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문
이선영 지음 / 비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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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사자는 여자였다.

실종신고가 됐던 오기현이 가평 청우산에서 변사자로 발견된다.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형사로 있다가 가평으로 전임해 온 백규민 형사가 사건을 맡아 수사를 시작한다. 투신자살로 보이는 현장, 가족들도 오기현이 자살한 것이 맞다고 하지만 백규민 형사는 오기현의 자살을 믿지 않는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모의 이혼으로 헤어진 오기현의 언니 윤의현과 백규민 형사의 교차된 시점으로 외롭게 살아온 오기현이 왜 죽었는지 그 죽음의 진실을 추적하고 밝혀내는 과정이 숨가쁘게 펼쳐진다.

 

 "마음고생을 많이 한 아이였는데…… 결국 이렇게 가다니……. 이제라도 제발 편안해졌으면 좋겠는데……."

 툭툭 내뱉는 의현의 말들, 자살을 확신하는 말투였다. 변사자는 어떤 삶을 살았기에 언니가 동생의 자살을 한 점의 의혹도 없이 받아들이는 걸까. 성이 다른 자매의 사연은 무엇일까. 규민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경찰서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사위는 어두워지고 있었다. 멀리 가평국도가 보였다. 느리게 이어지는 자동차 행렬의 노란 미등들. 단풍놀이를 나온 차량일 것이다. p.33-34

 

 "흔한 말로 물증은 없지만 심증이 간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냄새가 납니다. 이건 형사로서의 직관입니다. 몇 겹을 싸고 또 싸도 포장을 뚫고 풍기는 구린내처럼."

이선영 작가의  『지문』은 꽃새미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오기현의 죽음과 진실에 관한 추리 서사와 오기현이 출강하는 Y여자대학교 내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이 빈틈없이 이어지면서 내내 압도적이다. 쉴 새 없이 책장이 넘어가며 단숨에 읽히는 놀라운 흡입력이 조금도 느슨해지지 않는 그야말로 완벽한 추리 서사를 자랑하지만 이선영 작가가 『지문』을 통해 보여주는 가정폭력, 아동학대, 대학 내 성폭력 사건들을 통해 실제 우리 사회에서 발생한 무수한 사건들이 저절로 연상되면서 마음이 무거워진다. 장르 소설 특유의 긴장감과 스릴의 재미도 크지만 반성 없이 되풀이되는 부조리한 상황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병적인 문제들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게 만드는데 소설의 여운은 이선영 작가의 <작가의 말> 말미를 통해 더 진해지기도 한다.

 

 지금도 음지에서 오기현이나 김예나, 혹은 신명호와 동일하거나 비슷한 폭력에 시달리며 숨죽이고 있을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이 용기가 되길 바란다. 세상과 사회가, 많은 사람들의 인식이 차츰 당신들 편에 서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싶다. p.327 작가의 말 중에서

 

 "그 인간, 사과도 안 하고 잠적해 있는 거 같던데요. 어쨌든 그 바닥에서 매장당하는 거겠지요."

 "조용해지길 기다리는 거겠지요. 피해자 학생들이 다시 한번 용기를 내줘야 할텐데……."

 규민은 의현에게 학과 대표 학생과 통화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직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회생하기 힘들겠네요. 교수직도 박탈당하고, 출판도 막히고, 문단에서도 제명당할 테니까요. 조금 안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남자들의 그런 생각이 문제란건 아세요?"

 "네?"

 "그 사람은 내내 피해자 코스프레를 해왔잖아요. 정작 피해자가 누군데요. 학생들은 그 일 때문에 정신과 치료까지 받았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일을 무마시키고는 자기 자리만 지키려고 했어요."

 "묻힐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 사건들은 대수롭지 않게 늘 묻히고 마니까요."

 "그 사람도 그걸 노렸겠지요. 그래서 세상이 바뀌지 않는 걸지도 몰라요." p.282-283

 

일상 생활을 함께하지 않았는데도 근본적인 성격이 비슷하다는 게 신기했다. 

개인적으로 『지문』은 처음 읽는 비채 출판사 한국문학이라 의미가 남다르기도 했다. 워낙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 유명한 상을 수상한 작품들을 많이 출간하는 출판사라 비채 출판사에서 출간되는 작품들을 많이 읽어봤음에도 지금까지 한국문학은 경험이 없었는데 장르문학으로 처음 한국문학 작품을 접했다는 점이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다. 『지문』의 흡인력 있는 스토리, 꼼꼼하고 촘촘한 구조와 묘사를 통해 이선영 작가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생긴 것은 물론이고 앞으로 비채에서 출간되는 한국문학도 관심 있게 지켜볼 것 같다. 

『지문』의 표지는 손때가 많이 묻힐 재질인데 무수한 지문들이 책장을 넘기고 손때를 묻히며 재미와 반성, 위로의 감정을 느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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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4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송태욱 옮김 / 비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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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하는 작가, 편집자들에게 호평받는 작가 마쓰이에 마사시의 작품을 읽어봐야지 하고 늘 생각만 하고 있었지만 다른 독서 리스트들에 밀려 미루기를 여러 번이었는데 이번 신작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의 출간으로 드디어 나도 마쓰이에 마사시의 작품세계에 입문하게 됐다. 너무 기대치가 높으면 실망이 큰 법이니 굳이 기대치를 낮추고 마음을 가다듬고 독서를 시작했는데 결과부터 말하자면 그건 올해의 제일 쓸데없는 짓이었다. 마쓰이에 마사시의 존재를 일찍이 알고도 왜 이제야 그를 읽기 시작했나 자책하고 또 자책하며 그저 대책 없이 소설에 빠져드는 것 외엔 달리 도리가 없었다. 

 

 진통 시작 후 몇 시간 만에 아유미는 무사히 태어났다.

 남자아이라고만 생각했던 아기가 여자아이라는 사실을 안 요코는 깜짝 놀랐다. 자기편이 되어줄 사람이 이 아이라는 걸 실감하자 눈물이 흘러넘치고 아들인지 딸인지는 전혀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 배와 허리 언저리의 근질근질한 감촉이 가라앉지 않듯 도요코의 마음속에 소용돌이치는 회오리바람이 아직 자리 잡을 곳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p.249

 

훗카이도에 위치한 가상 마을 에타루를 배경으로 백여 년에 걸친 삼대에 걸친 소에지마 가족의 이야기가 조용하고 잔잔하게 흘러간다. 큰 사건 없이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평온하게 이어지지만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의 독서는 여느 독서와 달리 독서를 중단하며 틈틈이 딴짓을 할 틈을 주지 않는다. 한 문장을 붙들고 오래도록 골똘히 시선이 머무르는가 하면 등장인물들의 삶과 그들이 보여주는 가족의 의미를 통해 내 주변을 둘러보게 되면서 긴 여운을 남긴다. 소설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아름다움으로 꽉 차있다. 작가의 말도, 옮긴이의 말도 없이 소설로만 채워진 500여 페이지의 작품은 군더더기가 없다. 각자의 몫의 여운을 음미하는 건 독자들의 몫이다. 이제 막 최신작 한 편을 읽었을 뿐이지만 마쓰이에 마사시의 명성이 수긍이 되며 그의 이전 작품들을 찾아보게 만든다. 무엇보다 삼대에 걸친 소에지마 가족들 중에서 유독 여성 캐릭터들의 매력이 더 컸는데 마쓰이에 마사시 작가의 다른 작품들 속에서는 어떤 캐릭터들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채우고 있을지 궁금하다.

 

 아유미는 지로와 나갔다.

 지캬쿠이와에 오르는 산책로에서 지로는 이따금 비스듬히 뒤에 있는 아유미를 돌아보고 곧 앞으로 몸을 돌려 앞장서 걸어간다. 지로는 아유미가 어디로 가고 싶어하는지 알고 있다. 아유미의 기분도,

 아유미는 지로를 끄는 줄을 손에 쥔 채 이미 울고 있었다.

 정상 가까이에 있는 벤치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유미는 벤치에 앉아 손수건을 눈에 대지 않고 흐르는 눈물을 그대로 두고 있었다. 아유미의 왼쪽에 있는 지로는 흐릿하게 하얗다. 주택과 상점이 늘어선 에다루 거리는 파란색과 초록색과 빨간색의 곰팡이가 핀 식빵이다. 언젠가는 죽어갈 바보들은 그러 북적거릴 뿐 알아채지도 못한다. 

 이렇게 울고 있는 자신을, 나는 언제까지고 기억할 것이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하지메도 모른다. 알지도 못하는 일로 나는 울고 있다.

 지로는 알고 있다. 지로밖에 모른다. 둔감한 인간들은 모른다.

 누구에게도 말할 생각은 없다. 울고 있는 것도 알리고 싶지 않다. 이치이에게도, 이치이가 지금 여기에 있다면 왜 그래, 하고 물을 것이다. 나는 절대 대답하지 않는다. 왜 그래, 가 아니다.

 내가 어른이 되면 지금의 이 기분에 적당한 이름을 붙여 정리할 것이다. 그것은 결코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울고 있는 자신을 멋대로 덮쳐 누르는 것을 여기에 모두 버리기 위해 찾아왔다. 누구도 줍지 못하게 하려고.

 지로가 아유미에게 다가와 앞발을 들고 무릎께에 올렸다. 적갈색 발톱, 근육으로 뒤덮인 굵은 뼈의 무게. 짧고 하얀 털이 빽빽한 지로의 앞발.

 아유미는 지로를 끌어당겨, 지로의 하얀 볼, 하얀 귀밑에 얼굴을 들이댔다. 지로의 냄새를 맡는다.

 멀리 바위 밑에서 디젤차가 출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로. 지로, 말하자마자 눈물이 흐른다. 지로는 아유미의 볼과 입을 핥았다. 눈물도 함께. 언젠가 내가 죽으면 이 기분도 영원히 사라져 없어질 거야. 그러니 지로, 핥아둬. p.426-427

 

작가의 최신작이 드디어 한국에도 출간된 건데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는 고전소설처럼 읽히며 색다른 경험을 전해준다. 정말 고전소설처럼 많은 독자들에게 오래도록 꾸준한 사랑을 받을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 작가의 명성, 탄탄한 독자층을 살펴보면 마쓰이에 마사시의 다른 작품들도 그러할 것 같다. 조용하고 잔잔하게 펼쳐지는 소설이 줄거리를 설명하거나 서평을 통해 소개하기엔 힘이 들지만 무조건 읽어야 할 책으로 마구 추천하기에 좋은 책을 오랜만에 만나 기분이 좋다. 마쓰이에 마사시의 독자라면 당연히 챙겨 읽어야 할 소설이고 개인적으론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읽었을 때의 경험을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를 읽으며 많이 떠올렸었는데 『스토너』를 좋아했던 독자라면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도 당연히 좋아할 것 같다.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알아서 챙겨 읽겠지만 일 년에 소설 한두 권 읽는 독자들이라면 올해의 한두 권에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를 절대 놓치지 말라고 자신 있게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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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 라이브러리
매트 헤이그 지음, 노진선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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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작품을 좋아하다 보니 덤으로 도서관은 그 자체만으로도 특별한 장소가 되어버린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도서관이라는 장소를 특별하게 여기다 보니 도서관에 관한 이야기들도 특별히 애정을 가지고 보는 편인데 그에 관한 최초의 기억은 영화 <마틸다>에서 부모에게 방치되는 소녀 마틸다가 혼자 도서관을 찾아가 사서 선생님의 도움으로 더 큰 세상을 알게 되는 것이었고 최근 김초엽 작가의 「관내분실」을 통해 망자의 영혼을 저장하는 도서관까지, 도서관은 장소로서뿐만 아니라 그에 관한 이야기들도 너무나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그런 나에게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는 제목부터 내 소설이었다. 제목만으로도 그냥 먹고 들어가는데 그냥 도서관도 아닌 죽기 직전에만 들어갈 수 있는 자정의 도서관이라 하니 작품에 대한 기대치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는데 『미드나잇 라이브러리』가 지닌 무수한 베스트셀러 기록과 무려 <어바웃 타임> 제작사의 영화화 확정 등 화려한 타이틀들이 책을 읽기도 전에 수긍부터 하게 만들어줬다. 


 시간이 흘렀고, 노라는 허공을 응시했다.

 와인을 마시고 나니 또렷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는 이번 삶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녀가 둔 모든 수는 실수였고, 모든 결정은 재앙이었으며, 매일 자신이 상상했던 모습에서 한 걸음씩 멀어졌다.

 수영 선수. 뮤지션. 철학가. 배우자. 여행가. 빙하학자. 행복하고 사랑받는 사람.

 그중 어느 것도 되지 못했다.

 심지어 '고양이 주인'이라는 역할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혹은 '일주일에 한 시간짜리 피아노 레슨 선생님'도. 혹은 '대화가 가능한 인간'도.

 약이 효과가 없었다. p.39


오랜 연인과 헤어지고 절친한 친구와의 우정도 예전 같지 않고 직장에선 해고당하고 기르던 고양이는 죽음을 맞이하고... 사는 데 젬병인 주인공 노라에게 삶은 가혹하다. 자살을 시도한 노라는 죽음이 아닌 온갖 다양한 색조의 초록색 책들로 가득한 자정의 도서관에서 과거 학창시절 자주 체스를 두던 학교 도서관이자 현재 노라의 시점에서 자정의 도서관 사서인 사서 엘름 부인의 안내로 다른 선택의 인생들을 살아보게 된다. 헤어진 연인과의 결혼생활, 부모님이 원했던 삶, 절친한 친구와 목표를 함께 하는 삶, 잃어버렸던 꿈을 이루는 삶들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것이 아닌 삶을 방문하고 노라의 삶이 펼쳐지는 무대도 확장된다. 


 죽고 싶지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죽음 앞에 서면 삶은 훨씬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삶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데 어떻게 자정의 도서관으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마냥 무서워할 게 아니라 이 삶에 실망해야 다른 책을 펼쳐볼 수 있다. p.192


자정의 도서관에서 삶과 죽음 사이 '회색 지대'의 이동자가 되어 여러 삶을 경험하는 노라의 상황을 보며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 벽장 속에서 주먹을 쥐면 원하는 과거로 이동해 미래를 바꿀 수 있는 팀이 생각났는데 마침 <어바웃 타임> 제작사에서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의 영화화를 확정했다고 하니 이토록 매력적인 이야기가 과연 스크린에서는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감이 커진다. 독특한 상상력과 스토리텔링 덕분에 빠른 속도감으로 단숨에 읽히지만 사실 소설의 결과보다 그 과정들이 중요하다는 점이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만이 가진 강점이자 차별점이다. 노라가 여러 가지 후회들을 되돌리며 경험하는 삶과 그로 인한 깨달음을 통해 내 삶을 돌아보게 되고 흥미진진한 독서 후에도 나 자신이 강하게 남으며 색다른 경험을 선사해준다. 노라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나의 경험과 그로 인한 과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어느새 나만의 자정의 도서관이 펼쳐져 있는데(나의 경우도 노라와 마찬가지로 도서관이 확실해 보인다) 어쩐지 나의 자정의 도서관은 사방이 검은색, 회색 계열의 책들로 가득할 것 같다.


 하지만 어쩌면 모든 삶이 다 그럴지 모른다. 겉보기에는 아주 흥미진진하거나 가치 있어 보이는 삶조차 결국에는 그런 기분이 들지 모른다. 실망과 단조로움과 마음의 상처와 경쟁만 한가득이고, 아름답고 경이로운 경험은 순간에 끝난다. 어쩌면 그것만이 중요한 의미인지 모른다. 세상이 되어 세상을 지켜보는 것. 부모님이 불행했던 이유는 무언가를 성취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성취하겠다는 기대를 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노라는 이런 것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이 배에서 깨달았다. 자신이 생각보다 부모님을 훨씬 거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순간 노라는 두 사람을 완전히 용서했다. p.199-200


저자 매트 헤이그는 생소한 작가지만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로 눈도장을 확실하게 찍었다. 20대 초반 심한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겪었던 경험을 담은 에세이 『살아야 할 이유』로 큰 성공을 거뒀다는 작가의 독특한 이력을 보며 만약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의 백세희 작가가 소설을 집필한다면 어떤 소재와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펼쳐낼까 하는 엉뚱한 호기심을 가져보기도 했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는 독특한 상상력으로 재미뿐만 아니라 무수한 질문과 의미를 던질 뿐만 아니라 소설 자체가 독자들에게 엘름 부인이 되어 친절한 안내자가 되어주기도 했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에서 밑줄을 긋게 되는 문장들은 소설 속에서 잘 녹아든 것은 물론이고 심리학 서적이나 자기개발서에서 만나는 문장이라 해도 이질감이 없어 보였는데 한 권의 소설을 통해 엄청난 위로와 위안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어쩐지 철도 좀 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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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페션 - 두 개의 고백 하나의 진실
제시 버튼 지음, 이나경 옮김 / 비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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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런던, 엘리스와 콘스턴스 홀든(이하 코니)은 상대에게 속수무책으로 끌리며 강렬한 사랑에 빠진다. 엘리스는 성공한 작가 코니의 곁에서 화려한 삶을 함께 경험하지만 어느새 강렬했던 두 사람의 사이엔 틈이 보이기 시작하고 코니로 인해 누리는 화려한 삶 속에서 공허의 감정이 밀려온다.

2017년 런던, 인생에서 엄마가 없었던 로즈는 아버지에게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단 두 권의 소설만 쓰고 은둔 중인 작가 콘스턴스 홀든과 자신의 어머니가 사귀던 사이였다는 것, 오래전 실종된 어머니의 마지막 목격자라 바로 콘스턴스 홀든이라는 것.

이상한 은둔자 콘스턴스 홀든을 만나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알아보려는 로즈의 계획은 그녀가 로라 브라운이 되어 오랜 침묵을 깨고 세 번째 소설을 집필하려는 콘스턴스 홀든의 어시스턴트가 되면서 조금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제시 버튼의 세 번째 소설 『컨페션』이 드디어 한국에도 출간됐다. 아직 많은 작품을 발표하진 않았음에도 '제시 버튼'이라는 하나의 장르를 구축해낸 작가의 신간 소식이 반갑고 기대가 컸던 데에는 제시 버튼만이 다룰 수 있는 소재와 매력적인 캐릭터들, 독보적인 필력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크기도 했지만 "이 책은 여성들에게 바치는 나의 러브레터입니다."라는 띠지 문구가 소설을 본격적으로 읽기도 전에 마음을 크게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매력적인 소설을 잘 쓰는 작가가 독자들을 사로잡는 말도 너무 잘 한다. 시작부터 이건 반칙인데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소설에 빠지는 것 외에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책 한 권이 마음에 들어와 인생을 바꿔주기를 얼마나 원했던가? 코니의 글을 읽는 동안 이 사람이 어머니와 그렇게 가까운 사이였으며, 어머니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내게는 무시무시한 기쁨이었다. 이 관계를 알지만 소설을 읽는 것 이외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나는 소설을 원하지 않았다. 누군가 진실을 말해주기를 원했다. p.66


엘리스의 시점으로 펼쳐지는 1980년과 로즈의 시점으로 펼쳐지는 2017년의 이야기가 교차되면서 펼쳐지는 스토리의 짜임이 견고하다. 로즈의 성장과정에서 부재했던 그녀의 어머니 엘리스의 행방에 대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숨기며 코니에게 접근하는 현재 로즈 시점의 이야기와 과연 과거에 엘리스와 코니에게 무슨 일이 생겼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에 500여 페이지의 소설은 장르물을 읽듯이 단숨에 읽어가게 만드는데 제시 버튼은 거기서 끝내지 않는다. 엘리스와 코니, 코니와 로즈 세 여자의 얽힌 이야기 속에 녹여낸 주제의식들은 독자들을 향해 무수한 질문들은 던진다. 소설 속 코니의 첫 작품<밀랍 심장>에 대한 '강렬하고, 냉혹하고, 열정적이며, 밑줄 긋고 싶은 문장으로 가득한 책'이라는 묘사와 오랜 공백을 깨고 발표하는 세 번째 소설 <변심>에 대한 '이 작품에는 매끈하고 권위적인 힘이 있었고, 인물들은 죄책감과 신비감을 발산했다.'라는 묘사는 『컨페션』에서도 유효하다. 높을 수밖에 없었던 기대치를 제시 버튼은 강렬하고, 냉혹하고, 열정적이며, 밑줄 긋고 싶은 문장들로 채워주고 죄책감과 신미감을 발산하는 인물들을 통해 매끈하고 권위적인 힘을 보여준다.


 바닥이 꺼진다고 느끼지 않는 여자, 원치 않는 임신을 겪든 겪지 않든 극복할 수 있는 상황으로 보는 여자는 물론 언제나 있다. 그들은 임신한 여성이 되는 것과 엄마가 되는 것 사이의 엄청난 차이를 알고 있다. 그들은 원치 않는 생물학의 노예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원치 않는 방향으로 마음을 돌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연인이든 아이든 남의 인생이든, 누구나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아쉬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여러모로 내 삶은 내게 유령 같았다. 타인을 위해 사는 삶을 만들려면 우선 내 삶을 더 견고하게 해야 했다. p.492


로즈는 엘리스에 대해 왜 작은 뿌리도 내리지 못할 만큼 한곳에서 오래 지내지 못했을까 안타까워한다. 『컨페션』을 읽는 내내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의 작가의 말이 떠올랐는데 '나의 계보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그것이 김동인이나 이상에게 있지 않고 김명순이나 나혜석에게 있음을 깨닫는 몇 년이었다.'라는 정세랑 작가의 고백은 소설을 다 읽고 난 후에도 오랜 울림을 전했었다. 『컨페션』을 읽으며 『컨페션』이 발표되기까지의, 이후 펼쳐질 계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미니어처리스트』, 『뮤즈』에 이어 『컨페션』까지 독자들을 제대로 사로잡은 제시 버튼의 작품들, 작년 버나딘 에바리스토의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에서 올해 제시 버튼의 『컨페션』으로 이어지는 비채 출판사에서 출간된 페미니즘 소설들, 여성들의 연대와 진정한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무수한 작품들이 펼쳐지고 그 계보를 이어갈 작품들에 대한 기대가 더불어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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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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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존엄이 있잖아. 그걸 빼앗겨서는 안 돼.

기차를 배경으로 한 표지 이미지와 '여행자'라는 제목에서 여유와 낭만 등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는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연상되지만 대규모 유대인 박해 사건인 '수정의 밤' 소식을 듣고 유대인 작가가 사 주 만에 쓴 소설이라는 비하인드스토리를 듣고 나니 상상하는 소설의 밀도는 180도 달라진다. 집필 후 80년이 지나 모국어인 독어로 출판됐다는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를 번역가의 작품 소개로 소설보다 앞서 읽어가며 본격적으로 소설을 읽기 전 나름의 각오가 필요했다.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 소설, 미술 등의 작품들을 단순히 예술 작품으로만 소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수없이 학습해왔지만 감정의 파고가 큰 작품이라는 것이 쉽게 짐작 가능해 보인다.


'수정의 밤'이 벌어지고 유대인이란 이유만으로 습격을 당한 주인공 오토 질버만은 하루아침에 잘 나가던 사업가에서 도망자로 전락한다. 아내와도 연락이 두절되고 불확실한 상황이 계속되면서 주위 사람들의 사소한 태도가 마음이 걸리고 불안해진다. 믿었던 사업 파트너에게 배신당하고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모호한 상황 속에서 질버만의 불안이 계속되고 기차를 타고 독일 전역을 배회하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상황들을 직면한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이 그다지 심각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저 심리전일 수도 있어. 아니, 이제 정말 내 처지를 확실하게 알아야 해. 상황이 점점 더 안 좋아질 거야! 베커가 한 짓을 토로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테지. 그 불량배 놈. 하지만 흥분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 독일에서 나가야 한다! 그런데 갈 데가 없어! 돈을 검사하니 이곳에 두고 가야 한다. 정말 미칠 지경이군! 뭔가 행동에 옮기면 유죄고, 행동하지 않으면 호된 벌을 받는다. 학교생활과 똑같아. 수학 문제를 직접 풀면 'D'이고 남의 것을 베끼면 'B'였지만, 베끼다가 들키거나 아주 솔직하게 풀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F'였지. 결과적으로는 똑같았어. p.121-122


뭔가 행동에 옮기면 유죄고, 행동하지 않으면 호된 벌을 받는다.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는 『여행자』를 통해 그동안 수없이 봐왔던 세계대전 속 유대인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의 주인공 오토 질버만을 앞세워 혼란으로 얼룩진 인간과 사회의 민낯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때때로 인물과 상황들이 커리커쳐처럼 묘사해 비판하거나 풍자하기도 하는데 이런 방식들 또한 새롭다. 그러면서도 힘 있는 문장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아픈 이야기를 하고 묵직한 메시지를 던지지만 몰입도가 높아 단숨에 읽힌다. 마치 그 시대에 잘 적응했던 비유대인들처럼 독자들은 소설에 금방 몰입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가 『여행자』를 집필한 비하인드스토리가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그리게 된 비하인드스토리와 겹쳐 보이며 의미 있게 다가왔다. 전쟁이 남긴 비통함은 두 작가로 하여금 역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남기게 했지만 이를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슬픔이 몰아치는 봄이다.



* 비채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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