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 : 젓가락 괴담 경연
미쓰다 신조 외 지음, 이현아 외 옮김 / 비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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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엄청난 기획이 아닐 수 없다. 미쓰다 신조, 쉐시쓰, 예터우쯔, 샤오샹선, 찬호께이. 아시아 장르문학을 대표하는 대가들이 모여 아시아인들에게 친숙한 젓가락을 주제로 릴레이 괴담 경연을 선보인다. 일본, 대만, 홍콩 3개국의 작가들이 들려주는 괴담 릴레이라는 기획만으로 이미 재미는 넘치는데 젓가락이라는 소재와 괴담이라는 장르에 대한 기대와 흥미는 700여 페이지의 두께에 대한 부담도 잊게 만들어 준다. 괴담이라는 장르도, 대만, 홍콩 문학도 독서 스펙트럼이 좁은 나에겐 미지의 세계나 다름없지만 소설을 읽기도 전부터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요소들이 무척이나 많은 책임은 분명하다.


소원을 이루어주는 '젓가락님' 의식에 대한 이야기와 밤마다 이어지는 악몽들에 관한 이야기 미쓰다 신조의 「젓가락님」, 젓가락에 관한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쉐시쓰의 「산호 뼈」, 생방송 중 벌어진 연인의 죽음과 그로 인해 벌어지는 의심과 추적을 따라가는 예터우쯔의 「저주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 젓가락의 저주에 관한 샤오샹선의 「악어 꿈」, 괴담과 관련된 저주의 비밀을 밝혀가는 찬호께이의 「해시노어」. 개별적인 5편의 단편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서늘한 감성과 숨 가쁜 미스터리와 추리가 어우러지고 3개국의 5명의 작가가 어우러져 매력적이고 환상적인 이야기가 완성된다. 누군가에겐 구원이 되지만 누군가에겐 저주가 되는 장치를 통해, 개별적인 이야기가 다시 만나고 서로 이어지는 기법을 통해, 작품을 읽다 보면 공포와는 다른 결로 소름이 돋고 머리가 쭈뼛 서게 되는데 『쾌 : 젓가락 괴담 경연』은 천재적인 기획과 천재적인 작가들이 만들어낸 천재적인 결과물이라는 데 모든 독자들이 동의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찬호께이 작가에 대한 기대가 컸던 탓에 「해시노어」를 제일 먼저 읽을까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처음부터 차근히 읽어가기 시작했는데 반드시 순서대로 읽을 것을 당부하고 싶다. 하마터면 큰 실수(?)를 할 뻔했다.


 "예전에 저주에 관해 말했지만, 도대체 저주가 뭘까요? 사람의 사람에 대한 원한일까요, 아니면 초자연적인 신령이 금기에 저촉한 자에게 내리는 처벌일까요? 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저주의 본질에는 가닿지 못해요……. 저주는 '개인적'인 게 아니라 시스템적인 것입니다. 시스템에 속하지 않으면 저주에 걸리지 않아요. 우리 아시아인은 젓가락을 밥에 꽂으면 재수가 없다고 말하지만, 서양 사람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회 자체가 거대한 거주의 장치인 겁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타이완 전통에는 여자와 임산부를 대상으로 한 금기가 아주 많아요. 금기를 어기면 배척을 당하지요. 하지만 그게 여성만의 문제일까요? 다른 문화 시스템에서는 같은 행동을 해도 여성이 비난을 당하지 않아요. 금기는 사회에 속한 것이지 성별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타이완의 전통사회 자체가 여성을 겨냥한 저주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우리는 이 저주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솔직히 저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요. 이 시스템에서 떠나는 수밖에요. 그런 사회 시스템을 떠날 방법이 없는 사람은요? 타이야 족에게는 '마조(鳥);라는 저주 전설이 있어요. 마조를 키운다고 의심받으면 온 가족이 전부 살해를 당해요. 증거는 필요 없고, 그냥 '사회규범에 부합하지 않는다'하고 하면 돼요. 그때 나도 그랬어요. 전통사회는 자주적인 여성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이 사회에서는 여성이 자의식을 갖고 주도적으로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이질적인 거예요. 그래서 저주가 발동하는 것이죠." p.479-480 샤오샹선 「악어 꿈」


그야말로 이국적이면서 이색적인 다섯 개의 이야기지만 그만큼 친숙한 분위기가 몰입을 도와주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문화, 괴담이 떠오르는가 하면 타국의 작가가 꼬집는 사회현상에 관한 문제들을 보며 우리 사회를 마주 보게 되기도 한다. 이토록 멋진 기획이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시리즈로 나와준다면 좋겠다는 욕심을 가지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소설이 끝나고 다섯 작가의 작가의 말이 이어진 것도 좋았는데 릴레이 괴담을 펼치며 다섯 작가들이 가졌던 압박과 부담과 달리 독자는 다섯 이야기를 읽어나가는 내내 흥미로웠고 즐거웠다. 옴니버스영화나 시리즈로 제작된다면 어떤 배우들과 어떤 감독들이 좋을까, 다른 소재로 릴레이 소설이 이어진다면 뭐가 좋을까, 여성 작가들로만 젓가락 괴담 강연 2가 나온다면 어떤 작가들이 좋을까, 우리나라 작가도 합류한다면 어떤 작가가 어느 이야기 사이에 배치되면 좋을까 등등 이야기의 확장에 대한 기대와 상상의 재미도 상당하다. 그러니까 절대 일회성으로 그치지 말고 어떤 형태로든 시리즈가 되고 이야기가 확장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강렬한 갈망이 나에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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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의 불편함
마리커 뤼카스 레이네펠트 지음, 김지현(아밀) 옮김 / 비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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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부커상 수상 작품에 대한 신뢰도가 남달라 관심을 가지고 챙겨 읽기도 했지만 사실 부커상 수상 작품에 대한 신뢰는 나의 독서 경험이 쌓여 만들어낸 경험치보다는 한국 출판계의 영향 탓이 아닐까 하고 의심을 해보는 요즘이다. 그런 의심을 확신으로 만들어준 건 2021년이 다 가도록 2021년은 물론이고 2020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이 한 권도 출간되지 않고 있기 때문인데 그와는 대비되게 부커상 2020년 수상작인 마리커 뤼카스 레이네펠트의 『그날 저녁의 불편함』의 경우 부커상 최종후보에 오를 때부터 비채 출판사에서 2021년 출간을 예고하며 예비 독서 목록을 든든하게 챙겨 주었다. 2020년 여름부터 2021년 11월 출간까지 출간을 향한 기다림은 작품에 대한 기대감과 비례해졌던 덕분에 출간 소식이 남달리 반가웠다.


마법 이야기를 읽는 것이 금기시된 네덜란드 개혁교회 신자인 부모님 아래 자라 부모님 몰래 <해리포터> 시리즈를 필사해 컴퓨터에 저장해두고 반복해 읽으며 창작의 뜻을 키워온 아이가 스물여덟 살의 나이에 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연소 수상작가가 된 작가의 이력부터가 이미 한 편의 소설 같았다. 남다른 이력의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자 부커상 역대 최연소 작가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그날 저녁의 불편함』이 만만치 않은 소설이라는 걸 알아차리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언젠가 나 자신에게로 갈 거야."

 나는 조용히 말하며 압정을 내 배꼽의 연약한 살에 꽂아넣는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문다. 피가 팬티 고무줄을 타고 흘러내려 천을 적신다. 차마 압정을 도로 빼지 못하겠다. 그랬다가 피가 사방으로 쏟아져 나올까 봐, 그래서 우리 집 사람들 모두가 내가 하나님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가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게 될까 봐 두렵다. p.113


네덜란드 작은 농장 마을에서 평범한 하루를 보내던 열 살 주인공 야스와 가족들의 삶은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큰오빠 맛히스를 죽음으로 내몬 사고로 산산조각이 난다. 부모들은 자식을 잃은 상실과 공허함에 남은 가족들을 돌볼 여력이 없고 열 살 야스 역시 한 겨울에 입었던 코트를 여름이 될 때까지 벗지 못하며 큰 충격에 사로잡힌다. 슬픔과 폭력이 노출된 환경 속에서 아무런 관심도 보호도 받지 못하며 야스는 부모의 죽음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자해하고 작은 토끼를 죽음으로 내몰고 동생과 친구를 성적으로 괴롭히는데 가담하고 자신도 위험에 노출된다. 


 "우리가 뭔가 잘못했다고 생각해?"

 나는 하나에게 묻는다. 하나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하품을 참는다. 우리 둘 다 세 시간밖에 못 잤다. 

 "무슨 뜻이야?"

 "음, 있잖아. 엄마랑 아빠 사이가 이런 게 우리 때문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맛히스 오빠랑 티세이가 죽은 것도 우리 잘못일 수 있고."

 하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하나는 생각에 잠기면 코를 위 아래로 움직이는 버릇이 있다. 이제는 그 애의 뺨에도 펜 자국이 묻었다.

 "이유가 있는 것들은 끝에 가면 다 잘 풀려."

 동생은 종종 현명한 말을 하지만, 자기가 하는 말의 대부분을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p.138


『그날 저녁의 불편함』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그야말로 불편한 소설이다. 자주 책장을 덮게 되고 마음의 정리가 수시로 필요해지는데 이런 독자의 괴로움에도 마리커 뤼카스 레이네펠트의 문장은 더없이 단단하다. 사람들은 맛히스 오빠에 대해 좋은 말들을 해주었지만 열 살의 야스에게 죽음은 여전히 흉측하고 소화하기 어려운 무언가로 느껴지는데 나에겐 이 한 권의 소설이 마치 흉측하고 소화하기 어려운 무언가로 느껴졌다. 작가는 열아홉 살에 스스로 중간이름 '뤼카스'를 짓고 자신을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난 넌바이너리로 선언했다고 하는데 그런 영향이 주인공 야스를 통해서도 드러나 흥미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날 저녁의 불편함』을 읽고 잠식당한 기분은 그야말로 복잡하다.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권하기는 조금 주저하게 되지만 마리너 뤼카스 레이네펠트의 다음 작품들은 당연히 챙겨 읽을 것이라는 데에는 많은 독자들이 동의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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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스노볼 1~2 (양장) - 전2권 소설Y
박소영 지음 / 창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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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흡인력 소설 1위는 박소영 작가의 『스노볼』이었다. 재미와 감동에 작품성까지 겸비한 그야말로 엄청난 소설이라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탄탄한 세계관과 스토리의 촘촘한 짜임새에 반해 박소영 작가가 잠자고 밥 먹는 시간 외엔 소설 집필만 하며 이야기를 확장시켰으면 좋겠다, 영화화된다면 감독은 무조건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며 호들갑을 떨었었는데 『스노볼』 2권 출간 소식이 들려왔다. 영화화 확정과 미국 등 3개국 번역 수출 소식까지 한꺼번에 쏟아지며 독자들의 기대를 완벽하게 부응해준다. 『스노볼』 2권 출간 소식을 접하자마자 확신했다. 올해의 흡인력 소설 1위는 『스노볼』 2권이 될 거라고.


 "우리 만나요. 다 모여요. 다 같이 목소리를 내서 망가진 삶을 되찾아요. 차귀방과 차설은 우리의 삶을 보상할 의무가 있잖아요." (1권) p.423


거대한 유리 천장의 돔 스노볼 아래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따뜻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유토피아와 감기 바이러스가 살지 못하는 겨울 평균 기온 영하 41도의 끔찍한 추위 속에서 하루 열 시간씩 일하며 전기를 생산하며 가난하게 살아가는 바깥세상의 디스토피아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가운데 스노볼 바깥세상에서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며 디렉터를 꿈꾸는 소녀 전초밤이 모두가 선망하고 좋아하는 스노볼의 액터 고해리의 자살로 고해리의 삶을 대신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면서 스노볼에 입성하게 된다. 화려하게만 보였던 고해리의 삶을 대신 살아가면서 알게 된 이본 미디어그룹의 비리를 파헤쳐 나가며 기획상품처럼 소비되는 액터와 언론의 독립성에 대한 문제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던 1편에 이어 2편은 스노볼의 여름을 배경으로 고매령을 죽인 누명을 쓴 전초밤이 이본 일가의 비밀을 파헤치며 긴장과 속도감을 놓치지 못하게 만든다. 




 "아줌마, 내 이름 뜻도 당연히 기억 안 나지?"

 "초밥에서 오타 난 거 아니었어?"

 내가 눈을 부릅뜨자 차향이 장난이라고 웃는다. 그 얼굴에 언뜻 미류 언니의 미소가 겹쳐 이번 한 번은 봐주기로 한다.

 "다시 알려줘, 궁금해."

 "초여름 밤이라는 뜻인데, 그 안에는 우리 엄마랑 아빠가 행복해하던 순간이 담겨 있어. 내가 열심히 쳇바퀴를 돌리면서 스노볼을 꿈꾸던 순간도 있고, 가족들이랑 같이 텔레비전을 보면서 웃던 순간, 그리고 날 닮은 애들하고 어마어마한 모험을 하던 순간까지도 그 안에 다 들어 있어."

 내가 아주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턱을 치켜든다.

 "전초밤이라는 세 글자에 그런 엄청난 것들이 이미 다 담겨 있다는 얘기야."

 알 듯 말 듯한 표정을 짓는 차향을 위해 한 번 더 풀어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엔딩 크레디트에 올라가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알고 있지 않아도, 난 내 이름이 좋아. 이미 특별하니까." (2권) p.444


1년 만에 다시 1권을 읽게 되면서 처음 읽었을 때 무심코 넘어갔던 장면과 대사들이 다시 보니 예사로 읽히지 않아 재미를 더해주고 몰아치는 긴장과 반전에 2권의 책장은 단숨에 넘어간다. 박소영 작가는 흥미로운 세계관에 주인공들은 물론이고 작은 캐릭터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챙기며 디테일을 살린다. 영하 41도, 스노볼, 액터들의 삶 등 소설이라서 가능한 비현실적인 배경으로 스노볼 안과 바깥의 계급사회를 극단적으로 보여주지만 그 광경을 통해 현실의 우리 사회의 민낯을 마주하게 만든다. 표지 이미지와 K-영어덜트, 페이지터너 등의 수식어가 독자층을 한정시키는 것 같아 괜히 내가 다 아쉬울 정도다.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다. 『스노볼』은 더 널리 읽혀야 할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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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회
윌리엄 트레버 지음, 김하현 옮김 / 한겨레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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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에는 그녀의 눈물이 그에게 평온을 가져다줄 것이다.

줌파 라히리,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등 유명 작가들의 작품세계에 영향을 끼친 이른바 '작가들의 작가'로 유명한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집 출간 소식은 문학 애호가들의 마음을 부산스럽게 만든다. 부커상, 노벨상 후보 등의 예사롭지 않은 수식어를 비롯하여 무수한 수상 경력 등 문학계에 끼친 영향력과 업적은 막강하지만 한국에서 너무 늦게 소개된 탓에 작가의 사후 작품들이 부지런히 출간되고 있는데 덕분에 나는 종종 그를 '사후에 유명해진 작가'로 헷갈려 하기도 한다. 작품 출간 소식이 반가운 건 말할 것도 없고 늦게나마 윌리엄 트레버의 문학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다는 기쁨은 출판사에 대한 무한한 감사로 이어진다.

 

 그들은 악수를 나누지 않았고 함께 보낸 저녁 시간을 어떤 식으로든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헤어질 때 두 사람에게는 약간의 놀라움이 남았다. 마땅히 일어났어야 할 상황과 비교하면 그들이 서로를 이용한 것은 스스로에 대한 존엄이었다. 그 기분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승강장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각자가 타야 할 열차가 도착해 다시 멀어져갈 때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 기분은 그들이 깜빡이는 어둠 속을 이동할 때에도 계속되었고, 함께 나눈 즐거움만큼이나 은밀했다. p. 102 「저녁 외출」

 

다시 침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곳에선 잠들지 않아도 꿈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12편의 단편이 수록된 『밀회』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간결하다. 담백하다. 섬세하고 세심하다. 단단하고 담담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름답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잔잔한 이야기 속에서 펼쳐지는 미묘한 심리묘사와 자연스럽게 엇갈리고 비틀어지는 관계를 포착하는 시선이 날카롭기도 하고 세심하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하다. 작품의 진가가 무엇인지, 작가의 진가가 무엇인지를 윌리엄 트레버는 12편의 단편을 통해 보여주고 증명한다. 그러면서 독자들의 몫을, 여지를 남겨둔다. "이 소설을 읽고 난 후 나는 조금도 외롭지 않았다."라는 백수린 작가의 추천사는 나에게 그러한 의미로 닿아왔다. 

 

 훨씬 오래전부터 그녀는 이때를 준비했다. 당연히 그래야 했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준비했고, 처음 시작할 때부터 잔해에서 파편을 그려모으려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틀렸다. 그는 잘 설명했다. 

 그녀는 사랑한다는 그의 말을 다시 들었다. 그러나 너무나도 바꿔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서류 가방으로 그가 손을 뻗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살짝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p.286 「밀회」

 

실패한 것은 누알라가 아니라 이 세상이었다.

김하현 번역가는 옮긴이의 말을 통해 『밀회』의 번역 작업이 쉽지 않았음을 고백하는데 『밀회』의 서평을 작성하는 현재의 나의 상황 역시 난감하고 쉽지가 않다. 작품의 아름다움을, 책의 아름다움을 넘치게 만끽하고 내 몫을 충분히 누렸지만 독서의 만족과 별개로 서평 작성은 쉽지가 않다. 김하현 번역가의 말을 빌리자면 윌리엄 트레버는 가만히 따라가는 자세로 따라 읽으면 된다. 12편의 단편들을 통해 피어나는 무수한 감정들을 느끼며 나도 큰 위안을 얻었다. 서평은 엉망이지만 그의 작품을 더 읽고 싶다. 윌리엄 트레버의 문학 발자취를 더 부지런히, 성실하게 따라가고 싶어진다.

 

 

* 한겨레출판 서평단 하니포터 1기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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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큰 개 파이
백미영 지음 / 텍스트칼로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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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동물을 키워본 경험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찌 된 영문인지 주변 사람들 중에도 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탓에 동물과 밀접한 교감을 나눈 경험이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삶을 살아왔다. 덕분에 랜선에서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보는 동물들이나 동물원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만나는 동물들은 예뻐하고 좋아하지만 가까운 거리에서 동물들을 마주하게 되면 몸이 얼어붙고 마는데 아마도 개선의 여지없이 앞으로도 계속 이런 삶을 살아갈 것 같다.


결혼과 동시에 남편이 키우던 강아지 파이의 공동 견주가 된 백미영 작가가 강아지와 교감을 하며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과 한국에서 대형견의 연주로 살아가는 이야기와 부부와 파이가 낯선 터키에서 적응하며 살아가는 이야기가 1, 2부로 나뉘어 펼쳐진다. 얼마 전 성진환, 오지은 부부의 『괜찮지 않을까, 우리가 함께라면』의 몇몇 에피소드를 통해 대형견이 드문 한국 사회에서 대형 견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엿본 바 있는데 『개큰 개 파이』는 제목에서 이미 드러나듯이 조금 더 본격적이다. 


개와 함께 여행하면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떠난 여행길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방문했던 대부분의 곳에서, 개의 존재로 인해 어떤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물론 긴 차량 이동과 더위, 외부 환경에 예민해진 개를 어르고 달래느라 고생했던 것처럼 무리한 일정에서 오는 어려움은 존재했다. 하지만 여행 전 우려했던 사람들의 못마땅한 시선이나 말로 인한 상처, 예상할 수 없는 제재로 주눅이 드는 일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개와 함께 한 덕분에 누릴 수 있는 경험들을 새롭게 발견했을 뿐이다.

새벽의 도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선은 가족 모두 다치지 않고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었음에 감사하는 한편, 우리를 스쳐 지나간 수많은 사람들에게 받은 배려를 남편과 오래도록 이야기 나눴다. 따뜻하고 감사했다. 결국 이번 여행길은 우리가 한 아름 짊어지고 갔던 걱정들을 훌훌 던져버리고 가벼운 빈손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여행으로 기억될 것이다. 터키에서의 첫 가족 여행은 그렇게 마무리되어갔다. p.303 


초보 견주이자 동시에 대형 견주인 백미영 작가의 시선을 통해 평소 대형견에 대해 가졌던 편견과 지식 부족에 대해 되돌아보게 되고 반성하게 된다. 한국에선 대형견으로 이목을 받고 눈치를 받기도 했던 파이의 일상이 터키로 옮겨지면서 평범함을 누리는 강아지가 되는 변화를 보고 나면 폭력적이었던 건 단순히 덩치가 컸던 대형견들이 아닌 우리 사회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림체가 예뻐서, 알듯 말듯해 보이는 파이의 행동이 엉뚱하고 귀여워서, 하루아침에 대형견의 견주가 된 작가의 일상과 한국과 터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일상의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책장이 술술 넘어가지만 우리 사회가, 내가 당연하게 인식하고 가졌던 대형견들에 대한 편견들을 마주하며 마음이 무거워지고 너무나 미안해지고 만다.



인스타툰으로 많은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 책 출간으로 이어졌지만 나는 거꾸로 책을 통해 처음 파이를 알게 됐고 작가의 인스타까지 넘어가 파이의 랜선 집사가 된 케이스다.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업데이트되는 인스타툰 덕분에 독서가 끝나도 파이의 이야기를 계속 만날 수 있어 기쁨과 동시에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을, 『개큰 개 파이』 후속 시리즈 출간을 목 빠지게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한 권의 책을 읽었을 뿐인데 내적 친밀감을 가진 강아지가 생겼고 대형견의 랜선 집사가 되어있다. 나에겐 엄청난 사건이자 변화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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