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매탐정 조즈카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5
아이자와 사코 지음, 김수지 옮김 / 비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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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명, 상상조차 못 했으리라.

 가까이에 살인마가 있고.

 내일, 자신이 살해당할 것이라고.

 아무도 그런 상상은 하지 않는다. p.294


나 자신에 대해 평소 사람 보는 눈은 없어도 좋은 문학작품 알아보는 눈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었는데 아이자와 사코의 『영매탐정 조즈카』 덕분에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를 가지게 됐다. 아니, 이번 기회를 통해 알게 되었다. 나는 사람 보는 눈도 없고 좋은 문학작품 알아보는 눈도 없는 독자라는 슬픈 사실을... 

오프라인 서점에서 보게 되었더라면 손길도 안 줬을 책이다. 표지부터 제목까지 내 취향과는 먼 책이라고 당연하게 여긴 것은 물론이고 장르조차 제대로 헛짚으면서 작품에 대한 기대치라곤 거의 없는 상태였는데 내가 틀렸음을  인정하기까지의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제서야 띠지의 무수한 기록과 찬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이 작품을 놓치고 넘어갔으면 어쩔뻔했나 싶을 정도였다(그러니까 여러분, 편견이 이렇게나 무서운 것입니다).


 "자주 가는 찻집에 가서 생각해볼 겁니다."

 "저는 어떻게 할까요?"

 "히스이에게 묻고 싶은 게 생길 수도 있어요. 저는 한동안 말이 없어지겠지만, 그래도 괜찮다면 같이 있어주는 게 도움이 될 거예요."

 "네!"

 히스이가 반짝이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게쓰가 시동을 걸었다. 

 "선생님."

 몸을 비틀어 후방을 확인하며 차를 출발시켰다.

 "감사합니다."

 옆에 앉은 히스이의 말만이 귓가에 닿았다.

 "제 힘과 선생님의 힘, 둘을 합쳐서 진실을 밝혀주세요. 선생님이라면 할 수 있어요."

 심령과 논리를 조합해 진실을 제시한다.

 자신은 히스이의 매개자가 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시간이 별로 없다. p.181-182


추리소설가 고게쓰와 미스터리한 젊은 영매 조즈카가 영매의 힘을 이용해서 온갖 살인사건을 파헤쳐 나가는 『영매탐정 조즈카』는 이야기의 흡입력이 그야말로 엄청난 소설이다. 조즈카의 특별한 능력 '영시'로 사고, 살해 현장에서 범인이 누구인지 특정하고 영시로 알게 된 정보를 분석해 과학 수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논리를 이끌어내는 고게쓰의 활약은 마치 셜록과 왓슨 콤비 못지않은 명탐정 콤비로 고게쓰의 후배 유이카 살인사건, 수경장이라는 별장에서 일어난 동료 추리소설가 구로고시 살인사건, 여고생 연쇄 교살 사건을 시원하게 해결하며 독자들의 심장을 쫄깃하게 한다. 소설의 스포일러를 피해 가며 줄거리를 요약하는 일이 쉽지 않은 스토리라 긴 소개는 힘들지만 이 소설이 엄청나다는 감상은 낭비 없이 고백하고 또 고백할 수 있다. 


 "녀석은 교활하고 경찰의 수사 기법도 잘 알아. 우리 쪽 수사 기법을 하나하나 찌부러뜨리듯 신중해. 이런 범죄자가 존재하다니, 믿을 수가 없다니까. 비정상이야. 수법이 비정상일 뿐만이 아니야. 이렇게나 범행을 반복하면서 아무런 단서도 없다는 게 말도 안 되는 게 비정상이야." p.327


최고의 미스터리 소설답게 『영매탐정 조즈카』는 엄청난 반전을 선사하며 쉼 없이 페이지를 앞으로 돌리게 만드는 소설이다. 페이지뿐만 아니라 표지까지 다시 들춰보게 만드는 엄청난 소설이다. 흡인력 넘치는 스토리, 매력적인 캐릭터, 허를 찌르는 반전과 여운은 숨 가쁘게 펼쳐지는 넷플릭스 시리즈를 보는 재미를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그러니까 원작 소설로 넷플릭스 시리즈가 만들어져도 좋겠다는 이야기). 그런가 하면 좀처럼 완결이 나지 않기로 유명한 일본 만화처럼 『영매탐정 조즈카』도 끝없이 이야기가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이어지기도 하는데 이토록 매력적인 캐릭터와 엄청난 흡인력의 스토리를 한 권의 소설로 만족하기엔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개인적으로 조즈카 히스이는 근래 일본 소설, 영화에서 만난 캐릭터 중 가장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캐릭터였는데(그래서 작가의 조즈카 히스이에 대한 몇몇 묘사에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영매탐정 조즈카』로만 남지 않고 함께 늙어가는(?) 그런 캐릭터가 되어주면 좋을 것 같다.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라는 어른들의 명언은 『영매탐정 조즈카』에도 유효하다. 누군가는 표지만 보고 선택할 수도 있지만(무조건 성공!) 나처럼 표지에 주저하거나 두꺼운 책의 두께에 쉽게 포기하는 독자들이 있다면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며 말리고 싶은 심정이다. 나에게 2021년 초여름은 일본 미스터리 문학에서 엄청난 캐릭터를 만나게 된 계절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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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나와 아레스 - 제17회 '마해송 문학상' 수상작 문지아이들 166
신현 지음, 조원희 그림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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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사람의 교감, 우정의 감동적인 이야기라면 몇몇 영화들 덕분에 낯설지 않지만 두 마리의 말과 어린이, 청소년 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한 기대는 또 달랐다. 거기에 올해 초 뇌전증을 앓는 소년 스벤과 부모님의 총격 사건으로 상처 입은 소녀 파커, 그들의 연결고리가 되어주는 스벤의 도우미견 알래스카의 이야기 『안녕, 알래스카』를 읽으며 어린이, 청소년 소설에 대한 편견이 없어지고 독서 목록에도 기존에 없었던 청소년 소설의 비중이 크게 늘었는데 『안녕, 알래스카』를 출간한 문학과지성사에서 이번엔 소녀와 경주마에 관한 이야기를 출간했다고 하니 기대감이 더 커졌다. 


 "전설의 기수! 나도 저거 할 거야!"

 "아무나 전설의 기수가 되냐? 꿈 깨라."

 루나가 퉁바리 놓자 새나가 헤드록을 걸었다.

 "아무나가 아니라, 내가 한다고! 내가!" p.11

 

말 목장에서 기수인 부모님 아래 자란 쌍둥이 자매 새나와 루나. 당연하게 기수를 꿈꾸는 새나와 절대 기수는 되지 않을 거라는 루나에게 성장환경이 끼친 영향은 달랐다. 아빠가 200승을 달성한 날 엄마는 경기도중 사고를 당해 큰 수술을 받게 되고 엄마의 빈자리에 찾아와준 망아지 아테나와 아레스는 새나의 일상의 전부라 해도 과장이 아니다. 경주마로 자라기 위해 어린 나이에 어미 품에서 떨어져 경주마 훈련을 받아야 하는 말들, 새나에겐 아테나와 아레스 둘 다 소중한 말이고 뛰어난 경주마로 잘 자라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왜 훌륭한 백마 혈통의 아테나는 경마 시장에서 비싸게 팔리고 평범한 혈통의 흔한 갈색 말 아레스는 도축장에 팔려야 하는지 새나의 시선에선 이해하지 못할 일들의 연속이다. 




 "새나야, 경주마가 되어서 우승하면, 모건 자마는 행복할까?" p.144

 

기수가 꿈인 초등학교 5, 6학년 새나의 시선으로 펼쳐지는 『아테나와 아레스』는 흔히 성장소설을 통해 기대하게 되는 위로와 희망의 분위기가 좀처럼 나타나지 않지만(오히려 내가 올해 읽은 소설 중 제일 어둡다) 그 속에서 인간의 욕심과 경쟁 사회, 차별, 동물복지 등 많은 주제와 많은 질문을 던진다. 같은 날 태어났지만 다른 캐릭터, 다른 운명을 타고난 새나와 루나, 아테나와 아레스를 통해 1등만 중요한 경쟁 사회와 혈통을 중시하는 불공평한 평가 등 우리 사회에 만연한 다양한 문제점들을 짚어내는데 인간의 이기심으로 경쟁에 내몰려 학대당하는 경주마를 보며 공부와 업무 등 끝없는 경쟁에서 오로지 성과만을 중요시하는 현상에 대해서 전 세계 그 어느 독자들보다 한국 독자들이 크게 공감할 수 있는 건 한국 독자들만의 특권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아프게 반성하게 되는 건 성인 독자들만이 받게 되는 형벌처럼 느껴진다. 아동, 청소년 소설로 독자층을 나누는 것이 의미 없는 소설이기도 하지만 청소년과 학부모들이 함께 읽어야 할 소설이기도 하다.


 또 말들이 달린다. 온 힘을 다해 땅을 뒤흔들며 달린다. 새나는 경주로를 달리는 말들을 보았다. 검은 말, 흰말, 붉은 말 들이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그냥 신이 나서 달리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분명히 보였다. 방목지에서 뛰놀던 말들과 달리 경주마들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내몰려 달리고 있다. 대부분 눈가리개와 귀마개가 달린 마가면을 쓰고 있어서 볼 수는 없지만, 새나는 놀라고 긴장하고 두려움에 한 말들의 눈빛을 떠올릴 수 있었다. p.170-171


2021년 상반기 독서의 가장 두드러진 점은 본격적으로 아동, 청소년 문학을 꾸준히 접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는데 실패 없이 모든 작품들이 다 좋아 만족감도 남달랐다. 특히 올해 상반기엔 소설 속 동물들의 활약이 돋보였는데(『긴긴밤』, 『안녕, 알래스카』, 『아테나와 아레스』 등등) 각자의 메시지를 전하는 동물들이 전한 높은 밀도의 감동의 여운은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자신의 이야기가 오늘을 사는 아이들에게 쉼표가 되고 위로가 되길 소망한다는 작가의 말이 모든 독자들에게 가닿길 온 마음으로 응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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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 8
조지 손더스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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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짜께,

 우선 이 말부터 할께요. 내가 글짜를 틀리개 쓰더라도 이해하새요. 난 여우라서 그래요! 그러니 쓰기도 글짜도 완벽카진 않쵸. 하지만 내가 쓰기와 글짜를 이망큼이라도 배우개 댄 사연을 알려줄께요! p.5


맨부커상 수상 작가의 작품 답지 않아 보이는(?) 작은 판형과 디자인, 완벽하게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지는 못하는 여우의 시점으로 맞춤법이 엉망으로 진행되는 이야기. 조지 손더스의 『여우 8』은 작품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들이 무척이나 많은 소설이다. 전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맨부커상 수상 작가라면, 그 작가의 작품이라면 기대하게 되는 요소들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그럼에도 작품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를 품게 한 건 여우를 주인공으로 한 슬프고 사랑스러운 우화라는 소개가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올해 초 루리 작가의 『긴긴밤』을 읽으며 노든과 윔보, 치쿠, 버려진 알에서 태어난 펭귄이 보여준 아름다운 사랑과 연대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인데 문학동네에서 이번엔 인간의 말을 배운 여우에 관한 이야기에 관한 책을 출간했다고 하니 작품을 읽기도 전에 작품에 대한 신뢰는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가장 조앗던 몃 가지.

 어떤 잉간들이 내가 자이내 말을 갱장히 잘하는 걸 듯고 내게 닥고기를 좀 줘요. 나는 그들과 식탁에 함깨 안쬬. 그러면 그들이 말해요. 여우로 사는 건 어때?

 나는 말하죠. 좃치.

 그들이 말해요. 여우는 우리가 가장 조아하는 동물이야.

 난 말하죠. 고마워. 

 그들이 말해요. 세상에. 왜 우린 멍청하게 가장 마니 키우는 반려동물로 개를 골랏을까?

 난 말하죠. 나도 도무지 모르겟어. p.21-22


사람들을 홀리는 동물로 유명한 여우지만 『여우 8』의 여우 8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여우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다. 인간이 사는 집 창가 너머에서 들려오는 낱말을 통해 인간의 말을 배우고 창의적인 공상가의 기질이 있는 여우 8은 여우 무리 속에서도 엉뚱한 존재로 통한다. 대형 쇼핑몰 건설로 인간에게 숲을 빼앗기고 그것으로 모자라 같은 무리들의 여우들도 잃어버린 여우 8이 인간들에게 쓴 편지는 엉뚱함으로 시작해서 너무 슬프게 끝난다.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방식인 50여 페이지의 짧은 소설을 통해 조지 손더스는 환경 파괴와 자연, 생명에 대한 강렬한 경고를 날리는데 여우 8의 편지를 끝까지 읽고 답장을 써야 하는 숙제를 넘겨받은 잉간(오타아님)은 무거워진 마음에 쉽게 손이 가지 못하고 있다. 단숨에 읽어갔지만 감정의 파고가 커서 감정을 주체하는 일이 쉽지가 않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작품이다.


 당신들의 얘기가 행복카게 끈나기를 원한다면, 좀 차캐지려고 노력카새요. p.54


조지 손더스가 그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써내려간 우화는 그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독자를 제대로 홀렸다. 그리고 짧은 소설을 읽어가는 동안 여우 8은 독자들을 제대로 길들인다. 최고의 소설이었고 최고의 소설이었다. 많은 인간들이 여우 8을 만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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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책
류이스 프라츠 지음, 조일아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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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도서관이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도서관을 배경으로 한 영화나 소설에 내가 얼마나 깊게 빠져드는지를 한 달 전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서평에 실컷 고백해놓고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인데 이런 나에게 불을 지피는 소설이 또 등장했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미스터리한 파란 책 속으로 들어가 모험을 펼친다는 줄거리만 들어도 내 취향의 소설을 만난 기쁨에 기대감이 커지는데 평소 접하기 힘든 스페인 작가의 소설이라 하니 작품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커진다. 그러니까 류이스 프라츠의 『파란 책』은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도 전에 내 취향의 책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면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어, 저멀리 여행을 할 수도 있고, 현실에서는 절대로 가능하지 않은 멋진 모험도 할 수 있지. 게다가 너 스스로 그 모험의 주인공이 될 수 있고 말이야." p.24


네 과목을 낙제하고 숙제를 위해 처음으로 방문한 도서관에서 수세기 동안 도서관에 숨겨져 있은듯한 미스터리한 파란 책을 발견한 주인공 레오가 파란 책을 읽는 동안 기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파란 책의 주인공 폴츠의 이야기를 몰입해 읽으며 사서 선생님 옥스포드와 친구들 리타, 아브람과 책 속 등장인물이 되어 폴츠와 함께 알렉산더 대왕의 보물을 손에 넣기 위한 모험이 시작되는데 이 소설, 흡인력이 엄청나다. 파란 책 속 폴츠의 이야기가 파란색으로, 레오의 이야기가 검은색으로 펼쳐지는 액자식 구조도 흥미롭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호기심으로 단숨에 읽히는 것도 흥미진진하다. 제목처럼 파란 책의 표지 중앙에 열쇠가 꼽혀 있는 열쇠 구멍이 있는 표지 이미지는 많은 상상력을 이끌어내는데 열쇠를 열면 펼쳐질 환상 세계에 대한 기대를 『파란 책』은 완벽하게 부응한다. 


역시 도서관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들은 나를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이번에도 통했다. 소설을 읽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법한 소설 속에 들어가는 이야기를 아직 우리에게 낯선 작가 류이스 프라츠는 엄청난 흡인력의 환상적인 이야기로 경험시켜준다. 『파란 책』을 읽어가는 과정은 한 권의 소설을 읽어가는 독서이기도 했지만 소설 속 주인공들의 모험을 동시에 경험하는 일이기도 했는데 영화화되어도 좋을 것 같은 소재와 친숙한 캐릭터들, 이야기의 합이 너무나 잘 맞았다. 2007년에 스페인에서 출간된 책이 한국 독자들을 만나는데 너무나도 긴 시간이 걸렸다는 점이 의아하지만 의아함은 뒤늦게라도 출간을 해준 문학동네 출판사를 향한 감사함으로 변해 있다. 


 레오는 리타를 보며 물었다.

 "리타…… 만약 실제로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다면 어떨 것 같아?"

 "레오, 적당히 해라." 리타가 말문을 막았다.

 "아니, 이를테면 어떡하겠냐는 말이지. 너도 알잖아……"

 리타는 앞머리를 살짝 넘기면서 말했다. 

 "글쎄.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주인공을 최선을 다해 돕겠지?" p.202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공간인 도서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도시 바르셀로나를 배경으로 한 『파란 책』에 대한 만족도가 너무 높지만 레오의 나이 때 이 소설을 만났으면 더 크게 감응했을 것 같다는 개인적인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레오보다는 옥스퍼드 사서 선생님에게 더 크게 이입하며 읽었지만 그럼에도 너무 좋았다. 카탈루냐 도서관엔 아직 많은 이야기들이 남아있을 것 같다. 소설이 끝난 게 아쉬울 정도로 나는 『파란 책』 속 깊숙이 들어갔다 왔다. 아직 여독이 다 안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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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T - 내가 사랑한 티셔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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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물건을 모으는 데 흥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어느새 이런저런 물건이 '모이는' 것이 내 인생의 모티브 같다'는 고백으로 시작하는 『무라카미 T』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지금까지 모았던 티셔츠 수백 장과 그에 관한 에세이 열여덟 편을 모은 작품이다. 티셔츠로 한 권의 에세이를 완성하고 엄청난 화제를 모을 수 있는 작가는 전 세계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유일무이할 것이다. 위스키 회사에서 만든 티셔츠들, 세계 각국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신간 홍보를 위해 만든 티셔츠 굿즈들, 자동차 그림 티셔츠 등 수많은 티셔츠 컬렉션과 에세이 속에서 만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상과 그의 취향을 엿보는 재미가 기대 이상으로 쏠쏠하다. 


 나도 물론 무지 티셔츠를 좋아하고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입긴 하지만, 그다음으로 자주 입는 것은 이런유의 레터링만 있는 티셔츠다. 그것도 의미 있는 문맥을 가진 문장이 아니라 "이건 대체 무슨 뜻이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법한, 투박하게 글씨만 인쇄된 것이 좋다. 그림 있는 티셔츠처럼 질리는 일도 없고 메시지성도 적고 자태가 깔끔하다. 다른 옷과 맞춰 입기도 쉽다. 그러서 그런 티셔츠를 발견하면 바로 사버린다. p.64 「의미불명이지만」


무라카미 하루키 속에는 장난기 넘치거나 어딘가 미숙한 어린 소년과 세상사에 통달한 어른이 공존하는 것 같다. 그의 소설을 통해, 에세이를 통해 진작부터 느껴왔었지만 『무라카미 T』는 예상과 짐작들을 확신으로 만들어주며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위스키를 좋아한다는 고백을 시작으로 위스키에 대한 취향과 그에 관한 에피소드들을 들려주다가 온갖 종류별 위스키 티셔츠를 소장하고 있음에도 아침부터 위스키 티셔츠를 입고 돌아다니면 남들 눈에 알코올의존증 아저씨도 보일지 몰라 그리 자주 입지는 않는다는 마무리를 따라 읽다 보면 위스키에 대한 조예가 무척이나 깊었던 어른은 어느새 수줍음이 많은 소년으로 변해있다. 


얼핏 티셔츠 종류가 다 달라보이는데 그러면서도 뭐랄까, 기준 같은 게 있는 것 같습니다.

"가게에 가서 세련된 티셔츠 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그것보다는 노벨티나 중고매장에서 그럴듯한 것을 사는 걸 좋아해요. 그래서 브랜드 티셔츠는 거의 없습니다. 굿윌 스토어에 가서 이것저것 구경하며 한나절을 보내거나 그런 걸 좋아하죠. 아, 결국 한가하다는 말이네요(웃음)." p.162 「어쩌다 보니 모인 티셔츠 이야기와 아직 다 싣지 못한 티셔츠들」


무라카미 하루키 하면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는 재즈, 수영, 마라톤, 맥주, 위스키 등 그의 취향을 이번 책에서도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중고매장에서 2달러에 산 독서클럽 티셔츠, 콘서트에 가서 기념으로 산 티셔츠들, 각국 대학 행사에 참여하여 받은 기념 티셔츠 등 수집가로서의 면모도 엿볼 수 있다. 열여덟 편의 에세이와 특별 인터뷰를 통해 엿볼 수 있는 그의 철학은 그것을 읽는 독자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꺼내보게 만들면서 읽는 재미 그 이상을 전해준다.


레코드도 50달러 이상은 사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죠. 물건을 수집할 때 철학 같은 게 있으신가요?

"네, 있죠. 게임이니까. 룰을 정하지 않으면 게임이 안 되잖아요? 뭐든 돈만 내면 그만이라는 식이 되는 건 재미없죠. 티셔츠도 200장쯤 봐야 이거 좀 괜찮다 싶은 게 하나 있을까 말까 한 세상이라서 일일이 구경하다 보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죠. 하지만 그게 또 게임이라서 열심히 봅니다만(웃음)."


한때 가방 속 물건들을 공개하는 '인 마이 백(in my bag)'릴레이가 한창 유행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가방 속을 보며 가방 주인의 취향과 당시의 유행을 엿볼 수 있는 릴레이가 한참 유행일 때 가방 속이 궁금했던 명사들 중에 무라카미 하루키도 있었다. 그의 가방 속은 아직도 잘 모르지만 『무라카미 T』를 통해 그의 티셔츠들은 원없이 실컷 봤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다음 에세이 주제는 무엇일까? '무라카미 하루키 is 뭔들'이지만 『무라카미 T』는 더 기발하고 재치 넘치는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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