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고요해질 통증인 것을, 지난밤에는, 또 수없이 반복되었던 그 밤들에는 이런 순간을 믿지 못했었다. 마치 밤이 깊을 때마다 새벽을 믿지 못하듯이, 겨울이 올 때마다 봄을 의심하듯이 나는 어리석은 절망감에 사로잡히곤 했던 것이다. - P25
내 거짓말 같은 젊음이, 스스로 기쁨을 저버렸던 저 모든 나날이 아득하게 천장 위로 멀어지고 있었다. - P58
아프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사무실에 앉아 있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그들과 웃고 떠드는 것은 더욱 우울한 일이었다. 차라리 옥상에 혼자 서서 자신의 지난날을, 뚜렷한 대상 없는 억울한 마음들을 반추하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마음을 잠시 풀어놓았다가 사무실로 돌아오면 탁하고 안온한 공기가 정환의 숨을 틀어막았다. 그때마다 정환은 이곳을 떠나서는 안 된다. 이곳이야말로 나를 먹여주고 입혀주는 집이며 가족이며 세계이다라고 입맛이 쓴 다짐을 하곤 했다. - P250
인간의 조상들은 약한 근육과 이빨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낮 동안 뿔뿔이 흩어져 수렵과 채취를 하다가 해 질 무렵이면 무리의 본거지인 동굴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잦은 이동은 맹수들이 잠든 야간에 이루어졌으므로, 밤에 돌아왔다가는 무리에서 낙오되기 십상이고 낙오는 비참한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식량을 찾아 강으로 숲으로 헤매던 인간의 조상들은 불타는 황혼을 신호로 하던 일들을 모두 팽개치고 자신들의 동굴을 향해 필사적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 본능이 지금까지 후예들의 무의식 속에 남아 있는 것을 이른바 황혼병(黃昏病), 혹은 귀소본능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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