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왜 밖에 서 있을까
최문자 지음 / 난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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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좋아하는 만큼 시를 어려워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좋아하는 시인들은 많다.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시들이 쌓여가는 만큼 마음의 빚도 쌓여가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이 부채를 시인들이 발표한 산문에 크게 반응하는 것으로 퉁치고 있다. 확실히 시인들이 쓰는 산문은 다르다. 풍성한 감성과 글맛이 주는 재미는 물론이고 도리 없이 끌릴 수밖에 없는 단단한 힘으로 시인의 시선, 태도를 엿보여주는데 때론 시처럼, 때론 시인이 쓴 소설처럼 읽히는 글들을 읽어가는 재미가 상당하다.

 

 시가 대상이나 존재의 비밀을 움켜쥐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할지 모른다. 현실에는 부재하는 비밀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부재하는 비밀은 어떻게 현존하는 것일까? 나는 이에 대해 꾸준한 의심과 질문과 반성을 한다. 비밀의 문을 열고, 다시 닫고, 다시 열어보면서 반복해서 비밀을 찾는다. 비밀은 내 시의 가장 소중한 질료이기 때문이다. p.103

 

2022년 봄, 최문자 시인의 시집이 3년 만에 출간됐고 시인의 생애 첫 산문집 『사랑은 왜 밖에 서 있을까』가 출간됐다. 본문이 시작되기 전 작가의 말, 차례의 소제목들을 살펴보는 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한참을 바라보게 하고 꼼꼼하게 읽어나가게 했지만 막상 본문이 시작되자 책장이 빠르게 넘어가고 단숨에 읽히는 마법(?)을 선사한다. 영화 시놉시스라 해도 믿을 작가의 유년시절과 이른바 '흉터'의 시간들을 거쳐 현재를 통과하기까지, 시인의 시선을 따라가는 과정은 나도 잊고 살았던 내 안의 '흉터'들을 어루만져 주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작가의 말에서 최문자 시인은 '김민정 시인은 누구에게서나 흉터를 빨리 찾아낼 수 있는 시인입니다.'라고 썼는데 이 말은 글 너머의 독자들에게도 유효한 것 같다. 『사랑은 왜 밖에 서 있을까』를 읽으며 마주한 나의 흉터들을 마치 최문자 시인과 김민정 시인에게 들킨 것 같은 느낌이다.

 

 사랑과 평화와 아름다움은 위장할수록 숨막힌다. 경건을 위장한 경건도 언젠가는 악취를 내게 된다. 우울한 시대에도, 비록 고통스러운 선택일지라도 본질적인 자기 냄새로 일관하며 진실을 소망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용기를 주는 것 같다. p.134

 

혼자 있는 게 좋고, 혼자 산책하는 게 좋고, 무슨 생각이 떠오르면 그대로 놔두는 게 좋고, 그러다 책 읽는 게 좋고, 글쓰는 게 좋고, 그러다 잠드는 게 좋았다는(p.39-40) 시인의 취향과 성향은 시인이 써 내려간 글에서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과거의 기억 조각들과 삶을 깊이 통찰하는 혜안을 엿보며 나도 내 내면을 골똘히 응시하며 단정한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을 부려보기도 하고 언급되는 모르는 작가, 모르는 작품을 찾아 읽어보고 싶어진다. 현재의 계절을 느끼고, 시인이 글을 통해 전해주는 계절과 자연도 느끼며 책을 읽어가는 내내 마음이 차분해졌었는데 책을 다 읽고 나자 괜히 분주해진다. 아마 용기를 건네받은 것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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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이 멀지 않다 문학동네포에지 43
나희덕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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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김민정 시인의 트위터를 보고 호기롭게 펼쳐봤던 나희덕 시인의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가 문학동네 포에지 시리즈로 새 옷을 입고 출간됐다. 이번에도 역시나 김민정 시인의 영향을 넘치게 받으며 다시 읽어보게 됐다. 하나의 트윗은 나희덕 시인의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 뿐만 아니라 김소진 작가의 작품들까지 독서 위시리스트를 채워줬지만 독서 리스트로 완벽히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곳이 멀지 않다』의 출간 소식을 접하자마자 오랫동안 깜빡하고 있었던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며 반가움이 반, 나에게 있어 여전히 미지의 영역인 김소진 작가의 작품세계에 대한 아쉬움이 반 밀려왔다.


나는 어제보다 얇아졌다.

바람이 와서 자꾸만 살을 저며 간다.

누구를 벨 수도 없는 칼날이

하루하루 자라고 있다. p.18 「탱자 꽃잎보다도 얇은」 


시집을 처음 읽었던 5년 전도 딱 이맘때였던 것 같다. 봄이 완연했고 다양한 색채로 계절의 변화를 바라보며 그에 어울리는 플레이 리스트를 채웠었다. 봄의 감성을 충만히 누리는 와중에 시집을 챙겨 읽는 내 모습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던 기억이 떠오르는데 그때 들었던 플레이 리스트와 요즘 챙겨듣는 플레이 리스트가 크게 차이 나지 않고 그때 독서 노트에 옮겨 적었던 구절과 지금 읽으며 인덱스를 붙인 구절도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다. 무엇보다 이번에도 역시나 이 와중에 시집을 챙겨 읽는 내 모습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이 모든 게 다 김민정 시인 덕분이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p.55 「속리산에서」 


나희덕 시인은 개정판 시인의 말에서 인생의 시기마다 그때에만 쓸 수 있는 시가 있어 서투른 대목이 눈에 띄어도 덧칠을 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문득 지금 이 시기에 쓰고 있는 시인의 시들이 궁금해진다. 창작자에게 인생의 시기마다 그때에만 쓸 수 있는 작품이 있듯이 독자들에게도 어느 시절에 꼭 챙겨 읽어야 하는 그런 작품들이 있다. 이 시기에 내가 놓치고 있는 작품들은 없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무엇보다 이번에야말로 김소진 작가의 작품들을 챙겨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단단히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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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먹이 - 팍팍한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간소한 먹거리 생활 쏠쏠 시리즈 2
들개이빨 지음 / 콜라주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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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나, 언니들의 조직생활, 최지은. 화려한 여성작가 라인업으로 남다른 기대감과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출판사 콜라주에서 반가운 신간 소식이 들려왔다. 당연히 작가가 누구인지가 제일 궁금했고 '들개이빨'이라는 네 글자를 확인하곤 나의 출판사 보는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에 우쭐해져 그만 어깨가 귀에 걸리고 말았다.

 

순간, 장래희망을 꿔다 놓은 보릿자루로 삼는 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뜻 스쳐 지나가는 장난 같은 생각이었지만 곱씹을수록 이거다 싶었습니다. 줄임말도 귀여워요.

 

 꿔보. p.16-17 「시작」

 

『먹는 존재』의 들개이빨 작가의 첫 에세이 『나의 먹이』가 콜라주 출판사에서 출간됐다. 일단 제목부터가 너무 들개이빨 작가다워서 안심이 됐고 『먹는 존재』에서 음식들보다 주인공 유양의 찰진 말빨에 더 반해버렸던 독자였던지라 『나의 먹이』에서 다루는 먹이들보다 작가가 건네줄 글맛에 대한 기대가 더 컸다. 시작부터 그동안 존재조차 모르고 살았던 내 안의 꿔보DNA를 끄집어 내고 과격하고 거침없는 유머 코드로 완벽히 사로잡지만 페이지는 별로 안 넘어갔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도대체 익는 건지 마는 건지 죽어라 딱딱하게 굴어서 사람 속을 태우다가 하루아침에 최고의 상태를 반짝 보여주고 서둘러 썩어버리는 그 지랄맞은 숙성 타이밍 또한 아보카도의 치명적 매력을 더합니다. 열 알 중에서 다섯 알은 딱 알맞게 익은 걸 먹고 다섯 알은 썩은 걸 먹는 경험을 몇 번 하고 나면, 돌아버립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아보카도의 안색만 살피고 자꾸 만지작거리게 됩니다. 이것은 집착받기 위해 태어난 열매입니다. 견과류를 향한 사랑의 불꽃이 아보카도로 확 옮겨 붙었습니다. 얘도 기름이라 그런지 화력이 좋더군요. 저는 광인처럼 아보카도를 사 모았습니다. 집에는 늘 일곱 알가량의 아보카도가 굴러다녔고, 서너 알쯤 남을 때부터는 왠지 모르게 불안해져 얼른 몇 알을 더 사 와서 적정 수량을 유지해야 겨우 안심이 됐습니다. p.106-107 「아보카도」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자신의 멋짐을 크게 떠드는 이 세상에서 장래희망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 일명 꿔보. 채식, 금욕식의 식탁에서 아이돌을 담당할 식재료는 콩으로 메주콩은 만년 센터 초메이저 멤버, 서리태는 다재다능하고 엄청 잘 생겼는데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냉혈 귀족 이미지 멤버, 병아리콩은 중독 출신 국민 아이돌로 한국에서 대활약 중, 렌틸콩은 정체불명의 종교에 심취한 마른 근육 삭발 멤버, 완두콩은 환갑이 넘었지만 워낙 애기 같은 이미지의 막내 포지션. 

 

11가지의 먹이들과 그에 관한 에세이를 읽다 보면 들개이빨 작가의 엉뚱함과 비범함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다. 보통 사람들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의 필터가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시선의 각도가 다른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엄청난 재능임은 확실하다. 매력을 넘어선 마력의 찰진 입담은 '들개이빨'이라는 하나의 장르가 되어 독자들을 매료시킨다. 세상에 먹을 게 얼마나 많은데 11가지 먹이들밖에 다루지 않았는지, 책은 왜 이리 작고 술술 넘어가는 건지……. 좋은 게 넘치는 만큼 아쉬움도 커지는 책이다. 그리고 아쉬움은 당연하게 작가의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로 이어지게 된다. '적게 일하시고 많이 버세요'가 최고의 덕담이지만 들개이빨 작가님 적게 일하시면 나 같은 독자는 숨넘어가서 못 산다. 그러니 그냥 이번 생애는 부지런히 작업하시고 많이 버세요. 저도 부지런히 따라 읽을게요.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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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 - 한국 사회는 이 비극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김승섭 지음 / 난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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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일어난 해상을 비춰주는 뉴스속보를 그저 멍하게 지켜봐야 했고 꽤 오래 힘들어했다. 4년 후 비슷한 상황이 또 발생했고 여전히 뉴스속보를 그저 멍하게 지켜보는 것 밖에 도리가 없었다. 트라우마는 생존자와 유가족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를 잠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안함 사건과 세월호 참사, 두 사건 모두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었으며 절대 반복돼서는 안될 비극인데 어쩌다 비교와 대립 대상이 되어 가슴뿐만 아니라 머리까지 아프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한 이유로 두 사건을 동시에 이야기하는 김승섭 교수의 신간 『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의 독서는 시작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고 그만큼 마음의 빚은 쌓여가고 있었다.


 재난 상황 속에서 항상 다양한 피해자가 생겨나고, 그들이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 인해 갈등을 겪는 일은 드물지 않습니다. 세월호 참사와 천안함 사건에 대한 국가와 한국 사회의 대응은 이러한 갈등을 조율하기보다 피해자들을 분열시키며 적극적으로 악화시켰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드러냅니다. p.148



 

천안함, 세월호 생존자들이 겪었던 시간을 돌아보고 이를 통해 한국 사회가 직시해야 할 문제점을 짚어보고 피우진 전 보훈처장과 고()변희수 하사의 사례와 쌍용차 해고 노동자, 소방 공무원의 트라우마로 이야기가 확장되며 이를 통해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너무나도 명확하게 보여주지만 『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를 읽어가는 내 마음은 여러모로 복잡하다. 천안함 사건과 세월호 참사를 비교하고 각을 세우며 대립하는 이 야만의 시대는 우리에게 트라우마와 과제를 동시에 안겨주었다. 여력이 없음에도 미래의 피해자들이 이기기 위해 함께 싸울 힘을 보태야 함을 일깨워줌과 동시에 그 자체로 큰 힘을 보태주기도 한다.


 저는 사람들 사이의 이해관계에 따른 대립이 더욱 첨예해지기를 바랍니다. 다만 그 대립이 정치적 선동으로 인한 공허한 충돌이 아니라, 구체적인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생한 현실에 뿌리박은 갈등이기를 바랍니다. 그런 갈등이 더 많아져야 합니다. 그런 진통을 겪지 않고 생겨나는 대안은 현실에서 힘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p.261


미래의 피해자들은 당연하게 이길 것이다. 그리고 미래의 독자들이 읽는 『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는 이 폭력과 야만의 시대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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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나무들은 - 최승자의 아이오와 일기
최승자 지음 / 난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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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나무들은 - 아이오와 일기』는 최승자 시인의 두 번째 산문집이자 미국 아이오와 대학에서 주최한 인터네셔널 라이팅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동안 작성한 일기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인터네셔널 라이팅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되어 5개월간 미국에 체류하게 된 것이 작가의 첫 해외여행이지만 최승자 시인에게 첫 해외여행, 미국에서의 장기 체류를 앞둔 설렘이나 호들갑은 통하지 않는다. 이국적인 풍경과 향수 따위도 기대해선 안된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내 시집들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첫번째 시집은 몇년(1981 년)에 나왔고 지금 21쇄를 찍었으며, 라고 말할 때 거의 모든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는 것이다. 외국에서는 시집이라는 게 초판이 다 팔리면 잘 팔리는 거라니까 놀랄 수밖에 없다. 한국 작가들에게 자기 시집에 관해서 이야기 할 때에는 몇 쇄를 찍었는지 이야기하라는 말을 전해주어야겠다. 우리나라야 워낙 시집이 잘 팔리니 어느 시인의 시집이든 그 정도는 팔릴 수 있으니까. 나중에 내가 우리나라에서는 문자 그대로 밀리언셀러 시집도 심심찮게 나온다는 이야기를 할 때는 더욱 놀라는 것 같았다. 그러자 클라크가 자기가 서울에 갔을 때의 체험을 이야기했다. 아마 교보문고에 갔던 모양이다. 무슨 책방이 어찌나 큰지 완전히 지하철만큼 큰데다 책을 사는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부딪치면서 다녀야 한다는 얘기를 했다. 사람들이 진짜 놀라는 눈치였다. 그건 인구가 지나치게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일 텐데 말이다. p.73-74

 

타인의 일기를 이토록 즐겁게, 열심히 집중하며 읽었던 경험이 전무후무한 나에게 『어떤 나무들은』은 그야말로 엄청난 책이었다. 일기를 이토록 재미나고 맛깔나게 쓰는 사람이라면 소설도 잘 쓸 것 같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하면서 최승자 시인이 소설을 썼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멋대로 상상해보기도 하고 이토록 솔직한 글이 다른 참가자 국가에 출간된다면 최승자 시인이 곤란해질 거라는 노파심이 생기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시를 번역하면서 단어 하나하나에 골똘히 고민하면서도 작품에 대한 고집을 잃지 않는 태도를 엿보고 언급된 시들을 다시 찾아보면서 독서의 여정이 끝없이 이어지기도 했다.

 

(…) 쇼나의 방에 모인 일당이 자기 몫의 일 분들을 모아 내게 주겠다는 거다. 그래서 쇼나가 우선 영역된 내 시 세 편을 한 편씩 읽고 그녀가 한 편 읽고 난 뒤에 내가 한국어로 된 시를 한 편씩 읽기로 했다. 베릴은 그 세 편 중에 「삼십 삼 년 동안 두 번째로」라는 시가 꼭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내 시다. 이상하다. 한국어로 된 그 시는 썩 좋은 작품이 아닌데 그게 영어로 번역되었을 때에는 어떤 다른 느낌을 주는 모양이다. 아니 느낌이 아니라, 내 자신이 번역해놓고 보아도 그 작품은 영어로 번역되었을 때에 더 극적인 효과를 갖는 것 같았다. 그 시 자체에 드라마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p.149




 

26년 만에 개정판으로 출간된 『어떤 나무들은』은 마치 최승자 시인이 보내는 '응답하라 1994'같다. 기네스를 언급하는데 검은 빛깔의 맥주라는 설명이 따르는 데서 1994년이 얼마나 오래전 인가를 새삼 깨닫게 되고 낯선 도시에서 이방인으로 체류하며 평소 한국에서는 잘 하지 않았던 파마를 과감하게 시도하고선 만족하는 모습을 보며 멀게만 느껴졌던 최승자 시인에 대해 내적 친밀감을 느끼기도 하고 미국에 와서 느낀 점이 한국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는다는 것이라는 구절이 2022년엔 유효하지 않은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고 1994년에 미국의 한 서점에서 폴 오스터와 루이즈 글릭을 발견하고 읽는 모습은 마치 환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루이즈 글릭은 202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지만 2022년 2월 지금까지도 국내에 출간된 그녀의 책은 없는 상황이다). 동료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에 대한 대화는 물론이고 유명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에 대한 언급과 수다를 엿보는 재미가 그야말로 쏠쏠하다. 

 

사과밭 주인은 노부부였는데 사과밭 한가운데 있는 그들의 하얀 집도 너무 아름다웠다. 그리고 윈드 차임이 바람이 불 때마다 내는 그 소리도 너무 아름다웠다.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그냥 아름답다고 말할 수밖에는. 이상하게도 나는 아이오와에서 단 한 편의 시도, 아니 단 한 줄의 시구도 얻지 못했다. 모든 게 너무 다르기 때문에 내 감수성이 문 꽉 닫아버리고 있는 걸까. 그렇긴 하지만 안타깝지는 않다. 내가 체험하는 것들 모두가 착실하게 내 내부로 가라앉고 있을 거다. 그리고 어느 날 시로 나오겠지. p.172

 

『어떤 나무들은』의 독서는 『어떤 나무들은』 한 권에서 그치지 않고 최승자 시인의 시집을 뒤져보게 만들고 시인의 첫 번째 산문집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에서 『어떤 나무들은』이 쓰인 시절의 글을 다시 찾아보게 만든다. 2022년 새해 첫 독서를 작정하고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로 시작하고서 뒤이어 『어떤 나무들은』까지 따라 읽으며 그 유명한 시 「삼 십 세」의 첫 구절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저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로만 아는 정도였던 최승자 시인에 대해 깊게 빠져들었지만 시를 읽어내는 데에는 어려움이 많은 까막눈이 독자에게 더 이상 읽을 최승자 시인의 산문이 없어서 슬프다. 그리하여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와 『어떤 나무들은』은 아직 책장에 꽂히지 못하고 테이블과 침대 맡을 돌아다니며 수시로 한 꼭지씩 다시 읽히고 있는 중이다. 아마 계절이 바뀌어도 계속 그러할듯하다. 새해였고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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