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내일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박슬라 옮김 / 오픈하우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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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도 휴대전화도 특정하게 머무르는 주소도 없이 떠도는 전직 헌병 출신의 잭 리처는 뉴욕의 새벽 2시 지하철 안에서 자살폭탄 테러범으로 의심되는 한 여자를 마주하게 된다. 같은 칸에 타고 있는 사람은 리처 자신을 포함해 모두 6명, 다른 이들은 고된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인지 아니면 일터로 가는 길인지 모르겠으나 대체적으로 피곤해보이는 일반적인 모습이었다면 리처의 눈에 띈 그녀는 자살폭탄 테러범이 가진 11가지의 특징을 모조리 가지고 있다. 날씨와 걸맞지 않게 두껍고 자신의 몸보다 훨씬 크고 검은 패딩, 무언가 알 수 없는 말들을 작은 소리로 계속 웅얼거리며 불안한 눈빛을 하고 있는 그녀를 발견한 리처는 만약 그녀가 자살폭탄을 가지고 있다면 어디에서 그녀를 멈춰야 할지, 어떻게 멈춰야 할지 계속해서 고민한다. 그리고 마침내 결단을 내리고 그녀 앞에 다가섰을 때 그녀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한 정의 총이었고, 그녀가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눴다고 생각한 순간 그녀는 그녀 자신에게 총을 발사한다. 테러범이 아니어서 큰 인명피해가 없었던 점 혹은 리처 자신을 향해 발사한 것이 아닌 점을 감안한다면 최소한의 피해인가 싶기도 하지만 195센티의 거구인 자신을 경찰로 소개하자 압박을 받은 그녀가 목표를 바꿔 자살을 결심하게 된 것은 아닌지 어느 정도는 죄책감 비슷한 감정을 갖게 되는데, 그것과는 별개로 그녀의 죽음을 목격한 같은 칸의 승객들 중 한명은 사라지고 경찰 이외의 신분을 밝히지 않은 여러 무리들이 달려들어 리처가 그녀로부터 무언가를 건네받은 것은 아닌지를 확인하려 든다. 그러자 리처의 레이다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지되고, 리처는 사건의 한가운데로 휘말려 들어가게 된다.

자살폭탄 테러리스트를 구분할 수 있는 12가지 행동지침을 이스라엘 군이 작성하여 배포했다고 하는데 리처의 눈에 띈 그녀의 모습은 실제로 정확히 테러범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일어난 최악의 상황 때문에 공포에 질린 채 어찌할 바 모르던 상태였을 뿐이다. 그녀가 들고 있던 총이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는지, 자신을 해하기 위해서였는지 지하철 6호선 안에서는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못한 상태였으나 리처의 등장으로 그녀는 압박감을 견디지 못했고 폭발했다. 국가의 정부기관, 사설조사관등이 리처에게 접근했고, 죽은 그녀가 남겼다는 무언가를 찾고 싶어했고 그 와중에 지금 현재 가장 주목받고 있는 정치인의 이름까지 수면으로 올라왔다. 섣불리 움직였다간 위험할 것 같고, 복잡한 사건에 얽힐 것 같다, 하는 생각 따위는 리처에게 통하지 않는다. 궁금하니 찾아가서 물어보고, 안 알려준다고 하면 머리를 굴려 알아낼 방법을 강구해낸다. 왜? 잭 리처니까.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체인의 약한 부분' 혹은 '맹점'이 있는데 그들의 가장 가깝고도 애정하는 사람이거나 심지어는 동물('존 윅'은 자기 애완견이 죽어서 그 모든 일을 벌였지 않은가)일 수도 있다. 그런데 잭 리처에겐 그런 것이 없으니 어지간하면 적당히 하고 돌아서라고 권하는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움직인다. 물론 대충 움직여도 팔이든 다리든, 코뼈든 뭉개놓을 수 있는 힘이 있으니 그렇겠지만.

테러리스트를 처치하거나 정부기관이 숨기고 싶어하는 일들을 파헤치고 다니는 류의 영화들을 보고 뭔가 대단한 걸 배우거나 얻을 수 있지 않은 것처럼 잭 리처의 이야기도 그런 것보다는 한편의 신나는 액션영화를 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게다가 작가의 문장 하나하나가 머릿 속에서 리처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그려낼 수 있는 스타일이라서 더 그렇다. 거구의 몸을 한 리처가 무심한 듯 시크하게 악당들의 팔을 꺾고, 그토록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을 곤죽으로 만들어 놓고, 정치적으로 대단한 인물이든 아니든 간에 기죽지 않으며 자기가 할일을 해내고는 툭툭 털고 떠나는 모습은 그야말로 영화적이다. 꽃미남보다는 가장 헐리우드적인 마초남의 전형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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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그리고 한 인생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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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으로 온통 뒤덮인 작은 마을 보발의 1999년 12월, 아홉살 난 레미가 사라진다. 아니 레미는 죽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누구도 레미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당시에는. 그저 실종된 거라고 믿었다. 바로 옆집, 엄마와 둘이 살고 있는 열두살 난 앙투안에 의해 레미는 갑작스럽게 죽고 말았다. 앙투안은 친구들과 함께 숲에 오두막을 지으며 놀곤 했는데 어느 순간 아이들은 숲에서 노는 것보다는 게임기를 가지고 노는 것에 더 취미를 붙였고 그 무리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앙투안은 자기만의 비밀 오두막을 만들어보겠다며 숲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금발버리를 한 에밀리를 데려오고 싶은 응큼한 계획도 있었고, 자기가 좋아하는 레미네집 개인 윌리를 오두막으로 올릴 도르래도 만들어놓고 즐거워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윌리는 차에 치였고, 그렇게 가쁜 숨을 내쉬는 윌리를 본 레미의 아버지는 앙투안의 눈앞에서 가차없이 윌리에게 총을 쏜다. 그리고는 윌리를 폐기물 쓰레기봉투에 담아 던져버린다. 앙투안은 충격을 받기도 했고 너무나 슬프기도 해서 자기 오두막을 때려부수며 화를 삭이고 있었는데 저만치에서 레미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급작스럽게 분노가 치민 앙투안은 작대기를 집어들고 레미를 후려쳤고, 작고 어린 레미는 그대로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렇게 앙투안은 열두살에 살인자가 되었다.

앙투안은 레미를 숲속 어딘가에 밀어넣고 집으로 돌아오고, 마을은 이미 사라져버린 어린 레미를 찾는 일로 시끌벅적하다. 앙투안은 누군가 자신이 한 일을 알아챌까봐, 경찰이 자신을 찾아와서 레미를 왜 죽였느냐고 할까봐 걱정하는 마음과 이 끝도 없는 불안이 차라리 빨리 끝나버리도록 누군가 레미의 시신을 얼른 찾아내고, 레미를 죽게 만든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밝혀냈으면 하는 마음 사이에서 왔다갔다 한다. 하지만 이혼 후 자신만을 위해 힘들게 살고 있는 엄마를 더 이상 힘들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온힘을 다해 불안감을 감춘다. 레미를 찾는 수색대가 결성되고, 생각지 못했던 사람이 용의자로 체포되는 등 사건은 시시각각 다르게 변하며 앙투안을 압박한다. 레미의 사건은 갑작스럽게 마을을 뒤덮은 수해로 흐지부지 되어버렸다. 마을 전체가 피해자가 되어버렸고, 그로 인한 인명피해도 있었기에 이제 레미나 레미의 가족만이 피해자는 아니게 되어버린 것이다. 친하게 지내던 동네 꼬마 아이의 실종, 에 대한 반응이라기엔 과한 앙투안의 상태에서 앙투안의 엄마도 무언가를 느꼈지만 그녀는 입을 닫고, 그렇게 시간은 흐른다. 되도록이면 고향마을로 돌아오지 않으려고 애를 쓰던 앙투안은 의외의 복병을 만나 고향마을에서 의사노릇을 하게 된다.

앙투안은 고의로 레미를 살해한 것은 아니다. 너무나 화가 난 상태였고, 그저 작대기를 한번 휘둘렀을 뿐인데 그게 치명타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평생을 죄책감이라는 무게를 짊어지고 편하게 살지 못했으며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다시 그 작은 마을로 돌아와 봉사하며 죄를 갚으며 살고 있다, 고 말할 수도 있다. 레미의 사건을 앙투안이나 앙투안의 엄마 입장에서 보자면 그가 짊어진 죄책감 때문에 한번도 편히 살지 못했다는 것, 그것이 면죄부가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자기가 우러러보기까지 하던 열두살 형을 향해 다가갔다가 급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레미나 그런 레미를 잃어버린 채 평생을 살아야 했던 레미 부모의 입장에서도 죄책감으로 무거워진 앙투안의 삶이 면죄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할까?

앙투안의 사건은 고의가 이니기 때문에 잔인한 범죄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다음을 계획하는 앙투안을 보면서 좀 무서웠다. 작품 속에서 앙투안은 12살이라고 했다. 아마도 우리 나이로는 초등학교 6학년이거나 중학교 1학년일 수 있을 것이다. 축 늘어진 레미를 보고 어떻게 하면 들키지 않고 숨길 수 있을지 걱정했고, 자신이 시신을 숨기는 동안 잃어버렸을 증거물에 대해 걱정했으며, 자신이 레미를 본 마지막 목격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거짓말을 계획했고, 결국 조여오는 압박을 이기지 못하게 될거라면 차라리 마을을 떠나 사라져야겠다고 생각하고 짐을 싸기까지 했다. 의외의 인물들이 용의선상에 오르는 것을 보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수해로 마을이 휩쓸려버려 레미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걸 보고 안심했다. 물론 극심한 불안감 때문에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약장의 약들을 털어넣기도 했지만 살아났다. 눈에 띄게 불안해하고 먹지도 못하고 결국엔 약을 먹은 앙투안을 본 엄마는 무언가를 알아챘고 왕진을 온 의사에게는 상한 고기를 먹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앙투안이 앓아 누운 사이 앙투안이 싸놓은 가방 속의 물건들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다. 앙투안과 엄마는 공범인 셈이다. 점점 더 잔인해지는 청소년 범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자는 이야기가 많이 있다. 오래 전 함무라비 법전에 나온 것처럼 누굴 죽이면 당연히 죽인 사람도 죽여버리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하는 식으로 극단적인 처벌을 할 수도 없거니와 그것이 유일한 해결책도 아닐 것이다. 그래서 또다시 가장 원론적인 의문을 가지게 된다. 누군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죽였을 때, 그 살인자가 평생을 죄책감 속에서 살았다고 해서 그를 용서할 수 있는가, 하는. 혹은 용서할 수 없다고 해서 내가 그를 죽인다면 나는 또 그 누군가의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살인자가 되는데 그 다음은 어찌 되는가, 하는.

이 작품을 읽고 지금 로랑 고데의 <세상의 마지막 밤>을 읽고 있는 중이다. 이 작품의 시작도 어린 소년이 갑작스럽게 날아든 총탄에 목숨을 잃은 사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여태 읽었던 어떤 책보다 가장 강렬하고도 선명한 어머니의 분노를 보았다. 그녀는 아들을 죽인 자를 용서하지 않았다. 심지어 아들의 무덤에 세운 비석까지도 저주했다. 레미를 잃은 데스메트 부인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건 아마도 나도 누군가의 어미이기 때문일테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앙투안의 어미는 또 달랐겠지 싶고 여러가지 생각이 많이 들었던 작품이었다. 게다가 순간순간 앙투안의 나이와 상관없이, 누군가를 죽인 한 사람의 인생에 깜빡이도 없이 등장하는 사건의 그림자들이 내 가슴마저도 조여오게 만들었다. 급박한 스릴러도 아닌데 읽는 내내 애간장이 타는 그런 느낌,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터져버리는 그 마지막 순간에 나도 큰 한숨을 내쉬게 만든 잘 짜여진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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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마지막 밤 민음사 모던 클래식 33
로랑 고데 지음, 이현희 옮김 / 민음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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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피포 데 니티스, 나는 1980년에 죽었다."

<세상의 마지막 밤> 내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p. 49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자식을 먼저 앞세우고 그 슬픔과 비탄에 가정을 깨뜨리곤 한다. 돌아오지 못할 길을 건넌 자식을 향한 그리움은 누군가에 대한 비난으로 바뀌기 쉽고 그 비난은 종종 배우자인 경우가 많다. 왜 조금 일찍 나가서 아이를 마중하지 않았는지, 왜 차길을 건너며 아이의 손을 더 꽉 붙잡지 않았는지, 왜 아이가 혼자 노는 곳에 시선을 두지 않았는지, 왜왜왜왜왜!!! 비난을 하지 않더라도 누군가 정신을 잃을 정도로, 일상을 저버릴 정도로 비탄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면 그 또한 가정을 깨는 원인이 된다. 산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먼저 정신을 차린 이가 말할 수 있다. 그럼 상대는 어떻게 벌써 그 아이를 잊을 수 있는지에 대해 분노의 지경에 다다르게 된다. 이런 일은 세상에 비일비재하기에 이러한 이야기를 소재로 한 영화와 소설등도 세상에 널렸다. 비슷한 류의 많은 창작물을 봐왔지만 이 작품과도 같은 전개는 처음인 것만 같았다.

2020년의 더운 여름날 필리포 스칼파로 데 니티스라 불리는 사나이가 자신의 직장으로 출근을 한다. 그는 누구에게나 적절한 환상적인 커피를 만드는 사람이고, 오늘은 그 일을 하는 마지막 날이다. 그는 오랜시간 공을 들여 자리를 잡았고, 마침내 그가 원하는 사람, 토토 쿨라초가 커피를 주문할 때를 기다렸다. 그를 위한 커피를 만드는 대신 그의 목에 칼날을 들이밀 그 날을. 꼬마 피포는 1980년 6월, 아버지 마테오 데 니티스의 손에 잡혀 포르첼라 거리를 뛰다시피 걷고 있었다. 일찍 출근해야 하는 어머니 줄리아나 대신 피포를 학교에 데려다 주기로 한 마테오는 끝도 없는 차량의 행렬에 더 이상 차를 타고 가기를 포기하고 지친 피포를 다그쳐가며 지각하지 않기 위해 애를 쓸 뿐이었다. 5분만 쉬고 싶다고, 신발끈이 풀렸다고, 아빠가 잡아당기는 손이 너무 아프다고 붉어진 볼을 하고 마침내 피포가 울음을 터뜨렸을 때조차 서두르라는 성난 말투를 내질렀을 그 때 그 거리에서 공포의 총소리가 들렸고 작은 피포의 몸은 축 늘어져버렸다. 그렇게 피포는 죽었다. 지각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화를 내던 아버지 곁에서 두 사람은 그렇게 헤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아들을 잃은 아비는 밤마다 아들의 울던 얼굴이 꿈에 나타났고, 그래서 자신의 택시로 밤거리만을 헤매고 돌아다녔다. 아내인 줄리아나는 차마 아들의 무덤에 가지도 못했다. 그것이 사실이라는 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에. 자식을 잃은 어미의 심정을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라는 표현들을 자주 본다. 아마도 그 심정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이 작품 속 줄리아나의 그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강력했다. 어쩌면 문학작품에서조차 아, 이 정도의 감정표현은 너무한가 싶어서 자제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면 이 작품에서의 표현은 보자마자 그래 내가 자식을 이렇게 갑작스럽게 허망하게 잃었다면 이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은 모두 잿빛 얼굴에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가족, 친구, 동네 상인들, 모두. 차가운 분노가 그녀 안에서 치밀었다. 전부 불사르고 전부 뽑아 버릴 수 있는 분노, 체념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중의 어미가 품은 분노. 그녀는 거기, 아무도 없는 곳을 향해서 새들만이 듣고 있는 이 시간에 입을 열었다. 그것은 줄리아나의 첫번째 저주였다.

"나는 당신들 모두를 저주한다. 세상을 추하게 만든 건 당신들이기 떄문이지. 당신들은 나를 둘러싸고 호들갑을 떨고 달콤한 말들로 나를 감싸 안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어. 나는 내 아들의 관을 안도감과 함께 운반했던 이 공동묘지의 인부들을 저주한다. 그자들은 내심 관이 가벼워서 덜 피곤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니까. (중략)그리고 나는 친구들과 그들의 진지한 울음을 저주한다. 나의 것이 아닌 모든 고통을 나는 경멸하고 짓밟는다. 지금 이 숙낙ㄴ, 이 세상에는 어미의 눈물만을 위한 자리가 있을 뿐이다. 나머지는 전부 외설이다. 어이없는 말만 건네던 신부여, 입을 다물든가 진실을 말하라.(중략)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으므로 나는 다시는 여기에 오지 않겠다. 피포는 여기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는 으레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으면서 나를 둘러싸고 울던 모든 사람들을 나는 저주한다. 나는, 나는 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한다. 피포는 여기 없다."

<세상의 마지막 밤> p.66

그리고 줄리아나는 결연히 마테오에게 말한다. 피포를 데려오라고. 그럴 수 없다면 피포를 죽인 놈이라도 데려오라고. 그를 죽이고 돌아온다면 마테오에게 묻은 핏자국을 빨아주며 기쁨을 느낄 수 있을거라고. 하지만 마테오는 형사를 통해 찾아낸 피포의 살인범을 마주하고도 총을 쏘지 못했고 그렇게 줄리아나는 마테오 향해 두번째 저주를 퍼붓고는 그를 버리고 떠나갔다. 그녀는 자신이 일하던 호텔에 머무르며 온갖 성당의 담벼락 구멍마다 자신의 기원이 담긴 쪽지를 꽂아넣기 시작했다.

아들을 돌려 주십시오.

아들이 돌아오는 날이 가까워지게 해 주십시오.

피도, 장례식도 모두 없던 일로 해 주십시오.

저는 아들을 기다립니다.

저를 죽은 자의 어미로 만들지 마소서.

피포를 제게 돌려주시거나 세상을 불태워주소서.

내 아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저는 당신을 저주할 것입니다.

온 나폴리가 입가에 똑같은 이름을 떠올릴 수 있도록. 피포. 피포. 피포. 피포.

<세상의 마지막 밤> 슬픔에 잠긴 어머니의 쪽지 p.137

그러나 그녀의 기원이 담긴 쪽지 어느 것에도 답은 없었고, 그러자 줄리아나는 성당을 향해 세번째 저주를 시작했고, 그녀의 기원이 담긴 쪽지를 두고 주님을 욕보였다며, 미신을 부끄러워 하라는 신부의 발치에 침을 뱉고 주님이 자신에게 용서를 구할 날만을 기다린다며 소리를 지른 채 나폴리를 버리고, 아이를 위한 기억을, 마테오를, 자기 자신을 버렸다.

"내 이름은 줄리아나 마스케로니. 나는 아무 일도 겪지 않았다. 나는 우리 부모님의 딸이다. 그밖에 아무것도 아니지. 그리고 나는 내가 태어난 곳에서 죽기 위해 여기 다시 왔다."

<세상의 마지막 밤> p.147

잠들지 못하는 밤들이 수도없이 지나가던 어느날 마테오는 성당에 가려던 그레이스를 만나 가리발도 카페에 가게 되고, 그곳에서 지옥으로 향하는 문을 알고 있다는 교수와 세상에 손가락질 당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고해를 받아주는 마체로티 신부를 알게 된다. 교수는 말한다. 오늘날의 세상이 너무나도 이성적이고 건조해서 인식하고 있지 못할 뿐이지 산 자와 죽은 자들의 경계는 모호하고 어느 부분 서로 포개져 있다고. 그리고 그 경계를 찾아가면 죽은 자들의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그래서 마테오는 줄리아나를 위해, 그리고 그렇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전하지 못한 채 심지어 어이없는 분노에 갇힌 채 죽은 자의 세상으로 떠나가버린 피포를 위해 그 길을 가야겠다고 생각한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마체로티 신부가 그 길을 함께하기로 한다. 이 이야기는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가 뱀에 물려 죽자 저승까지 내려가 음악으로 저승의 신들을 감동시켜 그녀를 다시 지상으로 데려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낸 오르페우스의 신화를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마테오가 마체로티 신부와 함께 저승으로 발을 디딘 그 순간부터는 단테의 <신곡-저승편>이나 <신과 함께>를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온갖 역경을 딛고 마침내 어린 피포의 영혼을 찾아내는 마테오, 그리고 피포의 영혼을 가슴에 품은 채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선 마테오, 하지만 세상은 늘 그렇듯 모든 것을 그렇게 쉽게 내주지 않는다. 이제 마테오는 피포의 영혼을 이승으로 보내는 대신 저승에 남아야 할 운명이 되었다.

"승리는 없다. 좋다. 나는 나폴리의 파체 골목과 포르첼라 거리 모퉁이에 있다. 그 저주받은 날에. 나는 내 아들의 손을 잡았고, 빗나간 총알을 맞은 것은 바로 나다. 이렇게 생갹해야만 한다. 나는 아들 대신 죽기를 수없이 갈망했다. 그리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나는 파체 골목 인도에 있고, 아들을 대신해서 죽는다. 햇빛을 가득 머금은, 행인들의 겁에 질린 비명 한가운데에서. 그래, 나는 이 바보 같은 죽음을 모독하지만 내 아들보다는 차라리 나를 후려친 운명에 감사한다."

<세상의 마지막 밤> p. 236

그렇게 1980년에 죽었던 피포는 어머니 줄리아나의 저주에 힘입고 아버지 마테오의 희생으로 다시 살아나 그레이스의 손에 키워지고, 가리발도에 의해 커피를 배우며 교수와 마티첼로 신부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토토 쿨라초에게 복수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피포는 어머니를 찾아간다. 마침내 자신의 젖가슴을 도려내고 자신을 놓아버린채 고통의 병원에서 스스로를 공포와 불면에 가두어버린 어머니 줄리아나를 찾아간다. 아버지 마테오의 영혼을 가슴에 품은 채. 가장 하드보일드한 가족사랑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저주가 난무하고 복수의 피가 흩날리며 지옥의 문앞이 아니라 이승에서 저승까지를 왕복하는 이야기. 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도 매혹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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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다면서 하고 있어 하하하 (리커버) - 빨강머리N의 지랄맞은 밥벌이에서 발랄하게 살아남기
최현정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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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미 일을 놓은지 벌써 10여년이 다 되어가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몇달 전부터 아들 데리고 캐나다로 훌쩍 떠나기 전까지 20년은 정말 안해본 아르바이트가 없고, 안 마주쳐 본 진상이 없을 정도로 일에 치여서 살았던지라 싫다면서 하고 있다는 말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알기에 그 말 뒤에 붙은 '하하하'가 그렇게 와닿을 수가 없었다. 읽어보니 나랑 참 비슷한 듯 하면서도 다른 성격, 하지만 세상살이가 다들 그렇게 사람을 이리 깎고 저리 깎아서 결국은 비슷한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실 안 그래도 빠른 세상의 흐름 속에서 광고업계의 흐름이란 그 세상의 흐름보다도 훨씬 빠른 흐름을 가지고 있기에 특별히 남들보다 일을 더 잘하지도 못하는 사람, 혹은 그저 버티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낮춰 평가하는 작가지만 말 그대로 그 속에서 10년 이상을 버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남들보다 못한 사람은 아니라는 방증일터다.

그럴싸한 미사여구보다도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유머러스하게 풀어놓은 솜씨가 과연 광고계에서 카피라이터로 밥벌어 먹고 사는 사람답군, 하는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다 중간중간 그려진 삽화가 어찌나 맛깔스러운지 그 또한 매력적이다. 직장에서도 어느 정도 연차에 들었으니 자리를 잡은 중견 직장인일테고, 자기만의 책을 한 권도 아니고 세 권씩이나 낸 작가이기도 하니 세상 쉽게 사는 것 같지만 남의 회사에서 월급받아 먹고 사는 직장인이라는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은 매한가지인 것 같다. 생각같아선 호기롭게 까짓거 이놈의 회사, 내가 그만둔다 하고 뛰쳐나오고 싶지만 결국은 오늘 그은 3개월 할부 카드값을 갚아야 할 다음달의 나를 위해서 그런 말은 넣어둬, 넣어둬!!!

네? 제가 잘하고 있다고요?

"에이, 제가 뭘요."

"버티는 게 잘하는 거야."

아, 그런 의미였습니까? 난 또 내가 정말 잘하고 있다는 줄.....

<싫다면서 하고 있어, 하하하> p. 11

"우리 팀에 신입사원을 배치받았다. 금메달인지 은메달인지 동메달인지 모르겠지만 잘 지내보자고."

그분은 아마도 메달권에 진입하지 못하는 선수도 있다는 걸 모르셨던 것 같다.

<싫다면서 하고 있어, 하하하> p. 17

나로 말하자면, 운동회에서 달리기 시합만 해도 심장이 쫄깃해지고, 누가 내기를 하자도 하면 게임 자체가 싫어지는 사람. 태생적으로 경쟁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좋게 말하면 느슨하게, 사실대로 말하면 나태하게 살아가는 종족. 초중고대 15년 동안(학교도 오래 다녔다!) 공부와 경쟁은 죽도록 싫어서 정말 마지못해 억지로 했다.

<싫다면서 하고 있어, 하하하> p. 33

이럴 때일수록 나 자신에게

'내가 맞다! 이보다 좋을 순 없다!'

합리화하고 스스로를 설득해야 한다.

그리고 그 자신감으로 밀어붙이다 보면 신기하게도 일이 제대로 굴러간다.

과연, 사기를 치려면

나 자신부터 속여야 한다.

<싫다면서 하고 있어, 하하하> p. 42

이런 소리 정말 미쳤다는 거 나도 아는데,

더 큰 재앙이 닥칠지라도, 당장 눈앞에 있는 재앙을 피하고 싶은 것.

그게 바로 월요일을 맞이하는 직장인의 마음이다.

<싫다면서 하고 있어, 하하하> p. 43

나는 화가 날 때 사람을 인간으로 대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내가 본인의 실수를 뒤집어씌운 상황을 가정해보자. 평소의 나라면 "사람이 어떻게 저래!"하고 분노할 것이다. 그때부터 내 몸과 마음은 번뇌에 사로잡혀 몸부림칠 것이다. 하지만 이때, 감정을 싹 빼고 "인간이란 원래 그런거야.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동물이지."라고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이 상황의 전지적 작가가 된 것처럼 차분해진다. 회사 안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모든 행태를 인간의 속성으로 생각하며 넘길 수 있다. 마치, 사자가 가젤을 잡아먹었다고 욕할 순 없는 것처럼. 사자는 원래 그래야 사는 동물이니까.

당신도 한번 시도해볼 텐가? 조금 삭막하지만 이 방법이 당신의 멘탈을 구원하리.

<싫다면서 하고 있어, 하하하> p. 75

청춘이 지나고 나서야 청춘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청춘 콘서트. 청춘 토크. 청춘 페스티벌. 청춘 백서. 청춘 어쩌구저쩌구. 정말 청춘이란 단어가 원래 이렇게 많이 쓰이는 단어였던가. 그러고 보면, 청춘이라는 단어는 진짜 청춘들이 쓰는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청춘의 싱그러움과 영롱함을 마케팅용으로 팔아야 하는 30대 이상의 어른들이 쓰는 말일 거라고 확신한다.(중략)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청춘에게 가능한 많이 실패해보라는 말 같은 건 그만했으면 좋겠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실패도 경험이라고? 그들의 실패라고 특별할 것도 없다. 실패는 청춘일 때도 아팠고, 청춘이 아닌 지금도 똑같이 아프다. 평생 실패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도 있는데 굳이 실패하기 위해 덤벼들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청춘이니까 하고 싶은 일을 하라든지, 놀러 가야 한다든지, 일을 그만둬도 된다든지 그런 말도 좀 안했으면 좋겠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청춘들의 인생을 책임져줄 게 아니라면 말이다. 청춘론을 말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가만 보면 다 기성세대 아닌가? 그들의 말을 믿고 따르다 골로 간 인생도 여럿 보았다.

어른들아! 제발 청춘들 좀 내버려두라고!

<싫다면서 하고 있어, 하하하> p. 108

자정 넘어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에게

바통 터치를 한다.

일 다 못 끝내고 넘겨서 미안해.

아니꼬우면 너도 모레의 나에게 넘기시든가.

<싫다면서 하고 있어, 하하하> p. 139

엘리베이터에 함께 타면 거울에 비치는 그 사람을 째려보는 것이다. 대놓고 째려볼 순 없으니까.

회사 복도에서 1:1로 마주쳤을 때 바닥이나 휴대폰을 보면서 인사하지 않고 지나가는 것이다.

못 봤다고 하면 그만이니까.

드러내지 않고 하는 나만의 복수! 나는 결국 해냈지만 상대방은 모르는 복수!

장점은 큰 화를 불러일으키니 않으면서 작은 쾌감을 얻는다는 것이고 단점은 아무래도 역시 좀...찌질하다는 것이다.

<싫다면서 하고 있어, 하하하> p. 215

육아서에도 보면 행복한 엄마가 행복한 아이를 만든다, 류의 이야기들이 참 많이 있다. 그만큼 '나'라는 존재가 주변에게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며 결국 내 주변의 모든 것이 나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내가 몸이 아프든 마음이 아프든 건강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그 어느 것도 즐겁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나부터, 나 먼저 챙기기에는 벅찬 사정들도 있다. 외벌이 아빠라서, 직장맘이라서 나보다는 내 가족을 먼저 생각하다보니 내가 망가지고 부서질 때까지 모른 척,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게 되는 경우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인생은 내가 없이는 돌아가지 않는다. 혼자서는 결코 온전히 '나'를 지키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 '나'를 지켜봐주는 '나의 아내', '나의 남편' '나의 가족' 그리고 '나의 친구'가 있어야 가능할 일일 것이다.

간절하지 않기 위해 꾸준히 합니다.

생각해보면, 내가 회사 생활이 불행하다고 느꼈던 이유는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이게 내 밥줄이다 보니 좀 더 잘하고 싶어서, 인정 받고 싶어서, 발전하고 싶어서 정작 나 자신을 챙길 시간은 하나도 없었다. 내 삶의 의미를 회사의 성과와 동일시했고, 회사 일이 내 인생의 전부였다. 회사에는 내가 전부가 아닌데도 말이다. 부끄럽지만 그렇다고 남들보다 뛰어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일을 쉬면서 홀로 깨달은 바 하나는, 일이 하나 틀어졌다고 해서 비참해하거나 침통할 이유도, 일에 목을 맬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회사는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간다. 하지만 내 인생은...내 인생은, 내가 없이는 돌아가지 않는다.

<싫다면서 하고 있어, 하하하> p. 251

언젠가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하고도 결국 돌아온 것이 이런저런 비난이었던 친구가 있었다. 다 잘하고 싶었고, 누구보다 열심이고 싶었지만 불특정 다수가 모인 관계에서 그녀가 한 일에 100% 칭찬이란 있을 수 없었고, 누군가 제기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결국은 의심만 잔뜩 짊어진 채 관계를 끊어야했다. 그런 일이 있기 훨씬 전부터 그녀에게 해줬던 말이 있었는데 '그렇게 너무 열심일 필요는 없다'는 말이었다. 사실 직장일이든, 부모로서의 일이든 모든 일에 100미터 달리기를 하듯 전력을 다할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그렇게 전력을 다하는 일은 오래하지 못한다. 이미 지쳐 나가 떨어지기 쉽다. 누구 보라고 하는 일은 더더욱 그렇다. 내 마음에 기꺼워서 나를 아껴가며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여야 오래 할 수 있다. 어제 읽기를 마친 <안나 카레니나>의 안나도 그랬다. 사랑에 운명을 걸었으니 외로울 수 밖에. 그렇게 모든 것을 거니까 외로울 수 밖에.

세상은 우리에게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말했듯이, 내 생각은 다르다. 아이러니하게도 진짜 원하는 것은 간절히 바라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너무 간절하면 부당함을 거절할 수 없게 되고, 고통을 참아내면 좋은 일이 올 거라고 맹신하게 된다. 오늘 행복해야 내일도 행복하다는 걸 잊고 오늘의 행복을 먼 훗날로 미룬다. 너무 간절하니까 냉철한 판단을 못해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많다. 뭐든지 적당히 여유를 갖고 거리를 두어야 지치지 않고 꾸준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용필의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사랑이 외로운 건 운명을 걸기 때문이지

모든 것을 거니까 외로운 거야

사랑도 이상도 모두를 요구하는 것

모두를 건다는 건 외로운 거야.

일과 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거니까 외롭고 불행한 거다.

<싫다면서 하고 있어, 하하하> p. 253

우리 아들이 대학교를 준비할 때 조금 더 열심히 하지 않는 아들이 아쉽고 안타까워서 한마디씩 할 때마다 남편이 한 말이 있다. '너랑 나 사이에서 나왔는데 쟤라고 뭐 다르겠냐?" 너랑 나, 의 의미는 우리 둘다 "응, 이 정도면 충분해! 딱 여기까지!" 하는 스타일이라는 뜻이다. 뭘 목숨걸고 이마에 흰띠 묶어가며 코피나게 열심히 해 본 적이 없다, 사실. 그랬더니 아들도 그랬다. 90점 정도는 맞아와야지, 하면 90점을 맞아왔다. A를 맞으려면 94점이 필요하니까 최소 94점은 맞아야해, 하면 94점을 맞아왔다. 어느 날은 약이 올라서 뭐라고 했더니 95점 맞아오라고 했으면 95점 맞아왔을텐데, 하는거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남들의 경쟁과는 상관없이 우리 안에 우리만의 목표점을 세우고 거기에 도달하려고 노력하고 대부분은 도달한다. 그래서 삶의 만족도가 꽤 높다. 특히 우리 아들의 삶의 만족도란 정말 부러울 정도다. 그럼 된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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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세트 - 전3권 펭귄클래식 안나 카레니나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윤새라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고전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도 읽지 않은 것이라고 했던가. 나도 안나 카레니나의 내용은 익히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첫 문장 중 하나인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라는 문장도 알고 있다. 완역펭귄 클래식 버전의 총 3권, 15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책을 읽으면서 초반에는 톨스토이가 러시아의 대문호가 맞는가에 대한 의구심마저 들었다. 그런데 재미와는 별개로 다 끝내고 보니 톨스토이라는 사람이 이 작품을 쓰고 싶었던 것은 시대에 대한 비판, 사교계의 위선과 거짓을 비판함과 동시에 자신의 사상을 정비하고 재정립하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의 범위는 제법 간소하다. 안나와 안나의 남편인 카레닌, 안나와 불같은 사랑에 빠지게 된 브론스키, 안나의 오빠인 오블론스키와 아내 돌리, 돌리의 여동생이자 브론스키를 좋아했던 키티, 오블론스키의 벗이자 키티를 흠모했던 레빈이 큰 줄거리를 담당하고 있는 주인공들이다.


이 작품에서 드라마를 담당하는 것이 안나와 브론스키의 이야기이고, 독자들에게는 농민과 귀족, 종교와 사상의 담론을 펼치는 레빈의 이야기보다는 격정적인 사랑에 빠져 남편과 아들을 버리고 심지어 애인의 아이를 출산한 안나의 이야기가 훨씬 더 깊게 남을 수 밖에 없다. 당시의 러시아는 '사교계'라는 이름의 이른바 만남의 장소가 있었는데 지금의 사고방식으로 보자면 이처럼 난잡할 수가 없다. 여자들은 손부채를 하나씩 부쳐가며 부채 아래로 이런저런 말들과 미소를 감추거나 거짓으로 꾸며내기도 하고, 남자들은 미혼이든 기혼이든 상관하지 않고 여자들을 희롱한다. 적당히 서로를 향해 희롱의 몸짓이나 말을 건네는 것은 '사교'라는 이름으로 무마할 수 있었고 여자는 그런 희롱을 받았다면 자부심을 가지고, 남자는 그런 것이 여자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렇기에 브론스키가 안나에게 적당히 빠져드는 것은 하등 문제가 될 것이 없었으나 안나와 브론스키가 서로에게 진심인 그 순간부터가 문제였다. 게다가 적당히 뒤로 즐기고 남편이 아내에게, 혹은 아내가 남편의 명예에 먹칠을 하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 된다면 그 또한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안나와 브론스키는 뒤에 숨고 싶지 않았고, 서로의 사랑에 당당하고 싶었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모욕을 견디기로 했다. 사교계의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모른 척, 아닌 척하지 않고 허위의 가면을 벗어버리고 싶었다.


왜 모두 내 문제게 간섭하려 드는 거지? 왜 나를 못살게 구는 거냐고? 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뭔가 있으니까 그러는 거겠지. 이게 평범하고 속된 사교계 치정이라면 날 가만 내버려 뒀을거야. 하지만 뭔가 다르고, 장난이 아니고, 이 여자가 내게는 목숨보다 중요하다는 걸 그들도 느끼는 거겠지. 그래서 이해가 안 되고 안타까울 테고. 우리 운명이 어떻든, 또 어떻게 되든 우리는 이미 일을 저질렀고 후회하지 않아.

<안나 카레니나1> 2부 p.583


톨스토이의 인생사를 되짚어보면 안나와 브론스키의 이야기를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수치심'이 아닐까 싶다. 앞서 말한대로 당시 러시아에서 사교계라는 이름으로 혹은 귀족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벌어들이는 돈보다도 훨씬 더 많은 빚을 지면서도 흥청망청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은 도무지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결혼한 상대를 두고도 사교계에 나가서 늘 농짓거리를 일삼았고, 정부를 두고 있었으며, 농사일은 알지도 못하면서 영지를 쥐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늘 굶주린 농부들과는 달리 배불리 먹었으며 노름을 하고 술을 마시고 외상으로 살았다. 그러면서도 수치심이라는 것을 몰랐다. 남편이 있는 여자와 사랑에 빠진 브론스키는 자신의 사랑에 크기와는 상관없이 어떤 혐오감에 시달렸는데 그것은 바로 수치심이라는 감정 때문이었을 것이고, 그것은 최소한 브론스키가 양심이라는 것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지도 모른다.


그와 안나를 이어주는 사랑은 순간의 불장난이 아니었다. 즐거웠다거나 불쾌했다는 기억 외에는 다른 흔적을 남기지 않으며 사라지는 사교계 연애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과 그녀가 처한 고통스러운 상황, 사교계에서 자신들의 사랑을 숨긴 채 거짓말하고 속이며 사람들 눈에 부각되면서 생기는 어려움을 속속들이 느끼고 있었다. (중략) 기만과 거짓이 필요한 순간 그녀가 수치스러워하던 모습도 또렷이 기억났다. 그 역시 안나와 관계를 맺기 시작한 때부터 가끔씩 이상한 감정을 경험했다. 바로 무언가에 대한 혐오감이었다. 그것이 카레닌을 향한 것인지, 자신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사교계 전체에 대한 것인지는 브론스키도 잘 알지 못했다.

<안나 카레니나1> 2부 p.584


그는 안나에 대한 사랑 외에 자신의 인생에 뭐가 있는지 급히 생각해 보았다. '명예욕? 세르푸홉스코이? 사교계? 궁정?' 모두 아니었다. 예전에는 의미가 있었으나 지금은 무의미해진 것들이었다.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프록코트를 벗고 허리띠를 푼 뒤 편히 숨을 쉬기 위해 털이 수북한 가슴팍을 드러내고 방 안을 오갔다. '이렇게 사람들이 미치는 거로구나' 그가 거듭 말했다. '이래서 자살을 하는 거구나..... 창피하지 않기 위해서.

<안나 카레니나2> 4부 p. 526


끝까지 동의하지는 못했고, 애정을 갖지도 못했으나 마지막 즈음에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안나. 그녀는 열일곱 나이에 스무살이나 많은 남자와 결혼했고, 어떤 감흥도 없이 아들 세료자를 낳고 무미건조하게 살고 있었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나이 '열일곱' 을 너무 어린 나이에 결혼했기에 아무것도 몰랐고 그래서 그 무미건조한 결혼생활이라는 것이 브론스키를 보고 사랑에 빠진 것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시절엔 그 나이에 다들 결혼을 했고, 비슷한 나이의 키티는 다른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지막까지 레빈을 향해 매력발산을 해보려했던 안나의 정신상태 등은 그녀를 이해하는데 큰 장애물이었다. 여하간 그녀는 자기 자신의 얼굴과 몸, 브론스키의 관심사에 대한 애정 등만이 브론스키와 자신을 연결지을 수 있는 모든 것이라 생각했고 그렇기에 점점 더 브론스키에게 집착하기에 이르렀다. 결국은 마음의 병이 심해진 것이리라. 그 당시에는 없던 이름이었겠지만 자신의 아이를 만날 수 없는 상태에서 혼외자 사이에서 낳은 딸을 돌봐야 하는 참담함에 산후우울증이 온 것일수도. 게다가 자기자신이 이미 사교계의 속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브론스키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투하면서 병이 더 깊어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래, 죽는 거야.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와 세료자의 수치와 굴욕, 나의 이 참담한 수치심, 이 모든 것이 죽음으로 구원될 거야. 죽으면 그이는 후회하고 불쌍히 여기면서, 사랑하고, 나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겠지.

<안나 카레니나2> 7부 p. 570


톨스토이와 가장 닮았다고 평가 받는 레빈이 이 작품의 어쩌면 안나보다도 더 큰 중심축일지도 모른다. 톨스토이 본인이 농촌생활에 열의를 가지고 농노들에게 교육이라든가 의료를 제공하고, 좋은 지주가 되려고 노력한 적도 있었으나 실패한 뒤 자신의 이상주의에 대해 실망하고는 상류사회의 사교계에서 방탕한 시절을 보냈다. 여자와 도박 등으로 무분별한 삶을 살던 그는 형 니콜라이가 복무하던 캅카스 전선으로 여행을 갔다가 농노가 없는 카자크들의 삶에 큰 관심을 갖게 되고 그들에 대한 글을 쓰면서 작가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작중의 레빈처럼 톨스토이도 서른넷에 친구의 딸인 18살 소피아와 결혼하게 되었고, 그녀의 모습을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에 투영시켰다고 한다.


자네는 귀족주의라고 하네만 내가 물어보겠네. 브론스키나 그 누구든 귀족주의라는 것이 대체 뭔가? 나를 모욕 줄 수 있는 그 귀족주의라는 것이 뭐냐고? 자네는 브론스키가 귀족이고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는군.

<안나 카레니나1> 2부 p. 549


학교는 못 돕습니다. 농민들을 도울 수 있는 건 그들이 더 부유해지고 여가도 많이 누리게 해줄 경제 구조입니다. 그때가 되면 학교도 생길 거고요.

<안나 카레니나2> 3부 p.296


그렇지만 자네는 양심적인 노동과 비양심적인 노동의 차이를 설명하지 않았네. 그러면, 사무장이 나보다 업무를 더 잘 알고 있는데도 그 사람보다 내가 더 많은 봉급을 받는 건 어떤가? 비양심적인 건가?

<안나 카레니나3> 6부 p. 116


"그래, 그런거야, 친구. 둘 중 하나야. 현재 사회 구조가 정당하다고 인정하는 걸세. 그러면서 자기 권리를 지키는 거지. 아니면 나처럼 부당한 특권을 이용하는 거야, 기꺼이."

"아니, 그게 부당한 거라면 자네는 그 특권을 기꺼이 취할 수 없을 걸세. 적어도 난 그렇게 못하네. 나한테 중요한 건 내가 잘못하고 있지 않다는 자각이야."

<안나 카레니나2> 6부 p. 122


레빈이 키티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농촌생활에서 안정감을 찾았으면서도 늘 완벽하게 행복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는 것은 자기 존재의 목적, 인생의 의미에 대한 물음 때문이었고, 도덕적으로 스스로가 완벽한가에 대한 고통이 뒤따랐기 때문이었다. 다들 종교를 가지고 있었지만 레빈은 자신이 무신론자라고 생각했었고, 종교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티가 분만하던 순간에는 누군지 모를 누군가를 향해 간절히 기도하게 되었고, 그 간절함이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작중에서는 키티가 레빈과의 모스크바에서의 삶이 레빈에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간파하고 함께 시골로 돌아가 생활하게 되는데, 톨스토이의 실제 삶은 그렇지 못했다. 톨스토이는 종교와 일치하는 삶에 대해 열정을 느꼈고, 그로 인해 자신의 재산과 영지를 포기하고 농촌으로 돌아가서 농부처럼 사는 금욕의 삶을 택했지만 부인인 소피아는 평생을 귀족으로 살던 삶이었기에 톨스토이와 불화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왜 농부가 더 일을 많이 하는데 내가 농부보다 더 호화롭게 사는가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수치심'을 알았던 톨스토이. 아마도 이 작품을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라고 한다면 나는 단언코 위아래가 없는, 귀족이든 아니든, 부를 가졌든 그렇지 못하든 그저 하나의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라고 하겠다.


내가 대체 무엇인지, 또 왜 여기 있는지 알지 못한다면 살 수가 없다. 그런데 그걸 알 방법도 없으니 결론적으로 살아갈 수가 없다는 말이다.

<안나 카레니나2> 8부 p. 698


만약 선(善)에 원인이 있다면 이미 선이 아니다. 그 결과 보상을 받게 된다면 그 역시 선이 아니다. 따라서 선은 인과관계를 초월한다. 나는 그걸 알고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동안 아는 기적을 찾아 헤매면서 확신을 줄 기적을 보지 못해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이게 기적이다. 유일하게 가능한, 늘 항구적으로 존재하는, 사방에서 나를 에워싸고 있는, 다만 그걸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다! 이보다 더 큰 기적이 있을 수 있을까?

<안나 카레니나2> 8부 p. 719


계속해서 나는 마부 이반에게 화를 내고, 계속해서 논쟁하고, 느닷없이 내 생각을 말할 것이다. 내 마음의 가장 고결한 부분과 다른 사람들 (아내까지도 포함해서) 사이에는 계속해서 벽이 존재할 테고, 계속해서 나 자신의 공포를 이유로 아내를 힐난하고 그렇게 한 걸 휴회할 것이고, 내가 외 기도하는지 이성으로는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기도를 하겠지. 그러나 내 삶은 이제, 내 삶 전체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와 상관없이, 매 순간이 예전처럼 무의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선(善)이라는 확실한 의미를 지닌다. 나는 삶에 그것을 불어넣을 힘이 있다!

<안나 카레니나2> 8부 p. 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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