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교양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디트리히 슈바니츠 지음, 인성기 옮김 / 들녘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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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 시절에 인성기 선생께 독일어를 배웠던 적이 있다. 언젠가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이제 막 책을 번역해서 출간했다며 소개하신 책이 바로 이 책이다. 그리로부터 한두 해가 지나서 이 책을 샀고, 다시 그로부터 몇 년이 더 지나서야 이 책을 읽었다. 인성기 선생님은 이 책의 저자와는 달리 사람을 밀어붙이는 타입은 아니셨고, 때문에 이 책이 얼마나 좋은 책인지에 대해 적극 광고하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면 당신이 번역을 했다고 수업시간에 소개했다는 것만으로도, 그에 앞서 이 두꺼운 책을 꼼꼼하게 번역한 것만으로도 이 책이 얼마나 좋은 책인지, 그리고 얼마나 우리들이 이 책을 바라시는지 어필한 것인데도, 둔한, 변명하자면 아직 어렸던 학생은 그 뜻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책은 어떤 의미에서 입문서의 역할을 한다. 무엇에 대한? 文史哲이라고 불러도 좋고 인문학이라고 불러도 좋고 교양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하지만 101류의 실용적인 정보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이 책은 실용적인 정보를 담고 있는 교양 입문서이다."라는 문장은, 이 책의 표현을 빌자면 "패러독스의 문장"(608쪽)에 해당할 것이다. 대신 저자는, 교양인이 된다는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거나 쉬운 것이 아니며, 어려운 것은 어렵게 대해야 함을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그렇다면 이 책의 '효용'은 전혀 없는 것인가? 그 시간에 그냥 톨스토이를 읽고, 그냥 칸트를 읽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솔직히 대학을 졸업한 나도 어느 책을 어느 순서로 읽어야 할지를 생각하자면, 먹먹해질 때가 많다. 이 책은 정말 친절하게(!) 어느 책을 읽어야 할지를 알려준다. 그리고 더 친절하게(!) 그 책을 읽는 자세를 잡아준다. 어디에 그런 부분이 나와 있느냐고? 이 책이 온 몸으로 그렇게 말해주고 있다.

번역본은 본문만 칠백 쪽에 육박한다. 하루에 열 페이지씩 읽는다면 두 달 걸릴 분량이다. 두 달이라니, 평생을 교양인으로 살 수 있는 자세를 잡아주는데 두 달이라니 솔직히 거저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제법 많이 팔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의외로 이 책을 완독한 사람이 많은 것 같지는 않다. 심지어 이 책의 "추천의 글"을 쓴 유시민 씨도 이 책을 읽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그의 독서능력에 심각한 장애가 있다고 볼 수밖에. 그는 "2부 곳곳에서 드러나는바, 자칭 교양인들의 허위의식에 대한 점잖은 풍자와 야유는 감칠맛이 날뿐더러 한국 사회에 그대로 적용해도 되겠다는 공감을 불러일으킨다"(10쪽)고 말한다. 그러나 2부 곳곳에서 드러나는 것은 교양인들을 '자칭 교양인들'로 몰아세우며 자신이 교양을 갖추지 못하였음을 자위하고 교양을 갖출 생각조차 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아타까움이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자면, 자신의 모국 독일에서 교양인들을 길러낼 것을 포기한 교육 담당자들, 행정가와 정치가들에 대한 공격이 숨어있으며, 이러한 비판이야말로 한국 사회에 그대로 적용해도 되겠다는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인상적인 부분

신화와 천문학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있다. 즉 어떤 변화가 결절점에 다다르면 곧 반전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31쪽) ; 동양에서는 이것을 易의 원리라 이해한다. 세계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관찰은 상통하는 면이 있다.

어린이들도 다 아는 기본적인 사실을 교육 정책가들이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외면하고 있다는 데서 교육의 위기가 생겨나고 있다. 다시 말해, 학교에서 성적 경쟁을 할 때 출발지점에서 모든 학생에게 주어져야 하는 기회의 평등을, 이들은 골인 지점에서 받고 싶은 성적의 평등과 혼동한다는 데 문제의 본질이 있다. (33쪽-34쪽) ; 우리 나라의 교육 정책가들 역시 같은 혼동을 겪고 있다.

그리스도가 "내가 이 '베드로Peter'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했는데, '베드로'가 그리스어의 페트로스(petros)를 의미한다는 것이엇다. (94쪽) ; 예수가 그리스어를 구사했다고 볼 수도 있고, 예수 사후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을 그렇게 읽었다고 볼 수도 있다. 당시 고대 사회에서 그리스어가 오늘날 영어처럼 통용되었을 것을 생각하면, 어느 쪽이든 부자연스럽지 않다.

프랑스인들에게 민족은 언어적으로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정의되어 있다. 영국인의 정의는 '영국식 생활English way of life'을 하며 브리튼의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이다. (중략) 누구든지 그 클럽의 규칙인 헌법을 신봉하면 거기에 가입할 수 있다. (중략) 독일인은 이제 인종적.언어적 민족 개념을 포기하고 다른 나라들의 개념을 수용해야 한다. 즉 독일인은 부모가 독일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독일 땅에서 살기를 원하고 독일 헌법을 신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115쪽) ; 한국인의 정의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일까? 남북통일과 다문화사회의 안정적 정착이라는, 자칫 상충할 수 있는 두 가지 과제를 우리는 어떻게 달성해야 하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해 한국의 '헌법'이 하나의 해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중심적인 것은 시간의 새로운 체험이다. (중략) 모든 것이 변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제 '역사'를 발견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역사는 복수(復數) 형태로만 존재했다. (중략) 이제부터 세계사의 의미에서 집합 단수명사인 '역사'가 생겨났다. (중략)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인류사에서 처음으로 고독을 느꼈다. (중략) 이제부터 세계사의 의미에서 집합 단수명사인 '역사'가 생겨났다. (중략)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인류사에서 처음으로 고독을 느꼈다. (중략) 이로써 예술론이 새로운 기초 위에 세워져다. (중략) 예술가는 창조자가 되었으며 신처럼 자유롭게 창조했다. 그는 천재이며 신의 형제로 격상되었다. 1750년부터 그렇게 되었다. (213쪽-214쪽) ;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실은 근대의 산물이다. 이, 삼백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개념이며, 그 이전에는 이를 설명하는 단어가 없던 것이 아니라 그 실체가 없더라는 말이다. 역사, 천재, 예술, 개인, 고독.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가 책으로 읽힌 것이 아니라 구전되었던 시대에는 운문형식이 기억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291쪽) ; 억양(intonation)이 있는 서양어, 혹은 중국어에서 운문은 곧 노래이다. 억양이 있었던 우리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억양이 없어진 오늘날 한국어에서 시는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 걸까?

옥타브란 무엇일까? (중략) 높은 음은 낮은 음보다 거의 두 배나 빠른 진동수를 갖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두 음이 비록 음 높이는 다르지만 똑같은 음이라는 느낌을 갖는다. (중략) 음정수의 진동비율은 오성보다는 감각기관인 귀를 통해서 더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렇게 얻어진 음에서 음계가 만들어진다. 음계란 우리가 자연적인 순서의 음으로 느끼는 두 옥타브 사이의 음의 순차적인 배열을 말한다. 자연스럽다는 느낌은 진동수의 물리적이니 비례에서 나온다. (439쪽-443쪽) ; 인간의 신체가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것이 전혀 인간적이지 않은 숫자들의 비율과 들어맞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이를 알게 된 자들의 흥분은 종교적 감동에 필적했을 것이다.

이제부터 그는 물질세계를 공격해, 이 세계를 사유의 불씨로 방화하고, 사고에 필수적이지 않은 모든 것은 무조건적으로 일소한다. (475쪽) ; 데카르트에 대한 설명은 흔히, Cogito ergo sum에서 끝난다. 하지만 실은, 그것이 시작이다.

"자연은 선하고 사회는 악하다"는 철학 (483쪽) ; 루소의 이 명제는 독자를 예민하게 긴장시킨다. 自然, 善, 社會, 惡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초개인적인 긴밀한 공동체가 개개인보다 우위를 점하는 것을 인정하는 수사학적 표현을 좋아한다. 이 점은 자유주의 전통이 강한 미국에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자유주의가 폐결핵에 걸려 야위여가고 있는 독일에서는 그 부분이 악명높은 전통과 결부되어 있다. 즉 사회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보수주의자들도 (개인들의) 이익사회보다는 공동체를 높이 평가했고, 사회라는 것은 공동체에서 이탈한 것이라는 혐의를 두었다. (503쪽) ; 우리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의 고민이 있다. 자유주의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상태에서 한쪽에서는 자유의 폭주가, 다른 한쪽에서는 공동체의 탈을 쓴 전근대가 발현될 우려가 존재한다. 어느 쪽도 경계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쟁점을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공감 가능한 해답을 찾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자유'주의'이든 공동체'주의'이든 세상의 모든 문제를 각 한 단어로 해결하기에는 너무 두꺼운 칼이다.

녹색당의 자연숭배와 '뉴 에이지' 세대의 비합리주의는 옛날 우익의 생활형식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507쪽-508쪽) ; 심지어 자신들이 그러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기에 더욱 용감한데, 그것 역시 '옛날 우익'들과 닮았다.

교사 양성은 실제 경험과 학문 사이의 불분명한 교배로 시달리고 있다. 그래서 학문도, 실제 경험도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교사는 처음부터 전문적인 가면극에 익숙해진다. (522쪽) ; 우리나라에서는 여기에 엄청난 규모의 교육'산업'이 결부되어 있고, 이에 편승한 학생과 학부모들마저 덩달아 가면극에 춤을 춘다. 그 과정을 거치고 나면, 누구도 학문도, 실제 경험도 득하지 못하였음에도, 자신들이 학문도, 실제 경험도 득하였다고 착각을 하게 된다. 그 상태로 약 이십 년의 세월을 허비하게 된다. 대학에서는 최소한 학문이라도 얻어야 함에도 스펙과 취업에 질식되어 졸업을 하고, 그나마 일을 통해 실제 경험을 쌓다 보면,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착각한 것이 실은 없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들에 다시 공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최근의 소식은, 그런 면에서 다행스럽다.

유럽의 전통적 귀족사회는 신분사회였다. 신분은 계급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삶의 형식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중략) 개인적 정체성은 사회적 정체성과 같았다. (중략) 오늘날은 모든 것이 다르다. 신분은 와해되었다. (중략) 인간은 더 이상 이런 부분체계들에 전적으로는 속하지 않고, 관점에 따라서, 그리고 일시적으로만 속한다. (중략) 바로 이 때문에 사람들은 정체성을 필요로 한다. (541쪽 - 542쪽) ; 탁월한 분석.

사회는 인간의 눈으로는 투시할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중략) 사회란 한 무리의 인간들이라는 말이 있다. 이런 말보다 더 잘못된 생각은 없다. 이것은 마치 한 무더기의 돌과 대들보가 집이며, 한 통의 가득 찬 물과 지방과 유기질 덩어리가 소(牛)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544쪽) ; 한 무리의 인간들을 사회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서술되어 있지 않다. 이것을 constitution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고, 사회적 영역에서의 constitution이라고 본다면, 民法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텔레비전이 일반화되고 난 다음부터 이런 불편감은 더욱 보편화되었다. 요즘 학생들은 좌절감이나 어려움을 잘 참지 못하며 의미 형성과정에 반드시 필요한 서행(템포 늦추기)를 지루해하고 견디지 못한다는 일선 교사들의 지적은 그 좋은 예다. 따라서 학생들은 수업이 배움의 과정이 아니라 오락처럼 되기를 원한다. (617쪽) ; 엄청나게 복잡한 분자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칠판에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는 3D 그래픽을 이용해서 한 번에 보여주는 것이 간명할 것이다. 때로는 애덤 스미스와 도덕감정론 사이의 차이점을 비교하기 위해 하이퍼링크를 이용할 수도 있겠다. 복잡한 계약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파워포인트로 미리 계약관계를 분리해서 강조해 가면서 설명한다면 이해를 도울 수 있다. 하지만 어떤 학문은 상당 부분이 읽기에 중점이 있다. 수 페이지에 걸쳐 마침표가 등장하지 않는 판결문은, 국문학적으로 아름답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법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자기가 읽기 쉬운 판결문이 등장할 때까지 읽기를 포기할 수는 없다. 칸트가, 플라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고 싶다면, 그들이 쓴 책을, 밑줄을 긋고 주를 달아가며 읽어야 한다. 고등학교에서 가르치지 못한다면, 대학에서라도 배워야 할 것들이다.

 

사소한 시비

그리스어로 그리스는 엘라스Eellas라고 불린다. (47쪽) ; 그리스어로 그리스는 헬라스로 불린다. 이 경우 맨 앞의 E가 he로 발음되기 때문.

유일한 예외는 군대를 이끄는 전략가였다. (72쪽) ; 고대 아테네 radical democracy에서도 군대를 이끄는 전략가(strategos)만이 유일한 예외는 아니었다. 대표적인 예외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헌법은 부칙들로 보완되었지만 본질적인 것은 변하지 않았다. (218쪽) ; 미국 헌법의 amendment를 '부칙'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오해이다. amendment에 의해 추가되는 조문은 그 이전의 조문과 동등하기 때문이다. 이 점이 독일이나 한국의 헌법과 다른 점이다. amendment에 대한 마땅한 번역은 "수정조항"이나 "증보"가 될 것이다.

파울 교회(239쪽, 701쪽, 746쪽) ; Paulstirche 말 그대로 '파울'의 교회인데, 개인적으로는 '바울 교회', '바오로 교회', '성바오로 교회' 등이 어땠을까 싶다.

정치법(247쪽) ; '정치범'의 오타.

국법교수 슈미트Schmidt (272쪽) ; 유명한 '국법교수'의 이름은 C.Schmitt. 혹시 다른 Schmidt가 있는지는 확인해 볼 필요.

세우찬의 선인Der gute Menshc von Sezuan (376쪽) ; 독일식으로는 Sezuan이라고 읽을 수밖에 없겠다. 우리 식으로는 "사천의 선인"이나 "쓰촨의 선인"이라고 해도 좋겠다.

'정치적 공정성' (563쪽) ; 정치적으로 정확한 (626쪽) ; politically correct를 번역한 것이라면, '정치적 올바름', '정치적으로 올바른'이 더 익숙한 것 같다.

문제 제기를 정의(定意)하며 ; define의 번역은 定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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