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란 자체에 함몰되기보다 그 생산성에 주목하고, 변증으로 고양될 사회상을 기대하며 여지(餘地)를 쫓는 모험을 멈추지 않는 것.

각주구검의 미련을 탓하는 근시안보다 그 일엽편주가 고해(苦海)를 건너는 동안 그리는 궤적을 쫓아 드러낼 수 있는 넓은 시야.

그럴 수 있을까.

 

'일베'를 '노빠'의 거울상으로 바라보며 객관적 반성, 기대할 수 있을까.

나아가 서발턴(sub-altern)으로서 '일베'라는 무리의 면면을 살필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집권 당시 노무현을 몰아세우던 사람들이 故노무현을 그립다 이르는 난센스

인물 중심 구도, 왕조 프레임은 정녕 극복할 수 없는 것인가.

아니 TV브라운관/모니터/스마트폰 액정의 프레임에서 자유로운 다중(多衆), 기대할 수 있을까.

각자 저마다의 '언어'를 발견해내길 기대할 수 있을까

 

저마다 이색(異色)을 PR하는 천편(千篇), 그러나 실상은 일률(一律)에 복무 중

마켓에 대한 통찰은 간데없고 마케팅만이 난무하는 걸 바라보는 건 서글프기까지 하다.

 

썩고 상하는 실물 재화와 수치로 영원한 화폐금융과의 간격을 메우기 위해

교대로 일하며 24시간을 채우는 다수.

부채/이자가 공모하는 강제저축형 生의 차압에 의문을 제기하는 경제학도 하날 찾아보기 힘들다니..

과소비:과소소비의 양극화, 실질가처분소득 하락에서 소득재분배 위한 조세정책 특히 불로소득과세

나아가 자영업자>소비자에게로 전가되는, 불로소득의 원천 가운데 주된 축인 지대(地代)

이를 당연하게 여기는 풍조에 의문을 제기, 기형을 가능케하는 구조 탐색..

 

한편 대안으로 여기는 협동조합

이면의 세 불리기, 규모의 경제 달성 목표의 성장 일변도

그에 따른 관료화와 부패.

민간 기업 못지않은 아니 그보다 더한

생협의 민낯, 협동조합의 두 얼굴.

성역을 두지않고 메스를 들이댈 수 있을까.

 

곡학아세에서 돌이킨 길, 자퇴!

기자 회견은 제법 떠들석하다.

주목 없이도 꿋꿋했으면.

 

21세기형 바벨탑, 교회 첨탑에 얹힌 십자가는 아득하기만 하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는 지상에 있지 않았던가.

가장 낮은 자리에 거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먼저 돌보지 않았던가.

 

기사도 소설화하는 마당

감성보다 이성을, 흥분에 앞서 차분하게 육하(六何)를 따져 물으며 책임지고 또 책임 지울 수 있기를.

 

유배 중에도 제 형편의 곤란보다 주변을 먼저 살피던 정약용.

목민심서(牧民心書) 그릇된 목민관(牧民官)에 대한 질타 혹은 염려보다 또 하나의 목자(牧者)로서 바람직한 방향으로의 인도를 고민. 펼치기 곤란한 안타까움이 담긴, 마음 그래서 심서(心書)이지 않을지. 경세유표(經世遺表) 곧 목숨을 건 직언의 바탕 역시 동일한 궤 아니었을까.

 

'시대와 창의적 불화' 가능할까.

철학(哲學)은 논란에 굴하지 않고 진영에 안주하지 않으며 여지(餘地)에의 모험을 멈추지 않는 것이라면

처처의 갈급, 世音을 觀하는 속에서 나아갈 방향을 가늠할 독법.

 

지금 읽고 싶은, 당장 읽어내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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