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 #02 - 멋진 신세계, 2021.1.2.3
문지혁 외 지음 / 다산북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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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10년 동안 새해 첫 독서는 박완서 작가님 아니면 황정은 작가님이었다. 새해 계획을 거창하게 세우는 사람은 아니지만 새해 첫 독서에 대한 고집은 있는 편인데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벌써 2호 출간 소식을 알린 문학잡지 <에픽> 덕분에 매우 드물게 신작으로 새해 첫 독서를 하는 행운까지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2021년 나의 첫 독서는 <에픽> 2호에 실린 황정은 작가의 단편소설 「기담」이었다. 지난여름 황정은 작가의 산문을 읽고 '황정은 작가가 기담 소설을 발표한다면 소설을 통해 어떤 경험을 하게 해 줄지 궁금하고 기대된다'라는 감상을 남겼었는데 「기담」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발표해준 덕분에 올해 첫 독서는 개인적으로 유의미의 대축제가 되었다. 

 

'모든 텍스트는 문학이다'라는 모토 아래 <에픽> 2호의 모든 텍스트는 문학을 넘어 예술을 선보인다. 문지혁 작가, 조효은 예술제본가, 최현숙 구술생애사 작가, 정명섭 작가, 남궁인 작가, 김대주 방송작가, 김화진 편집자, 이지용 SF 연구자, 임지훈 문학평론가, 김솔 작가, 김홍 작가, 송시우 작가, 이주란 작가, 황정은 작가, 의외의사실 만화가까지 다양한 출판, 문학계 종사자들이 참여하여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문학의 진수를 예술적으로 보여준다. 그냥 넘기는 지면 한 장 없이 이렇게 꼼꼼히 계간지 한 권을 완독한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책은 결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책에게 말을 걸 때만 비로소 책은 대답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책이 대답하는 것은 아니고 위대한 책들만 질문에 반응을 하는데, 그 방법은 찰나의 영감과 영원한 침묵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문자에 담기지 않고 여백에 담기기 때문이다. 

 책만큼이나 위대한 영혼을 소유한 자들만 침묵을 듣고 이전 세대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 위대한 책을 읽는 순간, 책과 독자와 화자와 등장인물과 저자의 운명이 모두 바뀌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은, 독서를 통해 독자뿐만 아니라 책의 운명도 바뀐다는 것이다. p.174-175 김솔 「말하지 않는 책」

 

김솔 작가의 「말하지 않는 책」는 작가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작품을 읽었더라면 당연하게 외국 작가를 먼저 떠올렸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였다. 영화 <인셉션>에서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아리아드네(당시 엘렌 페이지)에게 풀기 힘든 미로 그리기 테스트를 하는 장면이 있는데 김솔 작가는 미로를 잘 만들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펠리페 수사의 심리묘사와 소설의 구조가 탁월했고 문단이 없이 문장으로만 이어지는 글도 신선했다. 작가의 이전 작품들에 대한 호기심이 당연하게 따라왔다. 

김홍 작가의 「이인제의 나라」는 '골 때리는 소설'이 이 소설의 가장 정확한 수식어이자 가장 정확한 찬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비상한 엉뚱함이 그 자체로 매력인 소설이다. 이토록 실험적인 소설을 읽을 때면 작가에 대한 관심에 편집자의 후기가 더불어 궁금해지는데 「이인제의 나라」가 수록될 소설집에 실릴 다른 소설들도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송시우 작가의 「프롬 제네바」는 초국적기업 오성전자를 통해 우리 사회가, 현대 기업들이 안고 있는 치부를 들춰내고 꼬집는가 하면 동시에 살인사건의 범인을 유추하는 과정에서 추리적 요소를 더해 재미와 긴장감을 높여준다. 장편으로 이야기를 늘려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게 된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일하고 법과 윤리, 정신의학을 둘러싼 쟁점에 관심이 많다'라는 작가 소개와 소설이 닮은 것 같아 더 흥미로워지는 대목이다. 

이주란 작가는 「이 세상 사람」을 통해 처음 만나는 작가였는데 「이 세상 사람」의 주인공이 한국 소설에서 자주 만나본 적 있는 인물 같아 기시감이 들었다. 무엇보다 황정은 작가 이후로 오랜만에 욕설을 제대로 살릴 줄 아는 작가를 만난 반가움이 컸는데 이주란 작가가 보여주는 한국 사회의 붕괴된 가족 이야기는 앞으로도 자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기대감도 더불어 커진다. 

황정은 작가의 「기담」에서는 억지로 벌어진 호두 껍데기처럼 쪼개지고 있는 것 같은 431번지 빌라를 공동 명의로 구매해 살고 있는 선희와 강희의 이야기가 그야말로 황정은 소설만의 밀도로, 「기담」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펼쳐진다. 집이 단순한 주거공간이 아닌 부동산으로 기능하고 소비하고 있는 시대에 아파트가 아닌 빌라에 주거하는 사람들의 애환을 담은 이야기는 정영수 작가의 「내일의 연인들」을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4층에 이사 온 노모와 남자는 『계속해보겠습니다』의 순자와 나기가 아닐까 상상해보며 독서의 즐거움을 이어갔다. 지난여름에 읽었던 산문에 이어 이번 단편소설에서도 이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황정은 작가 역시 아직 하지 않은 이야기가 많아 보이고 그만큼 기대감이 커진다.


단편소설뿐만 아니라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넘나드는 많은 작가의 글들은 읽는 즐거움의 생생함과 양질의 글을 읽었다는 만족감을 동시에 선사하는가 하면 나의 글은 왜 이리도 형편없는가에 관한 좌절감을 전해주기도 했다. 새해 첫 독서로 양질의 독서를 한 것은 물론이고 반성과 성찰이 앞서기도 했는데 독서의 만족은 앞으로 출간될 <에픽>에 대한 기대감으로 이어진다. '2020년의 디스토피아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낸 모든 분들이 2021년에는 저마다 순수한 의미에서의 '멋진 신세계'를 만날 수 있길 바'란다는 차경희 편집위원의 따뜻한 메시지처럼 2021년은 문학과 함께 멋진 신세계를 만나는 한 해가 되길 바라본다. 시작이 반인데 멋진 반을 채워뒀다. 


* 다산북스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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