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문
이선영 지음 / 비채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변사자는 여자였다.

실종신고가 됐던 오기현이 가평 청우산에서 변사자로 발견된다.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형사로 있다가 가평으로 전임해 온 백규민 형사가 사건을 맡아 수사를 시작한다. 투신자살로 보이는 현장, 가족들도 오기현이 자살한 것이 맞다고 하지만 백규민 형사는 오기현의 자살을 믿지 않는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모의 이혼으로 헤어진 오기현의 언니 윤의현과 백규민 형사의 교차된 시점으로 외롭게 살아온 오기현이 왜 죽었는지 그 죽음의 진실을 추적하고 밝혀내는 과정이 숨가쁘게 펼쳐진다.

 

 "마음고생을 많이 한 아이였는데…… 결국 이렇게 가다니……. 이제라도 제발 편안해졌으면 좋겠는데……."

 툭툭 내뱉는 의현의 말들, 자살을 확신하는 말투였다. 변사자는 어떤 삶을 살았기에 언니가 동생의 자살을 한 점의 의혹도 없이 받아들이는 걸까. 성이 다른 자매의 사연은 무엇일까. 규민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경찰서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사위는 어두워지고 있었다. 멀리 가평국도가 보였다. 느리게 이어지는 자동차 행렬의 노란 미등들. 단풍놀이를 나온 차량일 것이다. p.33-34

 

 "흔한 말로 물증은 없지만 심증이 간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냄새가 납니다. 이건 형사로서의 직관입니다. 몇 겹을 싸고 또 싸도 포장을 뚫고 풍기는 구린내처럼."

이선영 작가의  『지문』은 꽃새미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오기현의 죽음과 진실에 관한 추리 서사와 오기현이 출강하는 Y여자대학교 내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이 빈틈없이 이어지면서 내내 압도적이다. 쉴 새 없이 책장이 넘어가며 단숨에 읽히는 놀라운 흡입력이 조금도 느슨해지지 않는 그야말로 완벽한 추리 서사를 자랑하지만 이선영 작가가 『지문』을 통해 보여주는 가정폭력, 아동학대, 대학 내 성폭력 사건들을 통해 실제 우리 사회에서 발생한 무수한 사건들이 저절로 연상되면서 마음이 무거워진다. 장르 소설 특유의 긴장감과 스릴의 재미도 크지만 반성 없이 되풀이되는 부조리한 상황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병적인 문제들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게 만드는데 소설의 여운은 이선영 작가의 <작가의 말> 말미를 통해 더 진해지기도 한다.

 

 지금도 음지에서 오기현이나 김예나, 혹은 신명호와 동일하거나 비슷한 폭력에 시달리며 숨죽이고 있을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이 용기가 되길 바란다. 세상과 사회가, 많은 사람들의 인식이 차츰 당신들 편에 서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싶다. p.327 작가의 말 중에서

 

 "그 인간, 사과도 안 하고 잠적해 있는 거 같던데요. 어쨌든 그 바닥에서 매장당하는 거겠지요."

 "조용해지길 기다리는 거겠지요. 피해자 학생들이 다시 한번 용기를 내줘야 할텐데……."

 규민은 의현에게 학과 대표 학생과 통화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직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회생하기 힘들겠네요. 교수직도 박탈당하고, 출판도 막히고, 문단에서도 제명당할 테니까요. 조금 안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남자들의 그런 생각이 문제란건 아세요?"

 "네?"

 "그 사람은 내내 피해자 코스프레를 해왔잖아요. 정작 피해자가 누군데요. 학생들은 그 일 때문에 정신과 치료까지 받았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일을 무마시키고는 자기 자리만 지키려고 했어요."

 "묻힐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 사건들은 대수롭지 않게 늘 묻히고 마니까요."

 "그 사람도 그걸 노렸겠지요. 그래서 세상이 바뀌지 않는 걸지도 몰라요." p.282-283

 

일상 생활을 함께하지 않았는데도 근본적인 성격이 비슷하다는 게 신기했다. 

개인적으로 『지문』은 처음 읽는 비채 출판사 한국문학이라 의미가 남다르기도 했다. 워낙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 유명한 상을 수상한 작품들을 많이 출간하는 출판사라 비채 출판사에서 출간되는 작품들을 많이 읽어봤음에도 지금까지 한국문학은 경험이 없었는데 장르문학으로 처음 한국문학 작품을 접했다는 점이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다. 『지문』의 흡인력 있는 스토리, 꼼꼼하고 촘촘한 구조와 묘사를 통해 이선영 작가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생긴 것은 물론이고 앞으로 비채에서 출간되는 한국문학도 관심 있게 지켜볼 것 같다. 

『지문』의 표지는 손때가 많이 묻힐 재질인데 무수한 지문들이 책장을 넘기고 손때를 묻히며 재미와 반성, 위로의 감정을 느꼈으면 좋겠다. 

 

 

* 비채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