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마지막 밤 민음사 모던 클래식 33
로랑 고데 지음, 이현희 옮김 / 민음사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내 이름은 피포 데 니티스, 나는 1980년에 죽었다."

<세상의 마지막 밤> 내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p. 49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자식을 먼저 앞세우고 그 슬픔과 비탄에 가정을 깨뜨리곤 한다. 돌아오지 못할 길을 건넌 자식을 향한 그리움은 누군가에 대한 비난으로 바뀌기 쉽고 그 비난은 종종 배우자인 경우가 많다. 왜 조금 일찍 나가서 아이를 마중하지 않았는지, 왜 차길을 건너며 아이의 손을 더 꽉 붙잡지 않았는지, 왜 아이가 혼자 노는 곳에 시선을 두지 않았는지, 왜왜왜왜왜!!! 비난을 하지 않더라도 누군가 정신을 잃을 정도로, 일상을 저버릴 정도로 비탄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면 그 또한 가정을 깨는 원인이 된다. 산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먼저 정신을 차린 이가 말할 수 있다. 그럼 상대는 어떻게 벌써 그 아이를 잊을 수 있는지에 대해 분노의 지경에 다다르게 된다. 이런 일은 세상에 비일비재하기에 이러한 이야기를 소재로 한 영화와 소설등도 세상에 널렸다. 비슷한 류의 많은 창작물을 봐왔지만 이 작품과도 같은 전개는 처음인 것만 같았다.

2020년의 더운 여름날 필리포 스칼파로 데 니티스라 불리는 사나이가 자신의 직장으로 출근을 한다. 그는 누구에게나 적절한 환상적인 커피를 만드는 사람이고, 오늘은 그 일을 하는 마지막 날이다. 그는 오랜시간 공을 들여 자리를 잡았고, 마침내 그가 원하는 사람, 토토 쿨라초가 커피를 주문할 때를 기다렸다. 그를 위한 커피를 만드는 대신 그의 목에 칼날을 들이밀 그 날을. 꼬마 피포는 1980년 6월, 아버지 마테오 데 니티스의 손에 잡혀 포르첼라 거리를 뛰다시피 걷고 있었다. 일찍 출근해야 하는 어머니 줄리아나 대신 피포를 학교에 데려다 주기로 한 마테오는 끝도 없는 차량의 행렬에 더 이상 차를 타고 가기를 포기하고 지친 피포를 다그쳐가며 지각하지 않기 위해 애를 쓸 뿐이었다. 5분만 쉬고 싶다고, 신발끈이 풀렸다고, 아빠가 잡아당기는 손이 너무 아프다고 붉어진 볼을 하고 마침내 피포가 울음을 터뜨렸을 때조차 서두르라는 성난 말투를 내질렀을 그 때 그 거리에서 공포의 총소리가 들렸고 작은 피포의 몸은 축 늘어져버렸다. 그렇게 피포는 죽었다. 지각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화를 내던 아버지 곁에서 두 사람은 그렇게 헤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아들을 잃은 아비는 밤마다 아들의 울던 얼굴이 꿈에 나타났고, 그래서 자신의 택시로 밤거리만을 헤매고 돌아다녔다. 아내인 줄리아나는 차마 아들의 무덤에 가지도 못했다. 그것이 사실이라는 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에. 자식을 잃은 어미의 심정을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라는 표현들을 자주 본다. 아마도 그 심정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이 작품 속 줄리아나의 그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강력했다. 어쩌면 문학작품에서조차 아, 이 정도의 감정표현은 너무한가 싶어서 자제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면 이 작품에서의 표현은 보자마자 그래 내가 자식을 이렇게 갑작스럽게 허망하게 잃었다면 이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은 모두 잿빛 얼굴에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가족, 친구, 동네 상인들, 모두. 차가운 분노가 그녀 안에서 치밀었다. 전부 불사르고 전부 뽑아 버릴 수 있는 분노, 체념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중의 어미가 품은 분노. 그녀는 거기, 아무도 없는 곳을 향해서 새들만이 듣고 있는 이 시간에 입을 열었다. 그것은 줄리아나의 첫번째 저주였다.

"나는 당신들 모두를 저주한다. 세상을 추하게 만든 건 당신들이기 떄문이지. 당신들은 나를 둘러싸고 호들갑을 떨고 달콤한 말들로 나를 감싸 안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어. 나는 내 아들의 관을 안도감과 함께 운반했던 이 공동묘지의 인부들을 저주한다. 그자들은 내심 관이 가벼워서 덜 피곤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니까. (중략)그리고 나는 친구들과 그들의 진지한 울음을 저주한다. 나의 것이 아닌 모든 고통을 나는 경멸하고 짓밟는다. 지금 이 숙낙ㄴ, 이 세상에는 어미의 눈물만을 위한 자리가 있을 뿐이다. 나머지는 전부 외설이다. 어이없는 말만 건네던 신부여, 입을 다물든가 진실을 말하라.(중략)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으므로 나는 다시는 여기에 오지 않겠다. 피포는 여기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는 으레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으면서 나를 둘러싸고 울던 모든 사람들을 나는 저주한다. 나는, 나는 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한다. 피포는 여기 없다."

<세상의 마지막 밤> p.66

그리고 줄리아나는 결연히 마테오에게 말한다. 피포를 데려오라고. 그럴 수 없다면 피포를 죽인 놈이라도 데려오라고. 그를 죽이고 돌아온다면 마테오에게 묻은 핏자국을 빨아주며 기쁨을 느낄 수 있을거라고. 하지만 마테오는 형사를 통해 찾아낸 피포의 살인범을 마주하고도 총을 쏘지 못했고 그렇게 줄리아나는 마테오 향해 두번째 저주를 퍼붓고는 그를 버리고 떠나갔다. 그녀는 자신이 일하던 호텔에 머무르며 온갖 성당의 담벼락 구멍마다 자신의 기원이 담긴 쪽지를 꽂아넣기 시작했다.

아들을 돌려 주십시오.

아들이 돌아오는 날이 가까워지게 해 주십시오.

피도, 장례식도 모두 없던 일로 해 주십시오.

저는 아들을 기다립니다.

저를 죽은 자의 어미로 만들지 마소서.

피포를 제게 돌려주시거나 세상을 불태워주소서.

내 아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저는 당신을 저주할 것입니다.

온 나폴리가 입가에 똑같은 이름을 떠올릴 수 있도록. 피포. 피포. 피포. 피포.

<세상의 마지막 밤> 슬픔에 잠긴 어머니의 쪽지 p.137

그러나 그녀의 기원이 담긴 쪽지 어느 것에도 답은 없었고, 그러자 줄리아나는 성당을 향해 세번째 저주를 시작했고, 그녀의 기원이 담긴 쪽지를 두고 주님을 욕보였다며, 미신을 부끄러워 하라는 신부의 발치에 침을 뱉고 주님이 자신에게 용서를 구할 날만을 기다린다며 소리를 지른 채 나폴리를 버리고, 아이를 위한 기억을, 마테오를, 자기 자신을 버렸다.

"내 이름은 줄리아나 마스케로니. 나는 아무 일도 겪지 않았다. 나는 우리 부모님의 딸이다. 그밖에 아무것도 아니지. 그리고 나는 내가 태어난 곳에서 죽기 위해 여기 다시 왔다."

<세상의 마지막 밤> p.147

잠들지 못하는 밤들이 수도없이 지나가던 어느날 마테오는 성당에 가려던 그레이스를 만나 가리발도 카페에 가게 되고, 그곳에서 지옥으로 향하는 문을 알고 있다는 교수와 세상에 손가락질 당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고해를 받아주는 마체로티 신부를 알게 된다. 교수는 말한다. 오늘날의 세상이 너무나도 이성적이고 건조해서 인식하고 있지 못할 뿐이지 산 자와 죽은 자들의 경계는 모호하고 어느 부분 서로 포개져 있다고. 그리고 그 경계를 찾아가면 죽은 자들의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그래서 마테오는 줄리아나를 위해, 그리고 그렇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전하지 못한 채 심지어 어이없는 분노에 갇힌 채 죽은 자의 세상으로 떠나가버린 피포를 위해 그 길을 가야겠다고 생각한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마체로티 신부가 그 길을 함께하기로 한다. 이 이야기는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가 뱀에 물려 죽자 저승까지 내려가 음악으로 저승의 신들을 감동시켜 그녀를 다시 지상으로 데려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낸 오르페우스의 신화를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마테오가 마체로티 신부와 함께 저승으로 발을 디딘 그 순간부터는 단테의 <신곡-저승편>이나 <신과 함께>를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온갖 역경을 딛고 마침내 어린 피포의 영혼을 찾아내는 마테오, 그리고 피포의 영혼을 가슴에 품은 채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선 마테오, 하지만 세상은 늘 그렇듯 모든 것을 그렇게 쉽게 내주지 않는다. 이제 마테오는 피포의 영혼을 이승으로 보내는 대신 저승에 남아야 할 운명이 되었다.

"승리는 없다. 좋다. 나는 나폴리의 파체 골목과 포르첼라 거리 모퉁이에 있다. 그 저주받은 날에. 나는 내 아들의 손을 잡았고, 빗나간 총알을 맞은 것은 바로 나다. 이렇게 생갹해야만 한다. 나는 아들 대신 죽기를 수없이 갈망했다. 그리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나는 파체 골목 인도에 있고, 아들을 대신해서 죽는다. 햇빛을 가득 머금은, 행인들의 겁에 질린 비명 한가운데에서. 그래, 나는 이 바보 같은 죽음을 모독하지만 내 아들보다는 차라리 나를 후려친 운명에 감사한다."

<세상의 마지막 밤> p. 236

그렇게 1980년에 죽었던 피포는 어머니 줄리아나의 저주에 힘입고 아버지 마테오의 희생으로 다시 살아나 그레이스의 손에 키워지고, 가리발도에 의해 커피를 배우며 교수와 마티첼로 신부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토토 쿨라초에게 복수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피포는 어머니를 찾아간다. 마침내 자신의 젖가슴을 도려내고 자신을 놓아버린채 고통의 병원에서 스스로를 공포와 불면에 가두어버린 어머니 줄리아나를 찾아간다. 아버지 마테오의 영혼을 가슴에 품은 채. 가장 하드보일드한 가족사랑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저주가 난무하고 복수의 피가 흩날리며 지옥의 문앞이 아니라 이승에서 저승까지를 왕복하는 이야기. 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도 매혹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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