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저녁의 불편함
마리커 뤼카스 레이네펠트 지음, 김지현(아밀) 옮김 / 비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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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부커상 수상 작품에 대한 신뢰도가 남달라 관심을 가지고 챙겨 읽기도 했지만 사실 부커상 수상 작품에 대한 신뢰는 나의 독서 경험이 쌓여 만들어낸 경험치보다는 한국 출판계의 영향 탓이 아닐까 하고 의심을 해보는 요즘이다. 그런 의심을 확신으로 만들어준 건 2021년이 다 가도록 2021년은 물론이고 2020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이 한 권도 출간되지 않고 있기 때문인데 그와는 대비되게 부커상 2020년 수상작인 마리커 뤼카스 레이네펠트의 『그날 저녁의 불편함』의 경우 부커상 최종후보에 오를 때부터 비채 출판사에서 2021년 출간을 예고하며 예비 독서 목록을 든든하게 챙겨 주었다. 2020년 여름부터 2021년 11월 출간까지 출간을 향한 기다림은 작품에 대한 기대감과 비례해졌던 덕분에 출간 소식이 남달리 반가웠다.


마법 이야기를 읽는 것이 금기시된 네덜란드 개혁교회 신자인 부모님 아래 자라 부모님 몰래 <해리포터> 시리즈를 필사해 컴퓨터에 저장해두고 반복해 읽으며 창작의 뜻을 키워온 아이가 스물여덟 살의 나이에 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연소 수상작가가 된 작가의 이력부터가 이미 한 편의 소설 같았다. 남다른 이력의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자 부커상 역대 최연소 작가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그날 저녁의 불편함』이 만만치 않은 소설이라는 걸 알아차리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언젠가 나 자신에게로 갈 거야."

 나는 조용히 말하며 압정을 내 배꼽의 연약한 살에 꽂아넣는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문다. 피가 팬티 고무줄을 타고 흘러내려 천을 적신다. 차마 압정을 도로 빼지 못하겠다. 그랬다가 피가 사방으로 쏟아져 나올까 봐, 그래서 우리 집 사람들 모두가 내가 하나님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가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게 될까 봐 두렵다. p.113


네덜란드 작은 농장 마을에서 평범한 하루를 보내던 열 살 주인공 야스와 가족들의 삶은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큰오빠 맛히스를 죽음으로 내몬 사고로 산산조각이 난다. 부모들은 자식을 잃은 상실과 공허함에 남은 가족들을 돌볼 여력이 없고 열 살 야스 역시 한 겨울에 입었던 코트를 여름이 될 때까지 벗지 못하며 큰 충격에 사로잡힌다. 슬픔과 폭력이 노출된 환경 속에서 아무런 관심도 보호도 받지 못하며 야스는 부모의 죽음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자해하고 작은 토끼를 죽음으로 내몰고 동생과 친구를 성적으로 괴롭히는데 가담하고 자신도 위험에 노출된다. 


 "우리가 뭔가 잘못했다고 생각해?"

 나는 하나에게 묻는다. 하나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하품을 참는다. 우리 둘 다 세 시간밖에 못 잤다. 

 "무슨 뜻이야?"

 "음, 있잖아. 엄마랑 아빠 사이가 이런 게 우리 때문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맛히스 오빠랑 티세이가 죽은 것도 우리 잘못일 수 있고."

 하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하나는 생각에 잠기면 코를 위 아래로 움직이는 버릇이 있다. 이제는 그 애의 뺨에도 펜 자국이 묻었다.

 "이유가 있는 것들은 끝에 가면 다 잘 풀려."

 동생은 종종 현명한 말을 하지만, 자기가 하는 말의 대부분을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p.138


『그날 저녁의 불편함』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그야말로 불편한 소설이다. 자주 책장을 덮게 되고 마음의 정리가 수시로 필요해지는데 이런 독자의 괴로움에도 마리커 뤼카스 레이네펠트의 문장은 더없이 단단하다. 사람들은 맛히스 오빠에 대해 좋은 말들을 해주었지만 열 살의 야스에게 죽음은 여전히 흉측하고 소화하기 어려운 무언가로 느껴지는데 나에겐 이 한 권의 소설이 마치 흉측하고 소화하기 어려운 무언가로 느껴졌다. 작가는 열아홉 살에 스스로 중간이름 '뤼카스'를 짓고 자신을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난 넌바이너리로 선언했다고 하는데 그런 영향이 주인공 야스를 통해서도 드러나 흥미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날 저녁의 불편함』을 읽고 잠식당한 기분은 그야말로 복잡하다.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권하기는 조금 주저하게 되지만 마리너 뤼카스 레이네펠트의 다음 작품들은 당연히 챙겨 읽을 것이라는 데에는 많은 독자들이 동의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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