이 정도의 금액을 받는데 기대한 결과를 못 내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은 버리자. 받은 만큼 하지 못할까 걱정하는 대신 더 많이 받고, 더 열심히 하면 된다. 밤낮없이 좋은 프로젝트를 위해 고민하고, 책상 앞에서 길에서 미팅에서 열심을 다하는 사람들이 적절한 대가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p.199

 

『회사에서 나만 그래?』에서 언니들이 담백하게 들려주는 이야기들도 물론 좋았지만 책의 편집도 군더더기 없이 담백했다. '잘난년들이 활개 치는 세상을 위하여!'라는 띠지 문구까지 그야말로 완벽했다. 개인적으로 『회사에서 나만 그래?』가 콜라주 출판사에서 출간된 것도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김하나 작가의 『말하기를 말하기』에 이어 두 번째로 출간한 책이 『회사에서 나만 그래?』라니 두 권의 책만으로도 이 출판사가 무엇을 지향하는지 너무나 잘 알 것 같고 그게 너무 내 스타일이라 무척이나 반갑다. 김하나 작가는 『말하기를 말하기』를 통해 성과에 대한 칭찬을 받았을 때 "아니에요..."라고 하지 말고 "고맙습니다!"라고 하라고 가르쳐줬다. <언니들의 슬기로운 조직생활>은 『회사에서 나만 그래?』에서 '내 뒤에 올 사람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라고 용기를 줬다. 이쯤 되니 콜라주 출판사의 다음 책에 대한 기대가 높아질 수밖에 없는데 두 권의 책으로 이미 충실한 독자가 된 나에겐 이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거란 굳건한 믿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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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숨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6
유즈키 유코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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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 같은 화려한 일러스트, 일본추리작가협회 수상작가, 전율적 범죄 미스터리 등 굵직한 수식어들이 소설에 대한 기대감을 키워주기에 충분하지만 소설보다 먼저 반한 건 책 날개의 작가 소개였다. 아이 둘을 키우며 지역 문학 창작 강좌에 참여해 가능성을 인정받고 마흔 살에 기적 같은 데뷔를 하며 일본을 대표하는 미스터리 작가로 자리 잡은 작가의 이야기는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작가 소개였다. 마침 비슷한 연령에 화려한 데뷔를 했고 비슷한 장르의 소설로 독보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우리나라의 정유정 작가도 떠오르면서 작가와 소설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간다. 

 

 "이 일은, 오직 너만 할 수 있어."

집안 일과 육아에 지쳐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후미에가 우연히 동창 가나코를 만나게 된다. 후미에의 일상과 동떨어진 화려한 삶을 살고 있는 가나코는 후미에에게 꼭 보답하고 싶었다고 고백하며 회원제로 운영되는 고가 화장품 뤼미에르와 관련된 일자리를 제안한다. 가나코의 칭찬과 응원에 힘입어 후미에는 다이어트에 성공하고 예전의 미모를 되찾으며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한편 별장 저택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뒤쫓는 형사 하타와 나쓰키는 살인 사건 실마리를 풀기 위해 선글라스 여성의 정체를 추적하고 있다.

 

 후미에는 거울 속 자신을 봤다.

 턱이 두 겹인 뚱뚱한 여자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귓속에서 가나코 목소리가 들렸다.

 -동경하던 무타 씨가 다시 아름다워지는 모습을 보고 싶어.

 "다시 아름다워, 진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머릿속 가나코가 대답했다.

 -맞아. 당신은 아름다워질 거야. p.168

 

 이 사건의 뒤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뭔가가 있다.

 오랫동안 갈고 닦인 형사의 감이 하타에게 그렇게 알리고 있었다.

가나코와 우연한 만남을 가진 뒤 인생의 전환점을 가지게 된 후미에의 이야기와 별장 저택에서 살해된 다자키 미노루의 살인사건 이야기가 교차되어 이야기가 전개되는 동안 많은 작품들이 연상되며 흡인력을 높여갔다. 이를테면 후미에의 외모 변화와 함께 외모지상주의를 꼬집는 부분들에선 미나토 가나에의 『조각들』이 떠오르기도 했고 미스터리한 정체의 선글라스 여성을 뒤쫓아가는 과정들을 지켜보면서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가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교차되는 두 개의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지고 예상하지 못한 반전을 마주하게 되면서 다른 작품들은 전혀 생각나지 않고 오직 『달콤한 숨결』에만 집중하게 되는데 유즈키 유코의 상당한 내공이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집에 도착한 후미에는 사 온 옷을 침실 옷장에 넣고, 두 팔을 벌린 채 침대에 몸을 던져 똑바로 누웠다.

 고개를 돌려 옷장을 봤다. 인생이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긴자 매장에서 브랜드 옷을 사다니, 일 년 전의 자신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도시유키 월급만으로는 양판점의 싸구려 옷을 사는 게 최선이기도 했고, 지금보다 약 15킬로그램 이상의 살을 몸에 달고 살던 자신은 애당초 패션 자체에 관심을 잃고 있었다.

 후미에는 옷장에서 시선을 떼고 눈을 감았다.

 이제 옛날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 추한 모습을 드러낸 채 10엔, 20엔을 절약하려고 특가품을 찾아다니던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아니, 돌아갈 수 없어. p.286-287

 



 실마리와 실마리가 이어졌다. 그 끝에 선글라스 여성이 있다. 

엄청난 흡인력으로 단숨에 읽히지만 『달콤한 숨결』이 후미에와 가나코, 나쓰키를 통해 던지는 메시지는 꽤나 묵직하다. 그러면서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는 미스터리도 완벽하게 전개된다. 미스터리 장르 소설치고 감정 소모가 컸던 점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장류진 작가의 『달까지 가자』에서 '우리 같은 애들'을 응원하며 읽었던 것처럼, 장류진 작가가 통 크게 '우리 같은 애들'에게 3억 원씩 선물을 줬던 것처럼 다시 인생의 전성기를 맞이한 후미에를 응원하며 읽고 유즈키 유코도 장류진 작가처럼 통 큰 선물을 주길 바랐는데 소설의 엄청난 반전 이후 후미에의 이야기가 사라진 점은 아쉽다. 후미에의 공백은 많은 상상의 여지를 남겨 두었다.

 

『달콤한 숨결』은 그동안 남성들의 세계를 그려왔던 유즈키 유코가 여성 주인공을 전면으로 다뤄 화제가 된 작품이라고 하는데(확실히 이전 작품들과 제목부터 다르다) 『달콤한 숨결』로 유즈키 유코를 처음 읽은 나로서는 작가의 이전 작품들이 쉽게 짐작이 가지 않아 더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유즈키 유코. 『달콤한 숨결』을 만나기 전까진 몰랐던 작가였는데 소설을 읽어가던 며칠 사이 기억해야 할 이름이 되었다. 난 문학에 대한 정보도 빠르고 좋은 작가들을 부지런히 챙겨읽는데 자신이 있는 사람인데 왜 이제서야 유즈키 유코를 알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는 반성으로 『달콤한 숨결』의 서평을 마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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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사람
정호승 지음 / 비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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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계획을 거창하게 세우는 사람은 아닌데 올해는 한 달에 시집 한 권씩 읽어보겠다는 거창한 계획을 세웠었다. 올해가 가기도 전이지만 결과는 이미 예전에 대실패. 한 달에 한 권이 아닌 한 달에 한 편으로 적당히(?) 나 자신과 협상을 봤지만 한 달에 시 한편 챙기는 일도 만만치 않을 정도로 나에게 시는 어렵고 먼 존재다. 1월이 다 가기도 전에 올해의 계획을 실패하긴 했지만 새 옷을 입은 정호승 시인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보자마자 올해의 실패를 만회할 수 있는 책을 만났다는 반가움이 밀려왔다. 


시집이 개정판을 내며 최근 발표한 시들을 추가해 몸집을 키워가는 모습이 문학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라서 2021년 개정증보판으로 만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독자로서도 의미를 크게 부여하게 된다. 거기에 흔히 봐왔던 시집들과는 달리 소설이나 에세이집에 더 어울려 보이는 판형과 두께(가름끈이 있는 시집이라니!)는 충분히 압도적이다. 400페이지가 넘는 시집을 한 권 읽어야 한다는 부담에 시집으로 서평을 쓰는 일도 처음이라 부담의 연속이지만 시는 쓴 사람의 것이 아니고 읽는 사람의 것이라는 시인의 말에 밑도 끝도 없이 밀려오던 부담감은 애정과 책임감으로 변해있다. 시인의 말부터 이미 예술이니 역시 시는 아무나 쓰는 게 아니다.




가족과 일상, 자연과 현대사의 흐름을 시를 통해 엿보게 되고 과거에 만났던 시를 다시 만나며 그때의 나를 추억하게 된다. 「수선화에게」를 다이어리에 옮겨 적었던 대학생 시절 나는 외로웠고 많이 울었었다. 사회 초년생 시절 우연히  「밥값」을 읽다가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터졌던 일도 있었다. 오랜 시간 시와는 먼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틀렸음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읽으며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런 내가 좋아진다.


책장에 가지런히 꽃아 두는 것보다 침대 머리맡에 두고 수시로 자주 넘겨보는 책들이 종종 있다. 나의 경우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는 짧은 호흡의 에세이나 총천연색 꿈을 꾸게 할 것 같은 환상적인 이야기의 책들이 주로 침대 머리맡 자리를 차지하곤 하는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 역시 책장보다는 침대 머리맡 ZONE에 더 어울리는 책이라 아직까지 책장 자리를 배정받지 못하고 있다. 시집이 어려워서 오래 끄는 것이 아닌 자주 챙겨 읽기 위해 오래 붙들고 있는 경우는 처음이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여러모로 의미가 있다. 이번 개정증보판이 최종 버전이 아니길, 언젠가 지금의 나를 추억하며 다른 표지의 더 두꺼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읽는 날이 오길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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