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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타프 도쿄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7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1년 9월
평점 :
<에피타프 도쿄>는 소문자로 서술되는 도쿄의 이야기다.
여성 살인청부업자의 이야기를 담은 희곡 <에피타프 도쿄>를 집필중인 K와 자신을 흡혈귀라 주장하는 요시야가 '도쿄의 묘비명'을 찾기 위해 도쿄 곳곳을 누비며 도쿄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이야기하는 온다 리쿠의 장편소설 『에피타프 도쿄』는 도쿄, 흡혈귀, 여성 청부살인업자, 묘비명 등 소설의 흥미진진한 소재들이 기대를 높여주지만 소설의 장르와 분위기는 좀처럼 쉽게 짐작이 되지 않는다. 짐작조차 어려운 이야기를 온다 리쿠는 두 주인공의 일상을 담은 Piece, 요시야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이야기 drawing, K가 집필중인 희곡 <에피타프 도쿄>, <에피타프 도쿄> 상영을 위한 메모 등 다양한 장르의 글들을 교차하여 실험적이고 매력적으로 들려준다. 이야기의 짜임과 책의 편집이 소설의 완성도를 높여주는데 독서 전 가졌던 소설에 관한 기대를 넘치게 충족시켜주는 것은 덤이다.
아시아의 다른 대도시는 발을 들여놓은 순간 인간이 영위하는 생활 냄새가 생생하게 난다. 또 도쿄나 오사카, 하카타 등 일본 국내의 다른 도시도 열차에서 내리면 각각 독특한 냄새가 난다. 열이 있다. 인간의 체온에서 서린 열, 인간이 발하는 열의 냄새.
그런데 도쿄에 도착했을 때는 그게 없다. 도쿄 역도, 하네다나 나리타 공항도 냄새가 나지 않는다. 무취의 대도시다. 그런 곳에서 굳이 느끼는 게 있다면 콘크리트와 철의 냄새, 조직과 관리의 냄새다. 실은 이건 필자에게 결코 부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질서가 바르게 유지되고 있다는 의미인 터라 안심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 무기질적인, 무미건조한 부분이 고마울 때도 있다.
도쿄는 항상 누군가가 어딘가를 '청소'하고 있다. 단순한 현상 유지에 그치는 게 아니라, 존재했던 것의 흔적을 지우고 평평하게 고르려는 힘이 적용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재개발된 곳은 그 지역에 축적된 기억을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듯한, 폭력적이라 해도 될 정도로 살균 소독한 '클린'한 느낌이 든다.
이건 시간 감각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유럽 같은 곳에서 시간은 '떨어져 쌓이는' 느낌인데, 일본에서는 계속해서 뒤로 사락사락 흘러간다. 그 자리에 멈추지 않고 '흘러가버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눈앞의 것이 잇따라 사라지는 데에 익숙하다. 강박관념처럼 '스크랩 앤 빌드'를 되풀이하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p.185-186
도쿄는 넓다.
『에피타프 도쿄』는 천부적인 이야기꾼으로 다양한 장르, 넘치는 상상력의 이야기를 거침없이 들려주는 온다 리쿠의 종합 선물 세트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야기의 구성과 다양한 면지의 책의 구성이 이중적인 의미로 다채롭게 펼쳐져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개인적으로 평소 도쿄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감흥도 별로 없었는데 두 주인공의 동행을 따라가며 엿보는 도쿄의 역사와 풍경은 낯선 도시의 이국적인 매력을 진하게 해주었다. 모르는 도시에 대한 철학적인 시선도 이국적이고 흥미로웠는데 영화나 소설을 통해 몇몇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 내가 알던 도쿄와는 또다른 매력을 전해주었다. 2015년에 쓰여진 소설 속 인물은 도쿄 올림픽에 대해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이야기하고 아직 도쿄 올림픽의 여운이 다 가지 않은 2021년의 독자는 과거의 시선으로 읽어가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어쩌면 도쿄는 과자와 비슷한지도 모르겠다.
여자는 자신이 산 과일 젤리를 떠올렸다. 여러 층의 젤리와 크림이 시원한 그러데이션을 이루는 과자.
그래, 도쿄는 과자가 아닐까. 보기에는 화려하고 색깔도 예쁘고 먹으면 더없이 맛있는 과자. 깜짝 놀라게 비싸지만, 이렇게 맛있는 게 세상에 있었나 싶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자꾸자꾸 욕심 나서 허겁지겁 먹게 되는 과자.
이곳은 과자의 도시. 과자의 집. 하지만 그 안에는 폭탄이 장치 돼 있다. 또는 서서히 퍼지는 독이 들어 있다. 모두가 도쿄의 독을 바라고, 동시에 바라지 않는다.
사랑스러운 독. 중독성 있는 독. 그게 이 도시다. p.296
<에피타프 도쿄>도 생각해보면 도시와 여자의 이야기다.
지금까지 많은 작품을 따라 읽은 것은 아니지만 『에피타프 도쿄』의 온다 리쿠는 지금까지 읽어왔던 온다 리쿠와는 또 다른 세계를 보여줬다. 소설을 읽기 전 『에피타프 도쿄』의 장르와 분위기를 쉽게 짐작하지 못했던 것처럼 『에피타프 도쿄』 이후의 온다 리쿠 소설의 장르와 분위기도 쉽게 짐작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다음 작품에 대한 호기심이 여느때보다 더 커진다. 어떤 의미에선, 나에게 온다 리쿠는 과자와 비슷한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