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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의 철학자들 - 위대한 경제사상가들의 생애, 시대와 아이디어
로버트 하일브로너 지음, 장상환 옮김 / 이마고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경제학의 역사를 正-反-合의 과정으로 그려보자. 正1과 反1이 지양되어 合1이 되고, 合1이 곧 正2가 되고 이에 反2가 생겨 다시 合2가 되는 무한과정을 그려보면, 우리가 지금 배우고 있는 경제학 교과서는 合N-1, 즉 正N이라고 부를 수 있겠고, 이를 체계적으로 설명한 하나의 틀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正1, 正2, 正3, ... 正N을 나열한 것을 경제학사라고 부를 수 있겟다. 이 책의 흥미로운 점은 反1, 反2, 反3, ... 反N을 나열하여 경제학사를 꾸몄다는 점이다.
장점이라면, 문제제기를 하는 입장의 학자들을 다루고 있으므로 주제 자체가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는 점, 그리고 현재 우리가 배우는 경제학의 어떤 개념의 역사적 맥락을 들여다보기 쉽다는 점, 현재의 경제학에 대한 새로운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해 준다는 점 등을 들 수 있겠다. 단점이라면, 현재의 경제학이 다수의 지지를 얻게 된 이유를 소홀히 한 채 넘어가기 쉽고, 각 chapter와 chapter 사이의 연결고리가 빠질 수 있으므로 서술의 일관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일반론은 이쯤으로 하고, 이 책 자체의 매력을 부인하기 어려운데, 각 시대별로 사회적 배경을 충실히 소개하고, 당대의 주류 논의를 요약한 후 자신이 주인공으로 삼은 학자들의 견해를 논리 순서대로 잘 요약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읽히면서 얕지 않다. 상당량의 독서가 뒷받침되었음을 알 수 있다.
번역 역시 거의 흠잡을 데가 없다. 사실 한국 독자의 입장에서 이 책(의 번역본)은 이중의 창을 가지고 볼 수밖에 없다. 저자 하일브로너가 경제학 및 경제학자들을 바라보는 창이 있고, 다시 그 하일브로너를 바라보는 역자의 창이 있다. 하일브로너는 명백히 어떤 의도를 가지고 여러 학자들을 선별한 것이며, 그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이고, 역자 역시 이런 하일브로너를 선택한 의도가 있다. 하일브로너, 그리고 역자는 세세한 역사적 고증을 통해 현재 우리가 배우고 있는 '주류' 경제학이 실은 앙상한 논리 위에 서 있을 뿐일 수도 있고, 주류경제학이 취하고 있는 정합적인 방법론 때문에 역설적으로 빠뜨리고 있는 논의가 있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이러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저자와 역자는 함부로 개입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실로 담담한 문체로 설명을 이어간다. 이 점이야말로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을 읽고 경제학을 모두 이해했다고 보는 것은 만옹일 것이며, 위험하기까지하다. 경제학의 주류를 꿰뚫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러나 수학공식으로 점철된 미시경제학과 거시경제학 교과서에 지칠 때쯤, 공부하는 이의 머리를 좀더 시원하게 해 주고, 경제학 교과서를 모두 이해해 버린 다음에도 여전히 공부할 거리가 많다는 희망(!)을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이런저런 '효용'을 다 제치고, 즐거운 독서를 제공한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책이다.
인상적인 부분 혹은 사소한 시비
오랜 시간 동안 인간은 이렇게 전통이나 명령이라는 해결책에 따라 자신의 생존문제를 다루어왔다. 그리고 문제를 이러한 방식으로 다루는 동안에는 '경제학'이라는 특수한 연구분야가 생겨날 수 없었다. (24쪽) ;
여기에서 저자의 관점이 드러난다. 저자는 경제학이라는 것을 자유, 경쟁, 시장 등이 복합된 '근대'의 체제 속에서의 경제현상을 경제학의 대상으로서의 경제에 한정하고, 이를 '전체적으로' 바라보고 싶어한다. 즉 현재의 경제학이 다루는 범위보다 대상의 시간적 범위는 좁히고, 이에 대한 분석은 더 넓혔다. 이를 역자는 "그는 자본주의를 단순히 '경제체제(economic system)'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사회조직(regime)'으로 파악할 것을 제안한다"고 정리하고 있다(역자후기, 462쪽).
그런데 사실 자본주의란 economic system 외에 democracy라는 political system 및 international law와 같은 global system 등이 복합된 modern한 reigme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사실, 자본주의라는 체제를 꼭 경제학이라는 이름으로만 분석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같은 관점에서 역자가 소개하고 있는 로버트 머튼 솔로(Robert Merton Solow)의 지적은 의미가 있다. 그는 "경제학이란 기본적으로 희소성을 다루는 학문으로서 자본주의사회 이외에도 적용될 수 있으며, 설사 자본주의체제라 하더라도 모두 동일한 것이 아니라 여러 유형이 있다고 반박한다."(역자후기, 458쪽). 예컨대 賣買라는 계약의 형태가, 그리고 이를 규율하는 私法이라는 법적 장치가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세계가 정말로 이런 식으로 움직일까? 애덤스미스의 시대에는 바로 그렇게 움직였다. (중략) 그리고 오늘날은? 경쟁적 시장기구가 아직도 작동하는가? 이것은 간단히 답할 수 없는 문제이다. 시장의 성격이 18세기 이후 크게 변화했기 때문이다. (75쪽) ; 당연하지만 사람들이 쉽게 넘어가는 논리이다. 애덤스미스는 뛰어난 사람이지만, 그의 견해를 200년이 지난 오늘날에 그대로 적용해도 될 만큼 전지전능한 존재는 아니다. 그 때와 지금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알아야 함은 기본이다.
스미스는 정부가 복지법안을 가지고 간섭해 올 때 정부가 시장체제를 약화시킬 것인가 강화시킬 것인가 하는, 후대 경제학자들에게 지적인 고민을 안겨주는 문제에는 직면하지 않았다. 그의 시대에는 빈민구호를 제외하고는 복지법안이라는 것이 사실상 없었다. (89쪽) ; 시장경제체제에서 정부라는 주체의 개입정도를 논의하는 데 애덤스미스를 끌어들이는 것은, 무모한 시도일 수 있다.
아마 애덤스미스처럼 자신의 시대를 완전히 포괄한 경제학자는 다시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침착하고 완고함에 빠지지 않고 악의를 품지 않으면서 철저히 비판적이며 몽상적 이상에 빠지지 않고서도 낙관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94쪽) ; 사실, 오늘날 뛰어난 경제학자들 상당수는 애덤스미스와 비교할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시대를 완전히 포괄한 사람들일 것이다. 다만 그들이 경제학회지에 싣는 글은 철저히 경제학적 방법론에 기반을 둔 것일 터. 어떤 학자가 경제학도 치밀하게 파고들면서 법학도, 인문학도 마찬가지이며, 직면한 문제에 대해 어느 방법론이든 자유롭게 구사하면서 답을 찾아간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닌가. 아무튼 애덤스미스에 대한 저자의 상찬은, 조금 과도해 보이기는 해도, 보기 싫지 않다. 부럽고, 배우고 싶다.
이상하게도 현실세계의 일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학구적인 맬서스였고, 이론가로서의 면모를 보인 것은 실무적 인간인 리카도였다. (중략) 따라서 그들은 매사에 논쟁을 벌였다. (중략) 그런데 신기하게도 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였다. (108-111쪽) ; 그러기에 둘 다 좋은 학자로 기억되는 것일 터이다.
사실 우리가 자본주의경제라고 부르는 구조 이외에, 스미스와 맬서스 그리고 리카도의 비전 가운데 들어 있는 또 다른 공통요소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은 노동계급을 본질적으로 수동적인 존재로 보는 시각이다. (중략) 이 문제는 다음 장에서 다룰 주제이다. (136쪽) ; 하일브로너의 장점이 이런 부분이다. 그는 역사적으로 우리가 그들보다 뒤에 살았기에 알 수 있었던 사실을 그들이 몰랐노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그저 다음 장에서 다룰 주제일 뿐이다.
고백하건데 (173쪽) ; 고백하건대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노동을 착취하는 사업장이 과거의 일이 되어버린 나라에서 잉여가치 개념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저술하던 당시에는 이것이 단순한 이론적 구성물만은 아니었다. (209쪽) ; 잉여가치 개념이 단순히 이론적 개념이 아니라 역사적 개념일 수도 있다는 것. 오늘날 이 개념을 그대로 투영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를 수도 있겠다는 것.
마르크스는 그를 향해 바쳐진 모든 우상숭배에도 불구하고 분명 무오류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피할 수 없는 어떤 존재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겠다. 즉 자신이 발견한 사회사상의 대륙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긴 위대한 탐험가인 것이다. (222쪽) ; 마르크스를 '학자'로 보는 저자의 관점. 대체로 동의할 만하다.
프랑스에서는 레옹 왈라스(중략)라는 이름의 저명한 경제학자가 수학을 이용해서 시장에 가장 적합하고 정확한 가격을 얻어낼 수 있음을 증명했다. (231쪽) ; 하지만 그러한 가격이 존재한다는 믿음(신앙!)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바스티아는 (중략) 이렇게 썼다. 모든 사람들은 국가의 비용으로 살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들은 국가가 모든 사람들이 부담하는 비용으로 유지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238쪽) ; 탁월한 혜안!
마셜이 홉슨과 같이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는 비전을 가지거나 또는 에지워스가 헨리 조지와 같은 사회 불의에 대한 감각을 가졌더라면, 세계는 격렬한 사회변화에 대해 전혀 준비되지 않은 채로 20세기의 대재앙에 부딪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건대 사상이란 그것이 아무리 이단적인 것이라 해도 무시해서는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278쪽) ; 저자의 취향을 잘 설명해준다. 저자는 빅토리아 시대 당대의 주류 경제학자들이 이단적 경제학자들이 가졌던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한다. 그런데 마셜이나 에지워스가 홉슨이나 헨리 조지의 견해를 어설프게 수용했다면 마셜이나 에지워스가 당대에 그 영향력을 갖지는 못했을 수도 있고, 그랬다면 다른 주류학자가 그 지위를 차지했을 수도 있다. 애석한 일이지만, 마셜이나 에지워스의 능력이 그뿐이었다면, 이후에 벌어졌을 대공황을 예측하지 못한 것을 두고 그들을 비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저자 역시 이를 애석하게 생각할 뿐 비난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저자가 이들을 언급함으로써 그 책임을 묻고, 비난하고 싶어하는 것은 현대의 주류경제학(자)일 수도 있겠다.
미국의 전문가들은 자신을 가르친 유럽 선생들의 발자취를 따라갔고, 미국 사회를 전혀 맞지 않는 틀에 강제로 집어넣었다. (중략) 한마디로 말해서 공식 세계의 경제학(official economics)은 변호론이었을 뿐, 사태를 제대로 인식할 능력이 없었다. (중략) 필요한 것은 이방인의 눈이었다. (중략) 미국 출생이지만 천성적으로 어느 국가의 시민도 아니었던 소스타인 번드 베블런이라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눈이 있었다. (285쪽-287쪽) ; 그곳에 살면서도 다른 이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예민한 통각을 가진 사람, 구약 시대에는 예언자라고 불렀고, 지금은 지식인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1875년 (291쪽) ; 1857년
사물의 본질에 도달하려는 한 가지 결의 이외에는 자신의 견해를 전혀 내보이지 않고 근본문제를 궤뚫어보고 있는 명민한 정신 (297쪽) ; 꼭 배워야겠다 싶은 자세는 아니지만, 분명 매력적이고, 혹은 부럽다.
베블런은 '혁명'을 더욱 상세히 설명했다. 결국 일단의 기술자들이 사회로부터 원군을 얻어 혼란한 기업체계를 인수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315쪽) ; 오늘날 미국에서 CEO라는 것은 "강도귀족"보다는 "기술자"에 가까운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을 설혹 은폐라 밀어붙일 수는 있었고, "강도귀족"으로 드러난 자들에 대해 대중과 지식인의 분노가 있다는 것, 이렇게 역사가 진보한다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마르크스처럼 베블런도 영국의 군주제처럼 이 기업체제가 미국이라는 크게 변화된 세계에 얼마나 순응했는지를 진지하게 탐구하지는 않았다. (중략) 그는 생활의 완전한 재배치자 역할을 하는 기계가 노동자의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처럼 기업가의 본질을 바꿔놓을 것임을 파악하지 못했다. (323쪽) ; 체제라는 것이 외부의 자극에 대해 스스로를 변화하여 버티는 힘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인간에게 그러한 능력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세계는, 스스로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을 떠안고 변해간다.
베블런은 인간에 내재한 난폭성과 창의성이 합리하의 외투 아래 질식되도록 만드는 '경제법칙'으로는 인간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아첨이 덜한 고고학이나 심리학 같은 보다 근본적인 어휘로 인간을 다루어야 한다고 말했다. (325쪽) ; 그런 의미에서 이른바 행동경제학자들은 베블런의 가장 충실한 제자들일지도 모르겠다. 심리학이 과연 경제학의 '제국주의'를 끝내줄 것인지, 아니면 또 한 번 경제학의 내성을 길러줄 자극이 되어줄 것인지 주목해 볼 테다.
그의 관점은 순수한 지적인 문제에서는 너무나 급진적이었던 반면, 문화라는 문제에서는 그야말로 에드먼드 버크식의 철저한 보수주의자였다. (374쪽 - 375쪽) ; 케인스에 대한 이 chapter는 그의 저서 몇 부분과, 그에 대한 걸출한 전기로 채워져 있다. 이 문장은 그 외의 출처에서 비롯된 몇 안 되는 부분의 하나. 보통 사람들은 순수한 지적인 문제에서는 철저히 보수적이면서 문화라는 문제에서는 너무나 급진적인 경우가 많다.
슘페터는 역사에서 특별한 능력을 가진 소수의 개인인 엘리트의 중요성을 믿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중략) 변화와 발전을 서술하는 역사는 사회의 활력 없는 대중에게 엘리트들이 끼친 영향을 쓴 이야기이다. (중략) 리더는 바뀌겠지만 리더십은 바뀌지 않는다. (중략) 슘페터가 말하는 소수는 혈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성과 의지'에 의해서 선택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그들은 재능을 가진 귀족이며, 슘페터가 속한 엘리트 그룹이다. (405쪽 - 409쪽) ; 그 자체로 온전히, 플라톤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