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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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존엄이 있잖아. 그걸 빼앗겨서는 안 돼.

기차를 배경으로 한 표지 이미지와 '여행자'라는 제목에서 여유와 낭만 등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는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연상되지만 대규모 유대인 박해 사건인 '수정의 밤' 소식을 듣고 유대인 작가가 사 주 만에 쓴 소설이라는 비하인드스토리를 듣고 나니 상상하는 소설의 밀도는 180도 달라진다. 집필 후 80년이 지나 모국어인 독어로 출판됐다는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를 번역가의 작품 소개로 소설보다 앞서 읽어가며 본격적으로 소설을 읽기 전 나름의 각오가 필요했다.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 소설, 미술 등의 작품들을 단순히 예술 작품으로만 소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수없이 학습해왔지만 감정의 파고가 큰 작품이라는 것이 쉽게 짐작 가능해 보인다.


'수정의 밤'이 벌어지고 유대인이란 이유만으로 습격을 당한 주인공 오토 질버만은 하루아침에 잘 나가던 사업가에서 도망자로 전락한다. 아내와도 연락이 두절되고 불확실한 상황이 계속되면서 주위 사람들의 사소한 태도가 마음이 걸리고 불안해진다. 믿었던 사업 파트너에게 배신당하고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모호한 상황 속에서 질버만의 불안이 계속되고 기차를 타고 독일 전역을 배회하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상황들을 직면한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이 그다지 심각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저 심리전일 수도 있어. 아니, 이제 정말 내 처지를 확실하게 알아야 해. 상황이 점점 더 안 좋아질 거야! 베커가 한 짓을 토로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테지. 그 불량배 놈. 하지만 흥분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 독일에서 나가야 한다! 그런데 갈 데가 없어! 돈을 검사하니 이곳에 두고 가야 한다. 정말 미칠 지경이군! 뭔가 행동에 옮기면 유죄고, 행동하지 않으면 호된 벌을 받는다. 학교생활과 똑같아. 수학 문제를 직접 풀면 'D'이고 남의 것을 베끼면 'B'였지만, 베끼다가 들키거나 아주 솔직하게 풀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F'였지. 결과적으로는 똑같았어. p.121-122


뭔가 행동에 옮기면 유죄고, 행동하지 않으면 호된 벌을 받는다.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는 『여행자』를 통해 그동안 수없이 봐왔던 세계대전 속 유대인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의 주인공 오토 질버만을 앞세워 혼란으로 얼룩진 인간과 사회의 민낯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때때로 인물과 상황들이 커리커쳐처럼 묘사해 비판하거나 풍자하기도 하는데 이런 방식들 또한 새롭다. 그러면서도 힘 있는 문장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아픈 이야기를 하고 묵직한 메시지를 던지지만 몰입도가 높아 단숨에 읽힌다. 마치 그 시대에 잘 적응했던 비유대인들처럼 독자들은 소설에 금방 몰입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가 『여행자』를 집필한 비하인드스토리가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그리게 된 비하인드스토리와 겹쳐 보이며 의미 있게 다가왔다. 전쟁이 남긴 비통함은 두 작가로 하여금 역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남기게 했지만 이를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슬픔이 몰아치는 봄이다.



* 비채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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