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 #02 - 멋진 신세계, 2021.1.2.3
문지혁 외 지음 / 다산북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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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10년 동안 새해 첫 독서는 박완서 작가님 아니면 황정은 작가님이었다. 새해 계획을 거창하게 세우는 사람은 아니지만 새해 첫 독서에 대한 고집은 있는 편인데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벌써 2호 출간 소식을 알린 문학잡지 <에픽> 덕분에 매우 드물게 신작으로 새해 첫 독서를 하는 행운까지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2021년 나의 첫 독서는 <에픽> 2호에 실린 황정은 작가의 단편소설 「기담」이었다. 지난여름 황정은 작가의 산문을 읽고 '황정은 작가가 기담 소설을 발표한다면 소설을 통해 어떤 경험을 하게 해 줄지 궁금하고 기대된다'라는 감상을 남겼었는데 「기담」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발표해준 덕분에 올해 첫 독서는 개인적으로 유의미의 대축제가 되었다. 

 

'모든 텍스트는 문학이다'라는 모토 아래 <에픽> 2호의 모든 텍스트는 문학을 넘어 예술을 선보인다. 문지혁 작가, 조효은 예술제본가, 최현숙 구술생애사 작가, 정명섭 작가, 남궁인 작가, 김대주 방송작가, 김화진 편집자, 이지용 SF 연구자, 임지훈 문학평론가, 김솔 작가, 김홍 작가, 송시우 작가, 이주란 작가, 황정은 작가, 의외의사실 만화가까지 다양한 출판, 문학계 종사자들이 참여하여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문학의 진수를 예술적으로 보여준다. 그냥 넘기는 지면 한 장 없이 이렇게 꼼꼼히 계간지 한 권을 완독한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책은 결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책에게 말을 걸 때만 비로소 책은 대답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책이 대답하는 것은 아니고 위대한 책들만 질문에 반응을 하는데, 그 방법은 찰나의 영감과 영원한 침묵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문자에 담기지 않고 여백에 담기기 때문이다. 

 책만큼이나 위대한 영혼을 소유한 자들만 침묵을 듣고 이전 세대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 위대한 책을 읽는 순간, 책과 독자와 화자와 등장인물과 저자의 운명이 모두 바뀌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은, 독서를 통해 독자뿐만 아니라 책의 운명도 바뀐다는 것이다. p.174-175 김솔 「말하지 않는 책」

 

김솔 작가의 「말하지 않는 책」는 작가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작품을 읽었더라면 당연하게 외국 작가를 먼저 떠올렸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였다. 영화 <인셉션>에서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아리아드네(당시 엘렌 페이지)에게 풀기 힘든 미로 그리기 테스트를 하는 장면이 있는데 김솔 작가는 미로를 잘 만들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펠리페 수사의 심리묘사와 소설의 구조가 탁월했고 문단이 없이 문장으로만 이어지는 글도 신선했다. 작가의 이전 작품들에 대한 호기심이 당연하게 따라왔다. 

김홍 작가의 「이인제의 나라」는 '골 때리는 소설'이 이 소설의 가장 정확한 수식어이자 가장 정확한 찬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비상한 엉뚱함이 그 자체로 매력인 소설이다. 이토록 실험적인 소설을 읽을 때면 작가에 대한 관심에 편집자의 후기가 더불어 궁금해지는데 「이인제의 나라」가 수록될 소설집에 실릴 다른 소설들도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송시우 작가의 「프롬 제네바」는 초국적기업 오성전자를 통해 우리 사회가, 현대 기업들이 안고 있는 치부를 들춰내고 꼬집는가 하면 동시에 살인사건의 범인을 유추하는 과정에서 추리적 요소를 더해 재미와 긴장감을 높여준다. 장편으로 이야기를 늘려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게 된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일하고 법과 윤리, 정신의학을 둘러싼 쟁점에 관심이 많다'라는 작가 소개와 소설이 닮은 것 같아 더 흥미로워지는 대목이다. 

이주란 작가는 「이 세상 사람」을 통해 처음 만나는 작가였는데 「이 세상 사람」의 주인공이 한국 소설에서 자주 만나본 적 있는 인물 같아 기시감이 들었다. 무엇보다 황정은 작가 이후로 오랜만에 욕설을 제대로 살릴 줄 아는 작가를 만난 반가움이 컸는데 이주란 작가가 보여주는 한국 사회의 붕괴된 가족 이야기는 앞으로도 자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기대감도 더불어 커진다. 

황정은 작가의 「기담」에서는 억지로 벌어진 호두 껍데기처럼 쪼개지고 있는 것 같은 431번지 빌라를 공동 명의로 구매해 살고 있는 선희와 강희의 이야기가 그야말로 황정은 소설만의 밀도로, 「기담」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펼쳐진다. 집이 단순한 주거공간이 아닌 부동산으로 기능하고 소비하고 있는 시대에 아파트가 아닌 빌라에 주거하는 사람들의 애환을 담은 이야기는 정영수 작가의 「내일의 연인들」을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4층에 이사 온 노모와 남자는 『계속해보겠습니다』의 순자와 나기가 아닐까 상상해보며 독서의 즐거움을 이어갔다. 지난여름에 읽었던 산문에 이어 이번 단편소설에서도 이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황정은 작가 역시 아직 하지 않은 이야기가 많아 보이고 그만큼 기대감이 커진다.


단편소설뿐만 아니라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넘나드는 많은 작가의 글들은 읽는 즐거움의 생생함과 양질의 글을 읽었다는 만족감을 동시에 선사하는가 하면 나의 글은 왜 이리도 형편없는가에 관한 좌절감을 전해주기도 했다. 새해 첫 독서로 양질의 독서를 한 것은 물론이고 반성과 성찰이 앞서기도 했는데 독서의 만족은 앞으로 출간될 <에픽>에 대한 기대감으로 이어진다. '2020년의 디스토피아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낸 모든 분들이 2021년에는 저마다 순수한 의미에서의 '멋진 신세계'를 만날 수 있길 바'란다는 차경희 편집위원의 따뜻한 메시지처럼 2021년은 문학과 함께 멋진 신세계를 만나는 한 해가 되길 바라본다. 시작이 반인데 멋진 반을 채워뒀다. 


* 다산북스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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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매일매일 - 빵과 책을 굽는 마음
백수린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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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린 작가의 첫 산문집이 출간됐다. 반가운 요소들이 한두 개가 아니다. 백수린 작가님 소설이 좋은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고 작가님이 번역하신 소설도 넘치게 좋았는데 책과 빵에 관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첫 산문집이 출간됐다고 하니 기대감이 더불어 높아진다. 『다정한 매일매일』은 누가 봐도 백수린 작가의 제목이고 책도 너무 예쁜데 표지 그림이 평소 작가님이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작업 사진 이미지와 흡사해 반가움을 더해준다. 책의 분위기가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지만 아는 맛이 제일 무섭듯 짐작 가능한 백수린 작가의 산문도 그러할 것이라 생각되니 빨리 읽고 싶다는 마음이 더 조급해진다.

 초고를 쓰다 막히면 습관처럼 두려움이 찾아오기도 한다. 경계한다고 노력했지만 언젠가 읽은 누군가의 문장이나 표현이 무의식에 남아 내 글에 섞여 있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 같은 것. 하지만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이전 소설에 드러난 나의 한계가 이번 소설에서도 반복되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다. 

 소설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상념이 많아지고 마음만 초조해질 때, 내가 나에게 내리는 처방은 과감하게 쓰는 것을 멈추는 일이다. 노트북을 끄고, 긴 산책을 나서거나 강아지를 목욕시키다 보면 기분이 전환되는 날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해결이 되지 않을 때, 엉켜 있는 실타래가 점점 더 꼬이기만 할 때면 나는 찬장을 뒤진다. 커다란 볼과, 밀가루, 설탕 같은 것들을 찾기 위해서. 냉장고 안에 계란이나 버터까지 있으면 더 좋겠다. p.69


 


 

고등학생 때부터 베이킹을 시작했다는 고백을 시작으로 다양한 장르의 책과 작가, 빵과 추억에 관한 이야기들을 그야말로 다정하고 조곤조곤하게 들려주는 백수린 작가의 글에는 갓 구운 빵의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다. 작가가 들려주는 책과 책의 저자, 빵에 대한 호기심과 작가의 일상과 추억에 대한 흥미의 시너지는 엄청지만 백수린 작가의 필력은 더 엄청나다. 짧은 토막의 글 속에서 소설가로서의 고민과 태도,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좋아하는 작가에 대해 쓴 찬사를 엿보며 백수린 작가에 대한 내적 친밀감과 충성도를 동시에 키워간다. 거기에 본문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린 김혜림 작가의 일러스트는 산문의 여운을 오래 남기게 하며 책의 온기를 더해준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이 덩달아 떠오르며 당혹스러운가 하면 책 또는 빵에 대한 이야기가 떠오르지만 책과 빵으로 이어지지 않아 백수린 작가에 대한 대단함을 새삼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 



 

『다정한 매일매일』은 작가의 말부터 시작해 독자들을 제대로 사로잡는다. 작가의 말에 실컷 반해놓고 차례를 살펴보며 수록된 작품들을 가늠해보고 작품과 어우러진 빵을 살펴보는 재미도 상당한데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와 호빵이 도무지 매치가 되지 않아 호기심을 극대화하는가 하면 미국의 중서부에서 즐겨 먹는다는 옥수수빵에 프랜차이즈 빵집의 등장으로 멸종한 샛노란 식빵에 건포도가 박혀있는, 이제는 추억이 돼버린 옥수수 식빵을 추억하게 하는 등 책의 곳곳에서 호기심과 흥미를 불어 일으켰는데 뭐니 뭐니 해도 이 책의 백미는 백수린 작가의 필력이다. 이토록 다정한 산문이라니! 한 권은 아쉽다. 제목처럼 매일매일 읽고 싶은 글이다. 

 작업 전, 차를 우리는 시간은 나에겐 기조의 시간이다. 그저 하얀 사각 종이를 사랑했던, 쓰고자 하는 마음만으로 황홀했던 청순한 마음을 다시금 불러오는 시간,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소설을 쓰기 전에 책상을 치우고, 차를 우리고, 마들렌과 어울리는 아름다운 접시를 골라 책상 위에 올려둔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의 말이 타인을 함부로 왜곡하거나 재단하지 않기를.

 내가 타인의 삶에 대해 말하는 무시무시함에 압도되지 않기를.

 나의 글에 아름다움이 깃들기를.

 나의 글이 조금 더 가볍고 자유로워지기를. 

 그리하여 내가 마침내 나의 좁은 세계를 벗어나서 당신에게 가닿을 수 있기를. p. 105

나의 경우 슬프지만 충분히 짐작 가능하게도 『다정한 매일매일』에 인용된 책과 빵은 대부분 아직 읽지 않은 책들과 아직 경험하지 못한 빵들이 많았다. 그리하여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는 꽉 차있고 먹어봐야 할 빵 리스트도 많아졌다. 덕분에 마음이 바빠진다. 개인적으로 최근 좋아하는 작가들이 등단 후 처음 발표한 산문집에서 보여준 패턴들이 흥미롭기도 했는데 2018년 권여선 작가의 등단 22년 만의 첫 산문집 (음식 산문을 가장한 안주 산문집) 『오늘 뭐 먹지?』, 대산 칼국수집 맛나당의 딸 김애란 작가의 첫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 2020년 빵과 책을 굽는 백수린 작가의 첫 산문집 『다정한 매일매일』까지 첫 산문집을 통해 소설가가 명백하게 보이는 현상이 재밌기도 했다. 감성적이고 따뜻한 연말을 보내고 있는 건 덤이다. 백수린 작가 특유의 풍미 가득한 감성과 글발을 닮고 싶어진다.

* 작가정신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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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 일기 - 공포와 쾌감을 오가는 단짠단짠 마감 분투기
김민철 외 지음 / 놀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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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는 것은 독서량도, 글솜씨도 아닌 마감에 대한 압박과 예민함이다. 서평뿐만 아니라 회사 업무, 일상생활 곳곳에서 마감이나 해야 할 일들을 마주할 때면 오늘보다 더 늙은 내일의 나를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의 마음과 오늘보다 더 연륜 있을 내일의 나에게 맡기자는 마음이 늘 충돌하곤 하는데 내 안의 방구석 서평가 자아는 늘 오늘보다 더 연륜 있을 내일의 나에게 마감을 맡기고, 발등에 불 떨어진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를 실컷 저주하는 엔딩을 맞이하고 마는 대참사를 매번 경험하고 있다(이 서평을 작성하고 있는 지금 역시 마찬가지다). 

 

 

김민철 카피라이터, 이숙명 에세이스트, 권여선 소설가, 권남희 번역가, 강이슬 방송작가, 임진아 일러스트레이터, 이영미 출판편집자, 김세희 소설가가 마감에 대해 작정하고 들려주는 『마감 일기』의 출간 소식을 듣자마자 미친 기획력과 미친 작가 섭외력에 대한 감탄과 동시에 이건 내 책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비루한 서평을 겨우 쥐어짜내는 아마추어인 나에게 진짜 프로들이 들려주는 차원이 다른 딴 세상의 마감 전쟁 이야기는 공감과 호기심을 제대로 저격하는 책이 분명했다. 

 

 마감이란 닥치면 해결되는 일, 이라고 생각한 적이 저도 있습니다. 그런데 살다 보니 '닥치면'이 아니라 '닥쳐야' 해결되는 일이더군요.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제 아이디어와 문장에 대한 부끄러움, 두려움, 불안보다 급박함이 커질 때, 그때 저는 아무 말 난사기가 됩니다. 그러고 나면 이렇게 금세 끝날 걸, 겨우 이 수준으로 끝날 걸, 뭐 한다고 그렇게 스트레스받으며 질질 끌었나 헛웃음이 납니다. 다음 마감은 지금의 가벼운 리듬과 호흡을 기억하면서 서둘러 끝내자고 다짐합니다. 하지만 마감을 일찍 시작해봤자 고통만 길어질 뿐 결국 기일이 지나서야 발동이 걸리는 건 마찬가지라는 시실을 깨달은 십수 년 전부터, 저는 항상 마감 독촉을 집필 시작 신호로 여겼습니다. 그게 잡지라면 며칠의 오차가 생길 뿐입니다. 하지만 책은 다르더군요. 마감 독촉을 받았을 때 집필을 시작하면 짧으면 몇 주, 길면 몇 달이나 오차가 생겨버립니다. 그래서 이번엔 나름대로 일찍 시작한다는 게 첫 문단만 스물두 번 쓰는 불상사를 빚은 것이지요. p.38-39 이숙명 「숨바에서 온 편지」

 

광고계, 출판사, 잡지사, 방송국 등을 무대로 글을 쓰고, 창작을 하며 마감 전쟁을 치르는 8명의 작가들의 단짠단짠 마감 분투기가 생생하게 녹아있는 『마감 일기』를 통해 철저한 준비와 완벽한 책임감을 가지고 업무를 대하는 태도를 엿보며 나에 대한 끝없는 반성을 하는가 하면 잡지사, 출판계, 방송국의 빡센 마감 현장을 팝콘각으로 읽으며 나도 덩달아 심장이 쫄깃해지기도 한다. 자기개발서, 소설, 에세이의 요소가 녹아들어 읽는 재미를 확실하게 보장하는 것은 물론이고 8인의 작가들의 생생한 글맛이 매력을 더 해주는데 책의 표지에선 커피가 넘치듯 책 속에선 매력이 넘쳐난다. 

 

책에 참여한 작가님들의 작품들을 좋아했던 터라 『마감 일기』의 출간 소식을 듣고 반가움도 남달랐었는데 '마감'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가지고 글을 풀어가는 방법들이 각각의 개성을 드러내며 읽는 재미를 더해주었다. '16년을 매일 오늘은 물론, 내일의 마감까지 절대 깨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우며 살았다.'라는 '미리 마감주의자' 김민철 작가님을 가장 공감했더라면 진작에 나는 뭐라도 됐을 텐데 다른 작가님들의 발등에 불 떨어지는 마감 이야기에 거의 끝없는 공감을 하며 연대감을 느끼고 혼자 작가님들과 내적 친밀감을 쌓아갔다. 상상도 못했던 '학교생활 마감'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는 권여선 작가님 덕분에 마감에 대한 시야를 넓히며 나의 과거를 되돌아 보기도 했고 '미리 좀 써놓으면 될 텐데 동서고금 마감이 닥쳐야 글발이 풀리는 건 사이언스'라는 권남희 작가의 말씀은 나의 게으른 마감을 두둔하게 했고 최고의 교감이 되기도 했다. 8편의 에세이만 실려있는 책이 담백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이 책만큼은 편집자의 편집 후기가 실려야 하는 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즐겁게 읽다 보니 작가님들과 연대, 교감이 장난 아니게 쌓여 마감 동지가 생긴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8명의 마감 동지들이 있어 이토록 든든하니 프로 마감러가 아니어도 괜찮다.

 

 

 

* 놀(다산북스)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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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와 모라
김선재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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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꾼다. 꿈에서라도 꿈이라 믿고 싶은 꿈.

책에 대한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책을 읽고 서평을 작성하고 난 후 작가와 작품의 정체를 알게 되는 미공개 서평단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편인데 오랜만에 다산북스에서 미공개 서평단을 모집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작가나 작품에 대한 아무런 선입견 없이 작품을 접하고 모든 것이 열려있는 가능성 속에서 작가가 누구일지, 작품과 어울리는 제목은 무엇일지, 어떤 디자인의 표지로 출간이 될지 실컷 추리하고 상상하는 일은 흔하게 경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 서평단 당첨에 대한 욕심도 남달랐었는데 다행히도 미공개 서평단에 당첨됐다는 기분 좋은 소식이 전해졌다. 출판사에서 알려준 책에 대한 사전 정보라고는 국내 저자의 소설, 소설보다는 자기개발서나 심리서에 어울려 보이는 키워드(#공감능력결핍, #인간관계, #응원하게되는, #잔잔한감동) 뿐이었고 활자도 디자인도 아무것도 없는 무지 표지는 미공개 서평단 가제본에 충실해 보였다. 

 

 사 먹은 닭을 해 먹은 닭으로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거 아니야?

 내 말에 모라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거린다.

 이상하네, 분명 그런 적이 있었던 거 같은데…….

 오래전이잖아. 오래된 거니까…… 전해들은 걸 경험한 걸로 착각할 수 있어.

 기억은 종종 시간의 순서를 바꾸고 진짜와 가짜를 혼동하게 만들기도 한다. 오래된 기억이라면 더더욱 그럴 수 있다. 조금만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그게 진짜일 리 없는 일이었다는 걸 알았을 텐데……. 이 아이는 예나 지금이나 뭘 의심하거나 따질 줄 모른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노라가 편했고 또 그런 이유로 불편했다. p.144-145

 

뭘 모른다는 무구함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생각한다.

각자 부모님의 재혼으로 유년시절 7년간 의붓자매로 함께 지냈던 노라와 모라는 부모님의 이혼으로 서로의 연도 끊어졌다가 모라의 아버지(노라의 계부)의 죽음으로 20여 년 만에 연락이 닿고 만남을 가지게 된다. 닮은 듯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이 오해와 이해 사이에서 과거를 추억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과정을 노라의 시점으로 반, 모라의 시점으로 반을 채우는 소설은 차갑다고 하기엔 따뜻함이 있고 따뜻하다고 하기엔 차가운, 그렇다고 미지근함은 절대 아닌 온도로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더없이 차갑고 더없이 따뜻하다'라는 김숨 작가의 추천사는 그야말로 완벽하다(그러니까 제 말도 그 말이에요). 소설을 읽을 때보다 읽고 난 후 더 많이, 오래 생각나고 신경 쓰이는 인물과 그들의 이야기를 먹먹함과 공허함의 감정을 내내 전해주는데 작가의 정체에 대한 호기심을 제대로 건드려준다.



 엄마구나.

 엄마도 저렇게 도망친 거구나.

 어쩌면…… 저게 나일 수도…… 있겠구나.

 누구도 바라지 않지만 역류하는 물과 오수 때문에 집을 잃거나 쫒겨나게 되듯, 내가 그런 상황이 될 수도 있다고, 여자가 사라진 골목 앞에서 생각했다. 문득, 사라진 여자가 나 같고, 내가 사라진 그 여자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어디로 도망쳤을까. 어떻게 하면 이곳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을까. 나는 부디 그녀들이 꼭꼭 숨어 다시는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랐다. 원망하는 마음을 까맣게 잊고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오래 달리기를 생각한다. p.163

연민에 빠지지 않는 것. 여기까지 나를 끌고 온 건 그거였다.

완벽은커녕 보통, 평균도 되지 못한 환경에서 언제나 약자일 수밖에 없고 당연하게 소외되어 있는 인물들과 상황에 대한 묘사가 너무나도 탁월한 이 소설은 한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같은 것을 보고 같은 말을 하는 세상에서 그러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작정하고 들려준다. 최근 무수히 발표되고 있는 경장편 한국소설이 하나의 트렌드가 되어 더 이상 낯설지 않지만 이번 소설만큼은 짧은 이야기에 대한 아쉬움을 진하게 남긴다. 노라와 모라에 대해, 그들의 감정의 더 깊은 곳까지, 그들의 이야기를 더 알고 싶고 그만큼 걱정도 된다. 작가가 그려낸 다른 작품 속 인물들에 대한 호기심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모라가 모라일 수밖에 없듯이, 나는 나일 수밖에 없다.

작품에 대한 사전 정보가 부족한 만큼 독서의 몰입도 굉장했는데 그 속에서 나름대로 추리했던 건 나보다 나이가 많은 지방 출신의 여성작가 정도였다. 구체적으로 작가를 맞춰보기엔 어려움이 있어 내가 읽어보지 못한 작가일 거라 생각하다가 모라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이은선 작가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었고 소제목(눈을 감은 사람 /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 다시 만난 세계 / 사진 /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 있는 것과 없는 것 / 말할 수 없는 마음 / 노라 / 모라) 중 소설과 가장 어울리는 제목으로 「그들에게는 그들만의」를 꼽았었는데 출판사에서 밝혀준 이 책의 정체는 김선재 작가의 『노라와 모라』였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작가의 작품이라니 좋았던 작품이 더 좋아지고 더 특별해 보인다. 김선재 작가님의 이전 소설 속 인물들에 대한 궁금증에 시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진다. 

* 다산북스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 가제본을 지원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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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게 범죄 - 트레버 노아의 블랙 코미디 인생
트레버 노아 지음, 김준수 옮김 / 부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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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아이를 갖고 싶어." 엄마가 그에게 말했다.

 "난 아이를 원하지 않아." 그가 말했다. 

 "당신에게 아이를 갖자고 하는 게 아냐. 내 아이를 가질 수 있게 날 도와 달라는 거야. 나는 그냥 당신의 정자만 있으면 돼."

 "난 가톨릭이야." 그가 말했다. "우리는 그러면 안 돼."

 "당신도 알겠지만," 엄마가 대답했다. "난 그냥 당신과 자고 어디론가 떠나서 당신에게 자식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해 버릴 수도 있어. 하지만 그런 걸 원하진 않아. 내 맘이 편해질 수 있게 당신의 동의가 필요한 거야. 나는 내 아이를 갖길 원하고, 당신으로부터 그 아이를 얻었으면 해. 원하면 언제든 아이를 볼 수 있지만 어떤 의무도 지지는 않게 될 거야. 아이와 대화할 필요도, 아이를 위해 돈을 낼 필요도 없어. 그냥 나를 위해 이 아이를 만들어 줘."

 엄마 입장에서는, 이 남자가 특별히 자신과 이루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사실, 이 남자와 가족을 이루는 게 법으로 금지됐다는 사실이 매력적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좌지우지하려는 남자가 아닌, 자식을 원했다. 아빠는 내가 알기로 상당히 오랫동안 계속해서 거절했다. 그러다 결국은 허락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는 내가 절대 답을 얻을 수 없는 질문이다.

 허락을 얻은 날로부터 아홉 달이 지난 1984년 2월 2일, 엄마는 제왕절개 수술을 받기 위해 힐브로우 병원에 입원했다. 가족과 떨어져, 함께 다닐 수 없는 남자의 아이를 가진 그녀는 혼자였다. 의사들이 엄마를 분만실로 데려가 복부를 절개하고 수많은 법과 규정과 규제를 위반한 반은 백인이고 반은 흑인인 아이를 꺼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범죄자였다. p.46-47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입증해 주지만, 나는 내 부모의 범죄를 입증하는 증거였다.

실로 오랜만에 사전 정보라곤 거의 전무한 책을 만나 즐거운 독서를 했다. 미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스탠드 업 코메디언이자 이 책의 저자 트레버 노아를 이번에 처음 알게 된 것은 물론이고 『태어난 게 범죄』라는 제목을 '예쁜 게 죄라면 나는 사형감'의 뉘앙스로 받아들일 정도로 무지 상태였다. 그런 내가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되고 매력적으로 느끼게 된 데에는 김중혁 작가의 추천사가 결정적이었는데 이후 조금씩 알게 되는 저자와 책에 관한 정보들은 책의 매력도를 한층 높여주었다.

 

 

 

엄마는 자기 자식이 운명에 얽매이지 않길 원했다.

인종 간 성관계를 법으로 금지했던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 체제하에서 흑인 어머니와 백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출생 자체가 범죄의 증거가 된 탄생기부터 흑인으로도, 백인으로도 인정받지 못하는 그가 유색인으로, 혼혈인으로 떠안게 되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 속에서도 엄마의 아들로 자라나는 성장기까지 트레버 노아가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스펙터클하다. 가톨릭 학교에서 선생님들에게 말썽꾸러기 취급을 받는 아이도, 아웃사이더로 어느 무리에도 끼지 못하는 아이도, 계부에게 학대를 당하는 아이도 트레버 노아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에게 백인 손자 취급을 받으며 다른 사촌들과 다른 대접을 받으며 자라는 아이도 트레버 노아다. 이토록 가혹하고 슬픈 이야기를 트레버 노아는 유머와 희망을 잃지 않고 이야기한다. 

 

 

아웃사이더였던 나는 나 자신만의 이상한 작은 세계를 만들었다.

『태어난 게 범죄』를 통해 만날 수 있는 건 트레버 노아의 탄생 이야기, 유년시절의 추억 혹은 기억뿐만 아니라 흑인들을 위한 공공 운송 수단을 운영하지 않던 과거의 남아공과 항상 폭력이 잠복해 있고 그것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세계에서 살던 어린아이도 만날 수 있다. 생생한 캐릭터(트레버 노아를 탄생시킨 그의 엄마는 정말 매력이 터진다)와 흡인력 있는 이야기, 적당하게 건드려주는 문제의식은 『태어난 게 범죄』를 흥미진진한 한 편의 소설로 봐도 무방해 보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태어난 게 범죄』는 트레버 노아의 경험이자 당시 남아공의 현실이다. 남아공의 역사 이야기도 아니고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옛날 옛적 이야기도 아닌 나와 동갑이 들려주는 자전 에세이라는 점이 이 책의 가장 놀라운 점이다. 그 속에 녹아든 유머와 희망, 엄마의 사랑과 엄마를 향한 아들의 사랑을 오래도록 가슴에 품으며 그를 응원할 것 같다. 사전 정보라곤 거의 없던 책은 어느새 누구에게나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는 책이 되었다.  

* 부키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 지원을 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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