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4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송태욱 옮김 / 비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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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하는 작가, 편집자들에게 호평받는 작가 마쓰이에 마사시의 작품을 읽어봐야지 하고 늘 생각만 하고 있었지만 다른 독서 리스트들에 밀려 미루기를 여러 번이었는데 이번 신작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의 출간으로 드디어 나도 마쓰이에 마사시의 작품세계에 입문하게 됐다. 너무 기대치가 높으면 실망이 큰 법이니 굳이 기대치를 낮추고 마음을 가다듬고 독서를 시작했는데 결과부터 말하자면 그건 올해의 제일 쓸데없는 짓이었다. 마쓰이에 마사시의 존재를 일찍이 알고도 왜 이제야 그를 읽기 시작했나 자책하고 또 자책하며 그저 대책 없이 소설에 빠져드는 것 외엔 달리 도리가 없었다. 

 

 진통 시작 후 몇 시간 만에 아유미는 무사히 태어났다.

 남자아이라고만 생각했던 아기가 여자아이라는 사실을 안 요코는 깜짝 놀랐다. 자기편이 되어줄 사람이 이 아이라는 걸 실감하자 눈물이 흘러넘치고 아들인지 딸인지는 전혀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 배와 허리 언저리의 근질근질한 감촉이 가라앉지 않듯 도요코의 마음속에 소용돌이치는 회오리바람이 아직 자리 잡을 곳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p.249

 

훗카이도에 위치한 가상 마을 에타루를 배경으로 백여 년에 걸친 삼대에 걸친 소에지마 가족의 이야기가 조용하고 잔잔하게 흘러간다. 큰 사건 없이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평온하게 이어지지만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의 독서는 여느 독서와 달리 독서를 중단하며 틈틈이 딴짓을 할 틈을 주지 않는다. 한 문장을 붙들고 오래도록 골똘히 시선이 머무르는가 하면 등장인물들의 삶과 그들이 보여주는 가족의 의미를 통해 내 주변을 둘러보게 되면서 긴 여운을 남긴다. 소설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아름다움으로 꽉 차있다. 작가의 말도, 옮긴이의 말도 없이 소설로만 채워진 500여 페이지의 작품은 군더더기가 없다. 각자의 몫의 여운을 음미하는 건 독자들의 몫이다. 이제 막 최신작 한 편을 읽었을 뿐이지만 마쓰이에 마사시의 명성이 수긍이 되며 그의 이전 작품들을 찾아보게 만든다. 무엇보다 삼대에 걸친 소에지마 가족들 중에서 유독 여성 캐릭터들의 매력이 더 컸는데 마쓰이에 마사시 작가의 다른 작품들 속에서는 어떤 캐릭터들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채우고 있을지 궁금하다.

 

 아유미는 지로와 나갔다.

 지캬쿠이와에 오르는 산책로에서 지로는 이따금 비스듬히 뒤에 있는 아유미를 돌아보고 곧 앞으로 몸을 돌려 앞장서 걸어간다. 지로는 아유미가 어디로 가고 싶어하는지 알고 있다. 아유미의 기분도,

 아유미는 지로를 끄는 줄을 손에 쥔 채 이미 울고 있었다.

 정상 가까이에 있는 벤치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유미는 벤치에 앉아 손수건을 눈에 대지 않고 흐르는 눈물을 그대로 두고 있었다. 아유미의 왼쪽에 있는 지로는 흐릿하게 하얗다. 주택과 상점이 늘어선 에다루 거리는 파란색과 초록색과 빨간색의 곰팡이가 핀 식빵이다. 언젠가는 죽어갈 바보들은 그러 북적거릴 뿐 알아채지도 못한다. 

 이렇게 울고 있는 자신을, 나는 언제까지고 기억할 것이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하지메도 모른다. 알지도 못하는 일로 나는 울고 있다.

 지로는 알고 있다. 지로밖에 모른다. 둔감한 인간들은 모른다.

 누구에게도 말할 생각은 없다. 울고 있는 것도 알리고 싶지 않다. 이치이에게도, 이치이가 지금 여기에 있다면 왜 그래, 하고 물을 것이다. 나는 절대 대답하지 않는다. 왜 그래, 가 아니다.

 내가 어른이 되면 지금의 이 기분에 적당한 이름을 붙여 정리할 것이다. 그것은 결코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울고 있는 자신을 멋대로 덮쳐 누르는 것을 여기에 모두 버리기 위해 찾아왔다. 누구도 줍지 못하게 하려고.

 지로가 아유미에게 다가와 앞발을 들고 무릎께에 올렸다. 적갈색 발톱, 근육으로 뒤덮인 굵은 뼈의 무게. 짧고 하얀 털이 빽빽한 지로의 앞발.

 아유미는 지로를 끌어당겨, 지로의 하얀 볼, 하얀 귀밑에 얼굴을 들이댔다. 지로의 냄새를 맡는다.

 멀리 바위 밑에서 디젤차가 출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로. 지로, 말하자마자 눈물이 흐른다. 지로는 아유미의 볼과 입을 핥았다. 눈물도 함께. 언젠가 내가 죽으면 이 기분도 영원히 사라져 없어질 거야. 그러니 지로, 핥아둬. p.426-427

 

작가의 최신작이 드디어 한국에도 출간된 건데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는 고전소설처럼 읽히며 색다른 경험을 전해준다. 정말 고전소설처럼 많은 독자들에게 오래도록 꾸준한 사랑을 받을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 작가의 명성, 탄탄한 독자층을 살펴보면 마쓰이에 마사시의 다른 작품들도 그러할 것 같다. 조용하고 잔잔하게 펼쳐지는 소설이 줄거리를 설명하거나 서평을 통해 소개하기엔 힘이 들지만 무조건 읽어야 할 책으로 마구 추천하기에 좋은 책을 오랜만에 만나 기분이 좋다. 마쓰이에 마사시의 독자라면 당연히 챙겨 읽어야 할 소설이고 개인적으론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읽었을 때의 경험을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를 읽으며 많이 떠올렸었는데 『스토너』를 좋아했던 독자라면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도 당연히 좋아할 것 같다.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알아서 챙겨 읽겠지만 일 년에 소설 한두 권 읽는 독자들이라면 올해의 한두 권에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를 절대 놓치지 말라고 자신 있게 권하고 싶다. 



* 비채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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