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박정태 옮김 / 이학사 / 200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실존주의자는 열정의 힘을 믿지 않습니다.

 (…)

 

 반대로 그는 인간은 자신의 열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존주의자는 이 땅위에 주어진 그 어떤 징표 속에서 자신에게 방향을 일러줄 도움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이란 자기 좋을 대로 징표를 해석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실존주의자는 인간은 그 어떤 뒷받침도, 그 어떤 도움도 없이 매 순간 인간을 발명하도록 선고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퐁주Ponge는 그의 매우 아름다운 글에서 "인간은 인간의 미래다 L'homme est l'avenir de l'homme"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맞는 말입니다. 다만 만약 우리가 미래는 하늘에 새겨져 있으며 신이 이 미래를 안다는 것으로 이 말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이해입니다.

 

 (…)

 

 이 말은 내가 환상을 갖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

 

 자유롭네, 그러니 선택하게. 즉 발명하게, 라는 대답

_사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고도 모르는 것을 폭로(暴露) 식혀라(시켜라)!

그것은 발명(發明)보다 발견(發見)!

거기에도 노력(努力)은 필요하다!

 

_이상(李想)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예술은 끝없이 자신을 혁신할 수밖에 없다. 자기를 상투적 코드 안에 가두려는 문화의 추적을 피해 끝없이 탈주하며, 끝까지 이해되지 않는 이성의 타자로 남으려 한다.

_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3 

 

 

()으로 화()하고 마는 숙명에 함몰되길 거부하며 자신을 에워싸는 격()의 바깥을 사유, 탈주를 거듭하는 행위. 이름이 제게 이르기까지 멈춰 서서 기다림, 명명(命名)의 그물에 사로잡히어 붙들림, 이런 일체의 함락을 거부하는 몸짓, 미끄러지길 지속하는 것. 예술이라 이름 지음은 이러한 행위들에 뒤따르는 것 아닐지. 드러나 목격한 이후어림하게 된 이후에야 겨우, 이러한 어림을 가능케 하여준 것들과 행위들에 예술이라 이름하여 주는 것. 이름이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이를 기다리지 않고 다시 나아가는, 이 모두를 포괄하여 예술이라 이르는 것이라면!

 

 천천히 축구공이 하늘로 떠올랐다

그때 사람들은 꽉 찬 관중석을 보았다

고독하게 시인은 골대 안에 서 있었고

그러나 심판은 호각을 불었다

오프 사이드

 

_귄터 그라스, 밤의 경기장전문(‘2002 한일월드컵축시)

 

     

 ☞ 예술인이야말로 항시 ‘off-side’일 테고 또 그래야만 진정 예술인이라 이를 수 있을 것.

미지(未知)인 상태에서는 존재하지 않던 것을, 여지(餘地)로 드러내 보이는 것, 존재케 하는 것. 이를 먼저 보고[] 드러내어 밝히기까지[] 고독한 플레이를 그치지 않는 것. 만리(萬里) , 그러니까 기실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 여기는 상태를 흔들어 깨워 비로소 지각/ 마침내 인식하도록 돕는 이 행위야말로 예술이라면. 호오(好惡)로 가늠하고 찬반(贊反)으로 가르는 데에 얽매이지 않은 채,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이러한 논란의 여지(餘地)를 끊임없이 생성, 불러일으키는 이. 자신을 에워싸려는 갖가지 그물을 벗어던지고 외려 둘러씌우는 그러한 윤곽들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하며 그것을 풀어헤치는 작업을 그치지 않는 이. 그이야말로 예술인이라 이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하루키야말로 이 예술인의 정의에 잘 들어맞는, 부합하는 이 아닐지.

 

분투(奮鬪)를 그치지 않는 고군(孤軍), 외로운 싸움이지만 피하지 않고 즐겨 감당하는 그.

가만히 그이가 낸 길을 따라가보는 것.

지금 당면한 일 가운데 할 수 있는 걸 감당해가며 묵묵히 따라가보는 것.

내가 그를 응원하는 방편이겠고, 그에 응답하는 길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는 문구는 얼마나 빤한가.

 내겐 그저 당연하다 싶을 따름. 그의 남,다름은 '사고하는 인간 역시 인간적이지 않'다라고 이르는 데서 드러난다.

 보후밀 흐라발, 내가 쓰려고 아껴둔 문장을 마치 그이가 먼저 내어다 쓰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그를 질투하며, 시기하며, 다음은 어떤 문장을 마주하게 될지를 놓고 긴장하면서 초조해 하면서 손톱을 물어뜯으며, 그를 파먹고 마침내 不可分, 그이가 되고만 그 문장을 쫓고 또 쫓는다.

 虛와 無를 딛고 포효하는 활자들이 이 가슴을 물어뜯도록 내버려 두는 것 말고는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나를 에워싸는 이 무력함, 패배감.. 헌데 어째서 나는 이토록 편안함을 느끼는가.. 나는 이 평안에 이름표를 달아주고 싶다, '한없이 포근한 패배감'이라고..

 드문 경우이나 타자에게서 닮(고 싶)은 구석을 발견한다는 건 얼마나 경이로운가.. 그것은 또 한편 얼마나 쓰라린 경험인가.. 흐라발의 육신을 빌어, 이르자면 육화된 그 말들을 나는, 사랑한다.. 愛/憎, 이 앞에서 난 그저 철 모르는 짐승일 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논란 자체에 함몰되기보다 그 생산성에 주목하고, 변증으로 고양될 사회상을 기대하며 여지(餘地)를 쫓는 모험을 멈추지 않는 것.

각주구검의 미련을 탓하는 근시안보다 그 일엽편주가 고해(苦海)를 건너는 동안 그리는 궤적을 쫓아 드러낼 수 있는 넓은 시야.

그럴 수 있을까.

 

'일베'를 '노빠'의 거울상으로 바라보며 객관적 반성, 기대할 수 있을까.

나아가 서발턴(sub-altern)으로서 '일베'라는 무리의 면면을 살필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집권 당시 노무현을 몰아세우던 사람들이 故노무현을 그립다 이르는 난센스

인물 중심 구도, 왕조 프레임은 정녕 극복할 수 없는 것인가.

아니 TV브라운관/모니터/스마트폰 액정의 프레임에서 자유로운 다중(多衆), 기대할 수 있을까.

각자 저마다의 '언어'를 발견해내길 기대할 수 있을까

 

저마다 이색(異色)을 PR하는 천편(千篇), 그러나 실상은 일률(一律)에 복무 중

마켓에 대한 통찰은 간데없고 마케팅만이 난무하는 걸 바라보는 건 서글프기까지 하다.

 

썩고 상하는 실물 재화와 수치로 영원한 화폐금융과의 간격을 메우기 위해

교대로 일하며 24시간을 채우는 다수.

부채/이자가 공모하는 강제저축형 生의 차압에 의문을 제기하는 경제학도 하날 찾아보기 힘들다니..

과소비:과소소비의 양극화, 실질가처분소득 하락에서 소득재분배 위한 조세정책 특히 불로소득과세

나아가 자영업자>소비자에게로 전가되는, 불로소득의 원천 가운데 주된 축인 지대(地代)

이를 당연하게 여기는 풍조에 의문을 제기, 기형을 가능케하는 구조 탐색..

 

한편 대안으로 여기는 협동조합

이면의 세 불리기, 규모의 경제 달성 목표의 성장 일변도

그에 따른 관료화와 부패.

민간 기업 못지않은 아니 그보다 더한

생협의 민낯, 협동조합의 두 얼굴.

성역을 두지않고 메스를 들이댈 수 있을까.

 

곡학아세에서 돌이킨 길, 자퇴!

기자 회견은 제법 떠들석하다.

주목 없이도 꿋꿋했으면.

 

21세기형 바벨탑, 교회 첨탑에 얹힌 십자가는 아득하기만 하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는 지상에 있지 않았던가.

가장 낮은 자리에 거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먼저 돌보지 않았던가.

 

기사도 소설화하는 마당

감성보다 이성을, 흥분에 앞서 차분하게 육하(六何)를 따져 물으며 책임지고 또 책임 지울 수 있기를.

 

유배 중에도 제 형편의 곤란보다 주변을 먼저 살피던 정약용.

목민심서(牧民心書) 그릇된 목민관(牧民官)에 대한 질타 혹은 염려보다 또 하나의 목자(牧者)로서 바람직한 방향으로의 인도를 고민. 펼치기 곤란한 안타까움이 담긴, 마음 그래서 심서(心書)이지 않을지. 경세유표(經世遺表) 곧 목숨을 건 직언의 바탕 역시 동일한 궤 아니었을까.

 

'시대와 창의적 불화' 가능할까.

철학(哲學)은 논란에 굴하지 않고 진영에 안주하지 않으며 여지(餘地)에의 모험을 멈추지 않는 것이라면

처처의 갈급, 世音을 觀하는 속에서 나아갈 방향을 가늠할 독법.

 

지금 읽고 싶은, 당장 읽어내야 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