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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숨결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6
유즈키 유코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1년 9월
평점 :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 같은 화려한 일러스트, 일본추리작가협회 수상작가, 전율적 범죄 미스터리 등 굵직한 수식어들이 소설에 대한 기대감을 키워주기에 충분하지만 소설보다 먼저 반한 건 책 날개의 작가 소개였다. 아이 둘을 키우며 지역 문학 창작 강좌에 참여해 가능성을 인정받고 마흔 살에 기적 같은 데뷔를 하며 일본을 대표하는 미스터리 작가로 자리 잡은 작가의 이야기는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작가 소개였다. 마침 비슷한 연령에 화려한 데뷔를 했고 비슷한 장르의 소설로 독보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우리나라의 정유정 작가도 떠오르면서 작가와 소설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간다.
"이 일은, 오직 너만 할 수 있어."
집안 일과 육아에 지쳐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후미에가 우연히 동창 가나코를 만나게 된다. 후미에의 일상과 동떨어진 화려한 삶을 살고 있는 가나코는 후미에에게 꼭 보답하고 싶었다고 고백하며 회원제로 운영되는 고가 화장품 뤼미에르와 관련된 일자리를 제안한다. 가나코의 칭찬과 응원에 힘입어 후미에는 다이어트에 성공하고 예전의 미모를 되찾으며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한편 별장 저택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뒤쫓는 형사 하타와 나쓰키는 살인 사건 실마리를 풀기 위해 선글라스 여성의 정체를 추적하고 있다.
후미에는 거울 속 자신을 봤다.
턱이 두 겹인 뚱뚱한 여자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귓속에서 가나코 목소리가 들렸다.
-동경하던 무타 씨가 다시 아름다워지는 모습을 보고 싶어.
"다시 아름다워, 진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머릿속 가나코가 대답했다.
-맞아. 당신은 아름다워질 거야. p.168
이 사건의 뒤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뭔가가 있다.
오랫동안 갈고 닦인 형사의 감이 하타에게 그렇게 알리고 있었다.
가나코와 우연한 만남을 가진 뒤 인생의 전환점을 가지게 된 후미에의 이야기와 별장 저택에서 살해된 다자키 미노루의 살인사건 이야기가 교차되어 이야기가 전개되는 동안 많은 작품들이 연상되며 흡인력을 높여갔다. 이를테면 후미에의 외모 변화와 함께 외모지상주의를 꼬집는 부분들에선 미나토 가나에의 『조각들』이 떠오르기도 했고 미스터리한 정체의 선글라스 여성을 뒤쫓아가는 과정들을 지켜보면서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가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교차되는 두 개의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지고 예상하지 못한 반전을 마주하게 되면서 다른 작품들은 전혀 생각나지 않고 오직 『달콤한 숨결』에만 집중하게 되는데 유즈키 유코의 상당한 내공이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집에 도착한 후미에는 사 온 옷을 침실 옷장에 넣고, 두 팔을 벌린 채 침대에 몸을 던져 똑바로 누웠다.
고개를 돌려 옷장을 봤다. 인생이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긴자 매장에서 브랜드 옷을 사다니, 일 년 전의 자신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도시유키 월급만으로는 양판점의 싸구려 옷을 사는 게 최선이기도 했고, 지금보다 약 15킬로그램 이상의 살을 몸에 달고 살던 자신은 애당초 패션 자체에 관심을 잃고 있었다.
후미에는 옷장에서 시선을 떼고 눈을 감았다.
이제 옛날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 추한 모습을 드러낸 채 10엔, 20엔을 절약하려고 특가품을 찾아다니던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아니, 돌아갈 수 없어. p.286-287
실마리와 실마리가 이어졌다. 그 끝에 선글라스 여성이 있다.
엄청난 흡인력으로 단숨에 읽히지만 『달콤한 숨결』이 후미에와 가나코, 나쓰키를 통해 던지는 메시지는 꽤나 묵직하다. 그러면서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는 미스터리도 완벽하게 전개된다. 미스터리 장르 소설치고 감정 소모가 컸던 점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장류진 작가의 『달까지 가자』에서 '우리 같은 애들'을 응원하며 읽었던 것처럼, 장류진 작가가 통 크게 '우리 같은 애들'에게 3억 원씩 선물을 줬던 것처럼 다시 인생의 전성기를 맞이한 후미에를 응원하며 읽고 유즈키 유코도 장류진 작가처럼 통 큰 선물을 주길 바랐는데 소설의 엄청난 반전 이후 후미에의 이야기가 사라진 점은 아쉽다. 후미에의 공백은 많은 상상의 여지를 남겨 두었다.
『달콤한 숨결』은 그동안 남성들의 세계를 그려왔던 유즈키 유코가 여성 주인공을 전면으로 다뤄 화제가 된 작품이라고 하는데(확실히 이전 작품들과 제목부터 다르다) 『달콤한 숨결』로 유즈키 유코를 처음 읽은 나로서는 작가의 이전 작품들이 쉽게 짐작이 가지 않아 더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유즈키 유코. 『달콤한 숨결』을 만나기 전까진 몰랐던 작가였는데 소설을 읽어가던 며칠 사이 기억해야 할 이름이 되었다. 난 문학에 대한 정보도 빠르고 좋은 작가들을 부지런히 챙겨읽는데 자신이 있는 사람인데 왜 이제서야 유즈키 유코를 알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는 반성으로 『달콤한 숨결』의 서평을 마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