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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와 모라
김선재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11월
평점 :

꿈을 꾼다. 꿈에서라도 꿈이라 믿고 싶은 꿈.
책에 대한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책을 읽고 서평을 작성하고 난 후 작가와 작품의 정체를 알게 되는 미공개 서평단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편인데 오랜만에 다산북스에서 미공개 서평단을 모집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작가나 작품에 대한 아무런 선입견 없이 작품을 접하고 모든 것이 열려있는 가능성 속에서 작가가 누구일지, 작품과 어울리는 제목은 무엇일지, 어떤 디자인의 표지로 출간이 될지 실컷 추리하고 상상하는 일은 흔하게 경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 서평단 당첨에 대한 욕심도 남달랐었는데 다행히도 미공개 서평단에 당첨됐다는 기분 좋은 소식이 전해졌다. 출판사에서 알려준 책에 대한 사전 정보라고는 국내 저자의 소설, 소설보다는 자기개발서나 심리서에 어울려 보이는 키워드(#공감능력결핍, #인간관계, #응원하게되는, #잔잔한감동) 뿐이었고 활자도 디자인도 아무것도 없는 무지 표지는 미공개 서평단 가제본에 충실해 보였다.
사 먹은 닭을 해 먹은 닭으로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거 아니야?
내 말에 모라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거린다.
이상하네, 분명 그런 적이 있었던 거 같은데…….
오래전이잖아. 오래된 거니까…… 전해들은 걸 경험한 걸로 착각할 수 있어.
기억은 종종 시간의 순서를 바꾸고 진짜와 가짜를 혼동하게 만들기도 한다. 오래된 기억이라면 더더욱 그럴 수 있다. 조금만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그게 진짜일 리 없는 일이었다는 걸 알았을 텐데……. 이 아이는 예나 지금이나 뭘 의심하거나 따질 줄 모른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노라가 편했고 또 그런 이유로 불편했다. p.144-145
뭘 모른다는 무구함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생각한다.
각자 부모님의 재혼으로 유년시절 7년간 의붓자매로 함께 지냈던 노라와 모라는 부모님의 이혼으로 서로의 연도 끊어졌다가 모라의 아버지(노라의 계부)의 죽음으로 20여 년 만에 연락이 닿고 만남을 가지게 된다. 닮은 듯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이 오해와 이해 사이에서 과거를 추억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과정을 노라의 시점으로 반, 모라의 시점으로 반을 채우는 소설은 차갑다고 하기엔 따뜻함이 있고 따뜻하다고 하기엔 차가운, 그렇다고 미지근함은 절대 아닌 온도로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더없이 차갑고 더없이 따뜻하다'라는 김숨 작가의 추천사는 그야말로 완벽하다(그러니까 제 말도 그 말이에요). 소설을 읽을 때보다 읽고 난 후 더 많이, 오래 생각나고 신경 쓰이는 인물과 그들의 이야기를 먹먹함과 공허함의 감정을 내내 전해주는데 작가의 정체에 대한 호기심을 제대로 건드려준다.

엄마구나.
엄마도 저렇게 도망친 거구나.
어쩌면…… 저게 나일 수도…… 있겠구나.
누구도 바라지 않지만 역류하는 물과 오수 때문에 집을 잃거나 쫒겨나게 되듯, 내가 그런 상황이 될 수도 있다고, 여자가 사라진 골목 앞에서 생각했다. 문득, 사라진 여자가 나 같고, 내가 사라진 그 여자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어디로 도망쳤을까. 어떻게 하면 이곳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을까. 나는 부디 그녀들이 꼭꼭 숨어 다시는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랐다. 원망하는 마음을 까맣게 잊고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오래 달리기를 생각한다. p.163
연민에 빠지지 않는 것. 여기까지 나를 끌고 온 건 그거였다.
완벽은커녕 보통, 평균도 되지 못한 환경에서 언제나 약자일 수밖에 없고 당연하게 소외되어 있는 인물들과 상황에 대한 묘사가 너무나도 탁월한 이 소설은 한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같은 것을 보고 같은 말을 하는 세상에서 그러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작정하고 들려준다. 최근 무수히 발표되고 있는 경장편 한국소설이 하나의 트렌드가 되어 더 이상 낯설지 않지만 이번 소설만큼은 짧은 이야기에 대한 아쉬움을 진하게 남긴다. 노라와 모라에 대해, 그들의 감정의 더 깊은 곳까지, 그들의 이야기를 더 알고 싶고 그만큼 걱정도 된다. 작가가 그려낸 다른 작품 속 인물들에 대한 호기심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모라가 모라일 수밖에 없듯이, 나는 나일 수밖에 없다.
작품에 대한 사전 정보가 부족한 만큼 독서의 몰입도 굉장했는데 그 속에서 나름대로 추리했던 건 나보다 나이가 많은 지방 출신의 여성작가 정도였다. 구체적으로 작가를 맞춰보기엔 어려움이 있어 내가 읽어보지 못한 작가일 거라 생각하다가 모라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이은선 작가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었고 소제목(눈을 감은 사람 /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 다시 만난 세계 / 사진 /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 있는 것과 없는 것 / 말할 수 없는 마음 / 노라 / 모라) 중 소설과 가장 어울리는 제목으로 「그들에게는 그들만의」를 꼽았었는데 출판사에서 밝혀준 이 책의 정체는 김선재 작가의 『노라와 모라』였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작가의 작품이라니 좋았던 작품이 더 좋아지고 더 특별해 보인다. 김선재 작가님의 이전 소설 속 인물들에 대한 궁금증에 시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진다.

* 다산북스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 가제본을 지원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