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게 범죄 - 트레버 노아의 블랙 코미디 인생
트레버 노아 지음, 김준수 옮김 / 부키 / 2020년 10월
평점 :
품절


 

 "나 아이를 갖고 싶어." 엄마가 그에게 말했다.

 "난 아이를 원하지 않아." 그가 말했다. 

 "당신에게 아이를 갖자고 하는 게 아냐. 내 아이를 가질 수 있게 날 도와 달라는 거야. 나는 그냥 당신의 정자만 있으면 돼."

 "난 가톨릭이야." 그가 말했다. "우리는 그러면 안 돼."

 "당신도 알겠지만," 엄마가 대답했다. "난 그냥 당신과 자고 어디론가 떠나서 당신에게 자식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해 버릴 수도 있어. 하지만 그런 걸 원하진 않아. 내 맘이 편해질 수 있게 당신의 동의가 필요한 거야. 나는 내 아이를 갖길 원하고, 당신으로부터 그 아이를 얻었으면 해. 원하면 언제든 아이를 볼 수 있지만 어떤 의무도 지지는 않게 될 거야. 아이와 대화할 필요도, 아이를 위해 돈을 낼 필요도 없어. 그냥 나를 위해 이 아이를 만들어 줘."

 엄마 입장에서는, 이 남자가 특별히 자신과 이루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사실, 이 남자와 가족을 이루는 게 법으로 금지됐다는 사실이 매력적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좌지우지하려는 남자가 아닌, 자식을 원했다. 아빠는 내가 알기로 상당히 오랫동안 계속해서 거절했다. 그러다 결국은 허락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는 내가 절대 답을 얻을 수 없는 질문이다.

 허락을 얻은 날로부터 아홉 달이 지난 1984년 2월 2일, 엄마는 제왕절개 수술을 받기 위해 힐브로우 병원에 입원했다. 가족과 떨어져, 함께 다닐 수 없는 남자의 아이를 가진 그녀는 혼자였다. 의사들이 엄마를 분만실로 데려가 복부를 절개하고 수많은 법과 규정과 규제를 위반한 반은 백인이고 반은 흑인인 아이를 꺼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범죄자였다. p.46-47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입증해 주지만, 나는 내 부모의 범죄를 입증하는 증거였다.

실로 오랜만에 사전 정보라곤 거의 전무한 책을 만나 즐거운 독서를 했다. 미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스탠드 업 코메디언이자 이 책의 저자 트레버 노아를 이번에 처음 알게 된 것은 물론이고 『태어난 게 범죄』라는 제목을 '예쁜 게 죄라면 나는 사형감'의 뉘앙스로 받아들일 정도로 무지 상태였다. 그런 내가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되고 매력적으로 느끼게 된 데에는 김중혁 작가의 추천사가 결정적이었는데 이후 조금씩 알게 되는 저자와 책에 관한 정보들은 책의 매력도를 한층 높여주었다.

 

 

 

엄마는 자기 자식이 운명에 얽매이지 않길 원했다.

인종 간 성관계를 법으로 금지했던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 체제하에서 흑인 어머니와 백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출생 자체가 범죄의 증거가 된 탄생기부터 흑인으로도, 백인으로도 인정받지 못하는 그가 유색인으로, 혼혈인으로 떠안게 되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 속에서도 엄마의 아들로 자라나는 성장기까지 트레버 노아가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스펙터클하다. 가톨릭 학교에서 선생님들에게 말썽꾸러기 취급을 받는 아이도, 아웃사이더로 어느 무리에도 끼지 못하는 아이도, 계부에게 학대를 당하는 아이도 트레버 노아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에게 백인 손자 취급을 받으며 다른 사촌들과 다른 대접을 받으며 자라는 아이도 트레버 노아다. 이토록 가혹하고 슬픈 이야기를 트레버 노아는 유머와 희망을 잃지 않고 이야기한다. 

 

 

아웃사이더였던 나는 나 자신만의 이상한 작은 세계를 만들었다.

『태어난 게 범죄』를 통해 만날 수 있는 건 트레버 노아의 탄생 이야기, 유년시절의 추억 혹은 기억뿐만 아니라 흑인들을 위한 공공 운송 수단을 운영하지 않던 과거의 남아공과 항상 폭력이 잠복해 있고 그것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세계에서 살던 어린아이도 만날 수 있다. 생생한 캐릭터(트레버 노아를 탄생시킨 그의 엄마는 정말 매력이 터진다)와 흡인력 있는 이야기, 적당하게 건드려주는 문제의식은 『태어난 게 범죄』를 흥미진진한 한 편의 소설로 봐도 무방해 보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태어난 게 범죄』는 트레버 노아의 경험이자 당시 남아공의 현실이다. 남아공의 역사 이야기도 아니고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옛날 옛적 이야기도 아닌 나와 동갑이 들려주는 자전 에세이라는 점이 이 책의 가장 놀라운 점이다. 그 속에 녹아든 유머와 희망, 엄마의 사랑과 엄마를 향한 아들의 사랑을 오래도록 가슴에 품으며 그를 응원할 것 같다. 사전 정보라곤 거의 없던 책은 어느새 누구에게나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는 책이 되었다.  

* 부키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 지원을 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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