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과 바다 - 바다에서 만들어진 근대
주경철 지음 / 산처럼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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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역사서를 찾기 어렵다. 사람들이 역사서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를 생생하게 꾸미려다 보면 과장이 개입되고, 저자의 상상과 사료가 뒤범벅이 되어 소설처럼 되어 버린다. 애초에 치밀한 사료연구에 상상력이 가미되어 있을 법한 상황을 복원하고 삶의 진실을 담아낸다면 좋은 역사소설이 되겠지만, 시장에서 돌아다니는 책의 상당수는 사실을 담은 역사서도, 진실을 담은 소설도 되지 못하였다.

주경철 교수의 글이 그래서 소중하다. 주경철 교수는 어떤 대상을 세밀하게 복원해 내면서도 과장과 거짓을 섞지 않는다. 저자 자신을 높이려는 시도를 하지 않기에 문체가 과장되지 않으며, 시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시야를 넓혔다 좁혔다 반복하기 때문에 매우 흥미롭다. 해석상 사견을 밝히기를 주저하지는 않지만, 다른 견해의 논거까지도 역시 상세히 소개하기 때문에 폭력적이지 않다.

'문명과 바다'는 같은 저자의 '대항해시대'를 읽기에 앞서 예열하는 기분으로 읽어도 좋겠으나, '문명과 바다' 역시 한 권의 완결된 책이어서, 이를 읽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


인상적인 부분

우리나라에서도 화교들이 꽤 심한 압박을 받아서 기를 못 펴고 살았다고 알려져 있고,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에서는 최근까지도 종종 화교에 대한 약탈과 학살이 벌어지곤 했다. (39쪽) ; 근대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화교에 대한 테러에 대해서는 박노자 등도 소개하고 있다. 주경철의 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동아시아에서 화교에 대한 테러, 나아가 다른 민족 공동체에 대한 테러가 빈번한 일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다른 민족공동체에 대해서는 어떠했는지, 그것이 '근대'의 특징인지 아니면 인간의 본성에 해당하는 부분인지는 더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 쪽이 14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도 결국 알아내지 못한 것들을 단 하루 만에 모조리 파악해내는 일본 관리의 능력이 실로 인상적이다. 사실 이것은 어느 한 관리의 능력 문제가 아니라 그 국가와 사회의 '시스템'의 문제이다. (58-59쪽) ; 우리는 일본과 한국의 개항이 불과 십몇 년 차이에 불과하다고 착각할 때가 많다. 그러나 사실, 17세기에 우리가 하지 못한 많은 것들을 일본은 하고 있었다. 그들은 세계와 '무역'을 하고 있었다. 그 차이는 거의 이백 년이 넘는다. 일본이 세계와 소통을 하는 동안 우리가 그로부터 고립된 이유가 무엇인지는 더 연구해 보아야 하겠지만, 이제 세계와 완전히 열려 마음껏 교류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지금, 우리가 어떤 열린 마음으로 세계와 교류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실 해외팽창은 모험 성격이 큰 사업이다. 이미 다른 분야에서 튼튼한 사업기반을 갖추고 있는 상인들로서는 성공 여부가 불투명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해외 탐험을 먼저 나서서 할 이유가 없었다. (중략) 근대 초의 과감한 해외 팽창사업처럼 시대의 한계를 돌파하는 원동력은 대개 중심권보다는 변경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83쪽) ; 근대세계체제에서 우리나라는 주변부에 있"었"다. 지금은 중심에 있다고 볼 수 있을까? 그런데, 세계화시대에 이제 세계체제 속에서 중심인지 주변부인지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 지금 우리나라가 중심에 있지 않다고 해서 과연 우리가 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우리가 주변부에 있기 때문에 중심에 있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볼 수 있지는 않을까?

무슨 일을 하든지 다른 이들이 보기에 올바른 일이어야 할 뿐 아니라, 우선 자기 스스로 정의로운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중략) 하느님의 뜻을 세계 만방에 펴는 이 거룩한 일은 무력으로 밀어붙여서 될 일이 아니며, 종교적으로나 법률적으로나 정의로운 일이어야 한다. 이럴진대 신대륙 지배가 하느님의 섭리에 따르는 일이라는 정당성의 확보는 결코 부차적인 사안이 아니었다. (113쪽) ; 우리나라는 세계 초강대국이 아니며, G2니, G7이니 하는 모임에 끼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나라라는 것은 지나친 자기비하이다. 이를 돌파하기 위해 우리가 시급히 해야 할 일은, 초강대국의 자기정당화 논리를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존과 이익을 지키는 가장 효과적인 논리는 상대방을 스스로 모순에 빠뜨리는 것이다.

교과서 상으로는 '에스파냐령 아메리카', '프랑스 식민지'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또 지도상에 광범위한 지역을 그런 식으로 표시하지만 사실 그것은 왜곡된 표현이다. (120쪽) ; 마찬가지로 지도상에 광범하게 색칠한 '한나라의 영토', '당나라의 영토', '원나라의 영토', 그리고 '고조선의 영토', '고구려의 영토' 모두 왜곡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그 지역에서 과연 지금 우리가 행사하는 것과 같이 공권력을 행사했을까? 골목마다 파출소를 설치하여 치안을 유지하고, 인구조사를 통해 국민들을 장악하고, 조세를 징수하였을까?

해적을 멋있게 그리는 것은 오늘날 갱스터 영화에서 깡패들을 낭만적으로 그리는 것과 같다. (181쪽) ; 절묘한 비유이다.

아프리카 사회에서는 대서양 노예무역이 시작되기 이전에 우선 자체 안에 노예제가 광범위하게 존재했다. (186쪽) ;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이다.

은행은 은을 취급하는 점포라는 뜻이 된다. (중략) 중국에서 오랫동안 은이 중심화폐 역할을 해왔으므로 우리 말에 '은행'이라는 말이 쓰이게 된 것 (236쪽) ; 얼마 전에 아는 이가 은행이 왜 '은'행이라고 물은 적이 있었는데, 적절한 대답이 될 것이다.

18세기에 들어서는 조선의 인삼 수출을 저해한 두 가지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첫째, 일본이 국가정책으로 삼을 자체 재배하기 시작했다. (중략) 둘째, 1720년경에 북아메리카에서 산삼이 발견됐다. (중략) 고려인삼에 비해 값이 5분의 1에 불과한 아메리카 산삼이 들어오자 인삼 가격이 폭락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254쪽) ; 1720년경이라면 우리 나라에서는 숙종~영조 시대이다. 이 당시 개성상인들은 그 존재조차 알기 어려웠을 아메리카에서 산삼이 발견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들의 수입이 감소하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카우리 조개는 작고, 형태가 단일하고, 상대적으로 희귀하므로 화폐 재료로서의 특징들을 다 갖추고 있다. 게다가 모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장점도 있다. (중략) 카우리는 원시적인 화폐라는 느낌을 주기 쉽고 또 이에 대해 현재 아프리카에서는 부끄러운 과거의 잔재로 기억되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 역사적으로 이는 결코 원시화폐가 아니었다. (261쪽-263쪽); 우리가 어릴 때 보던 책에서 과거에는 '조개껍데기'를 화폐로 사용하였다고 하였을 때, 이는 우리가 먹다 버린 흔한 조개껍데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식의 구체성이 절실하다.

냉장시설이 없는 상황에서 변질된 고기의 상한 맛을 숨기기 위해서 강한 향신료가 필요했다는 과거의 설명은 이제 부정됐다. (중략) 후추를 그토록 열정적으로 찾은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바로 매운 맛 자체를 즐겼기 때문이다. (273쪽) ; 오늘의 기준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우리가 고추장에 고추를 찍어먹는 것을 보며 기겁하는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있다. 엄청난 양의 소금을 뿌린 김치를 먹는다는 사실이 이백 년 후에는 기이한 풍속으로 깅록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 품질좋은 통배추가 널리 보급된 것은 대체로 1800년 이후의 일이다. (중략) 배추김치는 그야말로 근대세계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276쪽) ; 우리는 500년에 걸친 '조선'이라는 사회를 기술적으로 정체된 시대였다고 착각하기 쉽다. 때문에 '조선' 시대에 있었던 것이라면, 그것이 1400년이든 1900년이든 우리의 '전통'이었다고 단정짓기도 쉽다. 당장 '배추김치'만 하더라도,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은 맛보지 못했던 음식이란 말이다.

1582년(덴쇼天正 10)년에 다른 신자들과 힘을 합쳐서 10대 초반의 소년들을 로마 교황에게 파견하기도 했다. 8년 반에 걸쳐 유럽을 여행한 이 소년사절을 천정견구소년사절天正遣歐少年使節이라 한다. (344쪽) ;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에 일본은 10대 초반의 소년들을 유럽에 파견하였다.

최근에 많이 회자되는 앞의 연설문은 인디언들의 심성이 아니라 현대 환경론자들의 염원을 나타내는 가짜 문서이다. 실제로 인디언들이 자연에 대해 어떤 체계적이고 명백한 관념을 만들어가지고 있었는지도 불확실하다. (370쪽) ; 시애틀 추장의 이 연설문은 우리 나라에서도 회자되고 있다. 그 글이 오늘날의 입장에서 감동적이기는 하지만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거리의 지식이 횡행하는 이 때, 사실의 옥석을 가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유럽에서 숲이 사라져가면서 생겨난 특기할 만한 현상 중의 하나가 먼 이국의 숲이 우거진 섬을 이상적인 낙원으로 상정하는 낭만주의 경향이다. (376쪽) ; 때로는 타자에 대한 지나친 동경도 몰이해와 자기중심적 사고의 산물이다.

서구중심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단순히 서구 문명에 대한 비난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또 핍박받는 사람들에 대한 애틋한 동정만으로 우리의 의무를 다하는 것도 아니다. (중략) 우리 앞에 펼쳐질 지구촌의 미래는 기계적으로 정해진 길을 좇아가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와 우리 후손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397쪽-398쪽) ; 새겨두자.


사소한 시비

끈 덜어진 연처럼 (40쪽) -> 끈 떨어진 연처럼

"다른 어느 인도 사람들보다도 오만한 인간 이란인들이 (50쪽) -> "다른 어느 인도 사람들보다도 오만한 인간 이란인"들이

오른쪽 사진은 세계의 키우리 조개들이다. (260쪽) -> 오른쪽 사진은 세계의 카우리 조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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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처럼 2011-06-15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산처럼 출판사입니다.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희 출판사 홈페이지에 리뷰를 담아가려 합니다. 혹시 원하지 않으신다면 sanbooks@paran.com으로 메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저희 홈페이지는 www.sanbooks.com입니다.

overmask 2011-06-19 04:27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불만 없습니다.
 
경제개발의 길목에서 - 芝巖 남덕우 회고록
남덕우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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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공부가 잘 되어 있고 자기 일에 제대로 몰두한 사람의 회고록은 밋밋하다거나 단조롭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다. 사실 잘 꾸며 보자면 대하장편소설보다 더 박진감 넘치는 사건들을 겪어왔음에도, 그들에게 그 사건들은 열심히 살다 보니 지나치게 된 일일 뿐이고, 그들의 눈은 언제나 다음, 내일을 향해 있다. 자기의 일을 꾸미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면 일로 성공하기 힘든 것도 한 이유가 될 것이다. 

남덕우의 회고록이 그렇다. 해방 후 격동의 반세기를 누구보다 많은 영향력을 갖는 자리에서 보내 왔음에도, 그의 필체는 담담하다. 대신 어려웠던 과제를 달성한 일을 소개할 때에는 반드시 자기와 함께 일한 사람을 소개하면서 마무리한다. 흔히 '人福'이라고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바로 그 사람의 힘임을 생각하면, 그러한 인복을 누린 사람 자신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제학을 공부하는 사람이었던 남덕우를 일약 장관으로 발탁하고, 부총리로, 경제특보로 쓴 것이 박정희였다. 국제적으로 무명에 가까운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자 국제사회의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 전 정권에서 일했던 남덕우를 국무총리에 임명한다. 여기까지의 남덕우의 일생은 박정희와 오버랩되어 있다. 그의 공이 곧 박정희의 공이고, 박정희의 공이 곧 그의 공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이후이다. 국무총리에서 퇴임한 1982년 이후 2010년 현재까지 남덕우는 '활동'하고 있다. 박정희와 오버랩된 인생보다 그 이후의 인생이 더 길고, 그는 어디에선가 대한민국을 위해 여전히 일하고 있다. 한국무역협회 회장으로 일을 시작할 무렵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화폐경제를 다루는 재무부와 경제기획원을 경험했으나 실물경제를 다루는 상공부를 경험하지 못했는데, 이제 통상 업무를 경험하게 되었으니 해볼 만한 자리라고 느껴졌다."(258쪽) 

각자에게 주어진 삶을 사는 방법은 다양하다. 누군가는 삶을 낭비하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열심히 살고 있을 것이다. 여기 누구보다 열심히 자신의 인생을 살면서 공동체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아 살아온 사람의 삶이 있다.  

인상적인 부분 

출정식에 앞서 학생들에게 막걸리를 퍼 먹인 다음, 연사가 나와 피가 끓는 선동연설을 했다. 그날 연사로 나온 이가 정지용鄭芝溶 시인이었는데, 그는 왜 남한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필요한지를 설명하고 이 기회에 반드시 민족통일을 이룩해야 한다는 것을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내가 듣기에도 명강의라고 느껴졌다. (27쪽) ; 정지용 시인은 남한에서 한동안 금지된 시인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왜 금지되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을 못 했다. 시간이 흘러 서정주를 시로만 이야기하듯, 정지용도 시로만 이야기할 수 있기를, 그렇게 되어 있기를, 혹은 그 역도, 그렇게 현대사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도록, 현재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 가야 하리라고, 생각해 본다. 

군들이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반대하는 것은 군들의 자유다. (중략) 나는 예정대로 강의를 할 터이니 출석하든 안 하든 그것은 군들 자신의 책임하에 선택할 문제이다. 나는 출석하지 않아서 시험에 패스하지 못한 학생에게 학점을 줄 생각도 없고 권한도 없다. (48쪽) ; 정답에 가깝다. 

1962년의 화폐개혁이 아주 단순한 경제이론을 무시했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중략) 이 실패한 화폐개혁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사람은 서울의 모 대학에서 후진국 종속론을 강의해 학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던 교수로 알려졌다. (52쪽-53쪽) ; 전체 회고록에서 아마 유일하게 인신을 공격한 예인 것 같다. 젊은 시절의 분노는 쉽게 잊혀지지 않으리니. 

난생처음 청와대로 갔다. 비서의 안내를 받아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을 때 우선 그 방의 검소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59쪽) ; 대통령에게 보고를 끝내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청와대를 나오면서 앞으로 이런 지도자에게 기대고 싶은 심정이었다. (73쪽) ; 박 대통령은 언제나 남의 말을 진지하게 듣는 분이었다. (77쪽) ; 듣고 보니 박 대통령의 통찰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131쪽) ; 사람의 마음을 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만약 국제통화기금IMF이 이 조치를 문제 삼아 재정 안정 계획을 완전히 파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할까? 생각 끝에 사전에 IMF의 양해를 구하기로 했다. 이용만 이재국장을 대동하고 워싱턴으로 건너가서 장관 체면의 손상을 무릅쓰고 IMF의 한국 담당관에게 이 비밀 계획을 털어놓았다. (90쪽) ; 국가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기의 자존심이나 체면쯤은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자기를 높이려는 것을 국가를 높이는 것으로 포장해서 결국에 국민을 해롭게 하는 이들이 많다.  

경제기획원EPB은 이에 고무되어 1976년 '하반기 경제 전망 및 대책'을 수립해 경제성장률을 대폭 상향 조정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큰 실수였다. (170쪽) ; 실수가 실수인 것을 알아야 반복이 없다. 실수를 말할 때에는 치장하려 해서는 안 되고 그냥 실수였다고 말하고 그 실수를 범하게 된 원인을 밝히면 된다, 는 것을 가르쳐 준다.

당시 판사나 검사들은 대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서 등용문을 바라보고 열심히 법률 공부를 해서 고등고시에 합격한 준재俊材들이다. 그런데 사법부에는 외국에서 학위를 받거나 공부한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 특이한 현상이었다. 그래서인지 경제 현상을 다루는 것을 보면 경제와 기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국제 감각이 없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223쪽-224쪽) ; 요즘의 판사나 검사들은 대체로 중산층 이상의 집에서 태어났으며 열심히 법률 공부를 해서 사법시험에 합격한 준재들이다. 외국에서 학위를 받은 사람은 별로 없지만 공부 또는 여행 목적으로 외국에 다녀온 사람도 꽤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경제나 기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국제 감각이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그렇다면 판사나 검사들의 양성 내지는 재교육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그것이 문제라는 것 자체를 그 구성원들 스스로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품을 표현하는 말로 白晳精桿이라는 말이 있는데, 김재익을 보자 나는 이 문구가 생각났다. 얼굴이 희고 몸매가 날씬한 그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정신과 사고가 매우 맑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252쪽) ; 사람이 사람에게 반한다는 것. 

브레진스키 박사가 입을 열었다. 그는 "나는 한국의 방침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한국은 북한의 핵화를 반대하는 동시에 북한의 핵화를 저지하려는 미국의 방침에도 반대하고 있다. (중략) 한국은 위험을 무릅쓰고 지켜야 할 가치가 없는 것이냐? (364쪽) ; 일본 역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대한민국이나 일본이나 미국의 군사력 하에서 실질적으로 자국의 피를 흘리지 않고 평화를 구가하고 있다. 피를 흘려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미국을 상대로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지켜야 할 가치를 위해서 스스로 긴장하지 않는 나라는 스스로 긴장한 나라에게 당당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이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기꺼이 감수할 위험이 어느 수준까지인지, 그리고 우리가 양보할 수 있는 선은 어디까지인지 정하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사소한 시비 

한국은행에 취직이 되고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자 나는 1954년 9월에 대학에서 만난 여자친구 최혜숙과 결혼했다. (36쪽) ; 1951년 3월에 서울이 다시 수복되었고, 나는 아내와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중략) 1953년 장남이 태어나기도 했다. (37쪽) ; 36쪽의 연도가 잘못 되었을 것이다. editor의 실수. 

자조가自助 있어야(132쪽) ; "자조自助가 있어야"의 잘못. 역시 editor의 실수 

호텔 경영을 말게(268쪽) ; "호텔 경영을 맡게"의 잘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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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교양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디트리히 슈바니츠 지음, 인성기 옮김 / 들녘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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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 시절에 인성기 선생께 독일어를 배웠던 적이 있다. 언젠가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이제 막 책을 번역해서 출간했다며 소개하신 책이 바로 이 책이다. 그리로부터 한두 해가 지나서 이 책을 샀고, 다시 그로부터 몇 년이 더 지나서야 이 책을 읽었다. 인성기 선생님은 이 책의 저자와는 달리 사람을 밀어붙이는 타입은 아니셨고, 때문에 이 책이 얼마나 좋은 책인지에 대해 적극 광고하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면 당신이 번역을 했다고 수업시간에 소개했다는 것만으로도, 그에 앞서 이 두꺼운 책을 꼼꼼하게 번역한 것만으로도 이 책이 얼마나 좋은 책인지, 그리고 얼마나 우리들이 이 책을 바라시는지 어필한 것인데도, 둔한, 변명하자면 아직 어렸던 학생은 그 뜻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책은 어떤 의미에서 입문서의 역할을 한다. 무엇에 대한? 文史哲이라고 불러도 좋고 인문학이라고 불러도 좋고 교양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하지만 101류의 실용적인 정보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이 책은 실용적인 정보를 담고 있는 교양 입문서이다."라는 문장은, 이 책의 표현을 빌자면 "패러독스의 문장"(608쪽)에 해당할 것이다. 대신 저자는, 교양인이 된다는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거나 쉬운 것이 아니며, 어려운 것은 어렵게 대해야 함을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그렇다면 이 책의 '효용'은 전혀 없는 것인가? 그 시간에 그냥 톨스토이를 읽고, 그냥 칸트를 읽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솔직히 대학을 졸업한 나도 어느 책을 어느 순서로 읽어야 할지를 생각하자면, 먹먹해질 때가 많다. 이 책은 정말 친절하게(!) 어느 책을 읽어야 할지를 알려준다. 그리고 더 친절하게(!) 그 책을 읽는 자세를 잡아준다. 어디에 그런 부분이 나와 있느냐고? 이 책이 온 몸으로 그렇게 말해주고 있다.

번역본은 본문만 칠백 쪽에 육박한다. 하루에 열 페이지씩 읽는다면 두 달 걸릴 분량이다. 두 달이라니, 평생을 교양인으로 살 수 있는 자세를 잡아주는데 두 달이라니 솔직히 거저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제법 많이 팔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의외로 이 책을 완독한 사람이 많은 것 같지는 않다. 심지어 이 책의 "추천의 글"을 쓴 유시민 씨도 이 책을 읽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그의 독서능력에 심각한 장애가 있다고 볼 수밖에. 그는 "2부 곳곳에서 드러나는바, 자칭 교양인들의 허위의식에 대한 점잖은 풍자와 야유는 감칠맛이 날뿐더러 한국 사회에 그대로 적용해도 되겠다는 공감을 불러일으킨다"(10쪽)고 말한다. 그러나 2부 곳곳에서 드러나는 것은 교양인들을 '자칭 교양인들'로 몰아세우며 자신이 교양을 갖추지 못하였음을 자위하고 교양을 갖출 생각조차 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아타까움이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자면, 자신의 모국 독일에서 교양인들을 길러낼 것을 포기한 교육 담당자들, 행정가와 정치가들에 대한 공격이 숨어있으며, 이러한 비판이야말로 한국 사회에 그대로 적용해도 되겠다는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인상적인 부분

신화와 천문학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있다. 즉 어떤 변화가 결절점에 다다르면 곧 반전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31쪽) ; 동양에서는 이것을 易의 원리라 이해한다. 세계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관찰은 상통하는 면이 있다.

어린이들도 다 아는 기본적인 사실을 교육 정책가들이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외면하고 있다는 데서 교육의 위기가 생겨나고 있다. 다시 말해, 학교에서 성적 경쟁을 할 때 출발지점에서 모든 학생에게 주어져야 하는 기회의 평등을, 이들은 골인 지점에서 받고 싶은 성적의 평등과 혼동한다는 데 문제의 본질이 있다. (33쪽-34쪽) ; 우리 나라의 교육 정책가들 역시 같은 혼동을 겪고 있다.

그리스도가 "내가 이 '베드로Peter'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했는데, '베드로'가 그리스어의 페트로스(petros)를 의미한다는 것이엇다. (94쪽) ; 예수가 그리스어를 구사했다고 볼 수도 있고, 예수 사후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을 그렇게 읽었다고 볼 수도 있다. 당시 고대 사회에서 그리스어가 오늘날 영어처럼 통용되었을 것을 생각하면, 어느 쪽이든 부자연스럽지 않다.

프랑스인들에게 민족은 언어적으로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정의되어 있다. 영국인의 정의는 '영국식 생활English way of life'을 하며 브리튼의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이다. (중략) 누구든지 그 클럽의 규칙인 헌법을 신봉하면 거기에 가입할 수 있다. (중략) 독일인은 이제 인종적.언어적 민족 개념을 포기하고 다른 나라들의 개념을 수용해야 한다. 즉 독일인은 부모가 독일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독일 땅에서 살기를 원하고 독일 헌법을 신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115쪽) ; 한국인의 정의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일까? 남북통일과 다문화사회의 안정적 정착이라는, 자칫 상충할 수 있는 두 가지 과제를 우리는 어떻게 달성해야 하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해 한국의 '헌법'이 하나의 해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중심적인 것은 시간의 새로운 체험이다. (중략) 모든 것이 변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제 '역사'를 발견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역사는 복수(復數) 형태로만 존재했다. (중략) 이제부터 세계사의 의미에서 집합 단수명사인 '역사'가 생겨났다. (중략)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인류사에서 처음으로 고독을 느꼈다. (중략) 이제부터 세계사의 의미에서 집합 단수명사인 '역사'가 생겨났다. (중략)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인류사에서 처음으로 고독을 느꼈다. (중략) 이로써 예술론이 새로운 기초 위에 세워져다. (중략) 예술가는 창조자가 되었으며 신처럼 자유롭게 창조했다. 그는 천재이며 신의 형제로 격상되었다. 1750년부터 그렇게 되었다. (213쪽-214쪽) ;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실은 근대의 산물이다. 이, 삼백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개념이며, 그 이전에는 이를 설명하는 단어가 없던 것이 아니라 그 실체가 없더라는 말이다. 역사, 천재, 예술, 개인, 고독.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가 책으로 읽힌 것이 아니라 구전되었던 시대에는 운문형식이 기억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291쪽) ; 억양(intonation)이 있는 서양어, 혹은 중국어에서 운문은 곧 노래이다. 억양이 있었던 우리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억양이 없어진 오늘날 한국어에서 시는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 걸까?

옥타브란 무엇일까? (중략) 높은 음은 낮은 음보다 거의 두 배나 빠른 진동수를 갖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두 음이 비록 음 높이는 다르지만 똑같은 음이라는 느낌을 갖는다. (중략) 음정수의 진동비율은 오성보다는 감각기관인 귀를 통해서 더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렇게 얻어진 음에서 음계가 만들어진다. 음계란 우리가 자연적인 순서의 음으로 느끼는 두 옥타브 사이의 음의 순차적인 배열을 말한다. 자연스럽다는 느낌은 진동수의 물리적이니 비례에서 나온다. (439쪽-443쪽) ; 인간의 신체가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것이 전혀 인간적이지 않은 숫자들의 비율과 들어맞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이를 알게 된 자들의 흥분은 종교적 감동에 필적했을 것이다.

이제부터 그는 물질세계를 공격해, 이 세계를 사유의 불씨로 방화하고, 사고에 필수적이지 않은 모든 것은 무조건적으로 일소한다. (475쪽) ; 데카르트에 대한 설명은 흔히, Cogito ergo sum에서 끝난다. 하지만 실은, 그것이 시작이다.

"자연은 선하고 사회는 악하다"는 철학 (483쪽) ; 루소의 이 명제는 독자를 예민하게 긴장시킨다. 自然, 善, 社會, 惡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초개인적인 긴밀한 공동체가 개개인보다 우위를 점하는 것을 인정하는 수사학적 표현을 좋아한다. 이 점은 자유주의 전통이 강한 미국에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자유주의가 폐결핵에 걸려 야위여가고 있는 독일에서는 그 부분이 악명높은 전통과 결부되어 있다. 즉 사회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보수주의자들도 (개인들의) 이익사회보다는 공동체를 높이 평가했고, 사회라는 것은 공동체에서 이탈한 것이라는 혐의를 두었다. (503쪽) ; 우리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의 고민이 있다. 자유주의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상태에서 한쪽에서는 자유의 폭주가, 다른 한쪽에서는 공동체의 탈을 쓴 전근대가 발현될 우려가 존재한다. 어느 쪽도 경계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쟁점을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공감 가능한 해답을 찾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자유'주의'이든 공동체'주의'이든 세상의 모든 문제를 각 한 단어로 해결하기에는 너무 두꺼운 칼이다.

녹색당의 자연숭배와 '뉴 에이지' 세대의 비합리주의는 옛날 우익의 생활형식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507쪽-508쪽) ; 심지어 자신들이 그러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기에 더욱 용감한데, 그것 역시 '옛날 우익'들과 닮았다.

교사 양성은 실제 경험과 학문 사이의 불분명한 교배로 시달리고 있다. 그래서 학문도, 실제 경험도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교사는 처음부터 전문적인 가면극에 익숙해진다. (522쪽) ; 우리나라에서는 여기에 엄청난 규모의 교육'산업'이 결부되어 있고, 이에 편승한 학생과 학부모들마저 덩달아 가면극에 춤을 춘다. 그 과정을 거치고 나면, 누구도 학문도, 실제 경험도 득하지 못하였음에도, 자신들이 학문도, 실제 경험도 득하였다고 착각을 하게 된다. 그 상태로 약 이십 년의 세월을 허비하게 된다. 대학에서는 최소한 학문이라도 얻어야 함에도 스펙과 취업에 질식되어 졸업을 하고, 그나마 일을 통해 실제 경험을 쌓다 보면,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착각한 것이 실은 없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들에 다시 공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최근의 소식은, 그런 면에서 다행스럽다.

유럽의 전통적 귀족사회는 신분사회였다. 신분은 계급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삶의 형식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중략) 개인적 정체성은 사회적 정체성과 같았다. (중략) 오늘날은 모든 것이 다르다. 신분은 와해되었다. (중략) 인간은 더 이상 이런 부분체계들에 전적으로는 속하지 않고, 관점에 따라서, 그리고 일시적으로만 속한다. (중략) 바로 이 때문에 사람들은 정체성을 필요로 한다. (541쪽 - 542쪽) ; 탁월한 분석.

사회는 인간의 눈으로는 투시할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중략) 사회란 한 무리의 인간들이라는 말이 있다. 이런 말보다 더 잘못된 생각은 없다. 이것은 마치 한 무더기의 돌과 대들보가 집이며, 한 통의 가득 찬 물과 지방과 유기질 덩어리가 소(牛)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544쪽) ; 한 무리의 인간들을 사회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서술되어 있지 않다. 이것을 constitution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고, 사회적 영역에서의 constitution이라고 본다면, 民法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텔레비전이 일반화되고 난 다음부터 이런 불편감은 더욱 보편화되었다. 요즘 학생들은 좌절감이나 어려움을 잘 참지 못하며 의미 형성과정에 반드시 필요한 서행(템포 늦추기)를 지루해하고 견디지 못한다는 일선 교사들의 지적은 그 좋은 예다. 따라서 학생들은 수업이 배움의 과정이 아니라 오락처럼 되기를 원한다. (617쪽) ; 엄청나게 복잡한 분자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칠판에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는 3D 그래픽을 이용해서 한 번에 보여주는 것이 간명할 것이다. 때로는 애덤 스미스와 도덕감정론 사이의 차이점을 비교하기 위해 하이퍼링크를 이용할 수도 있겠다. 복잡한 계약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파워포인트로 미리 계약관계를 분리해서 강조해 가면서 설명한다면 이해를 도울 수 있다. 하지만 어떤 학문은 상당 부분이 읽기에 중점이 있다. 수 페이지에 걸쳐 마침표가 등장하지 않는 판결문은, 국문학적으로 아름답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법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자기가 읽기 쉬운 판결문이 등장할 때까지 읽기를 포기할 수는 없다. 칸트가, 플라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고 싶다면, 그들이 쓴 책을, 밑줄을 긋고 주를 달아가며 읽어야 한다. 고등학교에서 가르치지 못한다면, 대학에서라도 배워야 할 것들이다.

 

사소한 시비

그리스어로 그리스는 엘라스Eellas라고 불린다. (47쪽) ; 그리스어로 그리스는 헬라스로 불린다. 이 경우 맨 앞의 E가 he로 발음되기 때문.

유일한 예외는 군대를 이끄는 전략가였다. (72쪽) ; 고대 아테네 radical democracy에서도 군대를 이끄는 전략가(strategos)만이 유일한 예외는 아니었다. 대표적인 예외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헌법은 부칙들로 보완되었지만 본질적인 것은 변하지 않았다. (218쪽) ; 미국 헌법의 amendment를 '부칙'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오해이다. amendment에 의해 추가되는 조문은 그 이전의 조문과 동등하기 때문이다. 이 점이 독일이나 한국의 헌법과 다른 점이다. amendment에 대한 마땅한 번역은 "수정조항"이나 "증보"가 될 것이다.

파울 교회(239쪽, 701쪽, 746쪽) ; Paulstirche 말 그대로 '파울'의 교회인데, 개인적으로는 '바울 교회', '바오로 교회', '성바오로 교회' 등이 어땠을까 싶다.

정치법(247쪽) ; '정치범'의 오타.

국법교수 슈미트Schmidt (272쪽) ; 유명한 '국법교수'의 이름은 C.Schmitt. 혹시 다른 Schmidt가 있는지는 확인해 볼 필요.

세우찬의 선인Der gute Menshc von Sezuan (376쪽) ; 독일식으로는 Sezuan이라고 읽을 수밖에 없겠다. 우리 식으로는 "사천의 선인"이나 "쓰촨의 선인"이라고 해도 좋겠다.

'정치적 공정성' (563쪽) ; 정치적으로 정확한 (626쪽) ; politically correct를 번역한 것이라면, '정치적 올바름', '정치적으로 올바른'이 더 익숙한 것 같다.

문제 제기를 정의(定意)하며 ; define의 번역은 定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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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 금장본
200주년신약성서번역위원회 엮음 / 분도출판사 / 2001년 5월
평점 :
절판


과거 유럽에서 처음 학문이라는 것이 만들어질 무렵에 공부하는 방법이 이랬다. 큰 책의 가운데 부분에 권위 있는 책의 본문이 있고 책의 여백에 그 책의 해석을 달아 넣는다. 그렇게 빽빽해진 책을 후학이 필사하여 베끼면서 다시 후학에 이어준다. 그렇게 학문이 이어져 내려왔다. '주석학파'라고 부를만한, 그런 공부방법의 흔적이 오늘날 법학과 (가톨릭) 신학에 남아있다.

법학의 경우 법조문에 대한 주석서 형식의 책이 아직도 출간된다. 법학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 과연 그런 주석서 형식의 책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의문이다. 우리 말로 번역된 성경책을 무조건 읽는다고 예수가 살아오시지 않는 것처럼 법학 역시 법조문을 읽는다고 이해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만 이런 주석서는 실은, 전문가 집단에게 꽤 유용하다. 구체적으로 어떤 원전을 인용할 때 빠지기 쉬운 실수-많은 오해는 아주 간단한 오독에서 벌어진다-를 막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신학에 있어서는 어떨까?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한 사람들의 모임을 '신자' 또는 '교회'라고 부를 때, 처음 그 가르침을 접하기에 이런 형식의 주석서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미 그 공동체 안으로 들어온 사람에게 있어서, 매일 접하는 신약 속의 여러 문구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한 신학자들의 견해를 접하는 것은 제법 의미있는 일이다. 즉 주석서 형식이 전문가 집단에게 꽤 유용하다고 할 때, 신자들이야말로 바로 그 필요성이 간절한 전문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기타 등등 이유를 차치하고, 이 책의 외형은 '소장가치'라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거의 '흉기' 수준의 두께에 가죽 양장, 그리고 금장까지. 여유가 있다면 그냥 책꽂이에 꽂아두고, 일주일에 한 번 미사시간에 다루었던 복음 부분을 찾아서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작은 습관이 삶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

아, 그리고 이 책의 형식은 법학에서의 주석서나, 중세 시절의 주석서와는 다르다. '조문' 단위로 끊어 읽을 수 있는 법학 주석서와 성경은 그 상황이 다르고, 한편 오늘날의 발달된 편집기술은 과거 수도사들의 편집상의 노고를 훨씬 줄여주었다. 책의 상단 4할 정도는 신약의 번역 부분이, 하단 6할 정도는 그에 대한 주석이 각주 형식으로 달려 있다. 아무튼 명불허전! 일단 책은 '책에 대해서' 백날 들어야 소용 없다. 일단 읽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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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망가 대왕 4 - 완결
아즈마 키요히코 지음, 이은주 옮김 / 대원씨아이(만화)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정말로 완결되고 말았다. 학생을 주인공으로 한 만화는 얼마나 위험한지! 학교라는 독특한 공간을 배경으로 하면서 연대기적인 행사들에 학창생활을 끼워맞추면 된다는 점에서는 유리하지만(스토리를 짜기가 쉽단 말이다), 그들에게는 '졸업'이 기다리고 있고, 이 경우 작가는 졸업을 시키면서 극을 끝내거나 졸업 이후의 삶을 그려나가야 한다(주인공을 몇년째 유치원생으로 그리는 크레용신짱이라는 예외적인 만화도 있다). 아즈마 키요히코는? 졸업을 시켰다. 그리고 극을 끝냈다! 이건 처음부터 계획되어 있던 것일까? 아즈망가에는 정녕 연장방송이란 없는 것일까?

아즈망가 대왕의 형식미는 독특하다. 이건 누구라도 알 수 있다. 이 만화는 네컷 만화로 되어 있다. 네컷 만화라니. 네컷 만화는 원래(!) 장편만화의 중간 혹은 끝 부분에 작가가 심심풀이로 끄적인 만화가 아니던가? 그런데 아즈망가 대왕의 에피소드는 네컷 만화로 이루어져 있다. 더 대단한 것은 네컷으로 한 편의 에피소드가 끝나면서 그것이 옆의 네칸으로 내용상 이어진다는 것이다.

즉 이 만화의 진행은 A -> B -> C -> D -> E -> ... 로 이어지면서 A 안에서 A기 -> A승 -> A전 -> A결, 이것이 다시 B, C, D 안에서도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체 만화의 구성은 1학년, 2학년, 3학년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말그대로 소소한 일상이다. 이들은 학교생활을 한다(!).

네컷만화는 사실 우리 나라에서도 꽤 오래 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지금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소년조선일보나 소년한국일보 같은 어린이용 신문에서는 매일 네컷짜리 만화를 연재하였다('돌배군'을 기억하는가?). 사실 중앙일간지도 요즘에야 단면짜리 만평으로 통일되는 것 같지만, 몇년 전까지만 해도 왈순아지매 등의 네컷짜리 만화를 싣고는 했다. 이런 네컷만화가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 것은 좀 아쉬운 점이 있다.

네컷짜리 만화는 일종의 꽁트다. 네컷 내부에서 기승전결을 갖추어서 하나의 이야기를 시작해서 끌어가다가 끝을 내어야 한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역시 아즈망가 대왕의 형식미는 독특하다. 그리고 생각할수록 놀랍다. 어찌 보면 평범할 수 있는 에피소드가 네박자의 이야기진행으로 인해 속도감이 붙고, 때로는 박진감넘치는 느낌을 준다(개인적으로 그런 면에서 장편의 호흡을 취하고 있는 애니메이션 버젼은 좀 어색하게 느껴진다). 짧은 호흡으로 끊어주면서, 자칫 흥분해서 질질 끌 수도 있을 에피소드들이 매우 쿨하게 끝맺음을 하면서 바로 이어서 다음 에피소드로 이어질 수 있게 해 준다.

이 만화는 여러 번 반복해 볼 가치가 있다. 처음에는 드라마로 읽힌다. 그 반복회수가 늘어갈수록 전체의 구조가 보이기 시작하고, 전체가 잘 짜여진 매트릭스로 떠오른다. 그 매트릭스를 그냥 그대로 감상하는 것이 이 만화의 진정한 묘미가 아닐까 싶다.

이쯤해서 드는 궁금한 점이 있을 것이다. 이 작가는 다른 형식에서도 이런 재능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아즈망가에서는 '서비스'로 네컷이 아닌 형식의 에피소드가 들어있다. 그 부분은 어째 좀 어색하다. 마치 만화 원작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그렇다면 아즈마의 본격 장편은 어떨 것인가? 우리는 그 놀라운 재능을 [요츠바랑!]에서 이어볼 수 있다. 적어도 아즈마에게, 2년생 징크스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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