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의 철학자들 - 위대한 경제사상가들의 생애, 시대와 아이디어
로버트 하일브로너 지음, 장상환 옮김 / 이마고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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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경제학의 역사를 正-反-合의 과정으로 그려보자. 正1과 反1이 지양되어 合1이 되고, 合1이 곧 正2가 되고 이에 反2가 생겨 다시 合2가 되는 무한과정을 그려보면, 우리가 지금 배우고 있는 경제학 교과서는 合N-1, 즉 正N이라고 부를 수 있겠고, 이를 체계적으로 설명한 하나의 틀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正1, 正2, 正3, ... 正N을 나열한 것을 경제학사라고 부를 수 있겟다. 이 책의 흥미로운 점은 反1, 反2, 反3, ... 反N을 나열하여 경제학사를 꾸몄다는 점이다.

 

장점이라면, 문제제기를 하는 입장의 학자들을 다루고 있으므로 주제 자체가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는 점, 그리고 현재 우리가 배우는 경제학의 어떤 개념의 역사적 맥락을 들여다보기 쉽다는 점, 현재의 경제학에 대한 새로운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해 준다는 점 등을 들 수 있겠다. 단점이라면, 현재의 경제학이 다수의 지지를 얻게 된 이유를 소홀히 한 채 넘어가기 쉽고, 각 chapter와 chapter 사이의 연결고리가 빠질 수 있으므로 서술의 일관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일반론은 이쯤으로 하고, 이 책 자체의 매력을 부인하기 어려운데, 각 시대별로 사회적 배경을 충실히 소개하고, 당대의 주류 논의를 요약한 후 자신이 주인공으로 삼은 학자들의 견해를 논리 순서대로 잘 요약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읽히면서 얕지 않다. 상당량의 독서가 뒷받침되었음을 알 수 있다.

 

번역 역시 거의 흠잡을 데가 없다. 사실 한국 독자의 입장에서 이 책(의 번역본)은 이중의 창을 가지고 볼 수밖에 없다. 저자 하일브로너가 경제학 및 경제학자들을 바라보는 창이 있고, 다시 그 하일브로너를 바라보는 역자의 창이 있다. 하일브로너는 명백히 어떤 의도를 가지고 여러 학자들을 선별한 것이며, 그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이고, 역자 역시 이런 하일브로너를 선택한 의도가 있다. 하일브로너, 그리고 역자는 세세한 역사적 고증을 통해 현재 우리가 배우고 있는 '주류' 경제학이 실은 앙상한 논리 위에 서 있을 뿐일 수도 있고, 주류경제학이 취하고 있는 정합적인 방법론 때문에 역설적으로 빠뜨리고 있는 논의가 있다말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이러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저자와 역자는 함부로 개입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실로 담담한 문체로 설명을 이어간다. 이 점이야말로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을 읽고 경제학을 모두 이해했다고 보는 것은 만옹일 것이며, 위험하기까지하다. 경제학의 주류를 꿰뚫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러나 수학공식으로 점철된 미시경제학과 거시경제학 교과서에 지칠 때쯤, 공부하는 이의 머리를 좀더 시원하게 해 주고, 경제학 교과서를 모두 이해해 버린 다음에도 여전히 공부할 거리가 많다는 희망(!)을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이런저런 '효용'을 다 제치고, 즐거운 독서를 제공한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책이다.

 

 

인상적인 부분 혹은 사소한 시비

 

오랜 시간 동안 인간은 이렇게 전통이나 명령이라는 해결책에 따라 자신의 생존문제를 다루어왔다. 그리고 문제를 이러한 방식으로 다루는 동안에는 '경제학'이라는 특수한 연구분야가 생겨날 수 없었다. (24쪽) ;

여기에서 저자의 관점이 드러난다. 저자는 경제학이라는 것을 자유, 경쟁, 시장 등이 복합된 '근대'의 체제 속에서의 경제현상을 경제학의 대상으로서의 경제에 한정하고, 이를 '전체적으로' 바라보고 싶어한다. 즉 현재의 경제학이 다루는 범위보다 대상의 시간적 범위는 좁히고, 이에 대한 분석은 더 넓혔다. 이를 역자는 "그는 자본주의를 단순히 '경제체제(economic system)'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사회조직(regime)'으로 파악할 것을 제안한다"고 정리하고 있다(역자후기, 462쪽).

그런데 사실 자본주의란 economic system 외에 democracy라는 political system 및 international law와 같은 global system 등이 복합된 modern한 reigme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사실, 자본주의라는 체제를 꼭 경제학이라는 이름으로만 분석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같은 관점에서 역자가 소개하고 있는 로버트 머튼 솔로(Robert Merton Solow)의 지적은 의미가 있다. 그는 "경제학이란 기본적으로 희소성을 다루는 학문으로서 자본주의사회 이외에도 적용될 수 있으며, 설사 자본주의체제라 하더라도 모두 동일한 것이 아니라 여러 유형이 있다고 반박한다."(역자후기, 458쪽). 예컨대 賣買라는 계약의 형태가, 그리고 이를 규율하는 私法이라는 법적 장치가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세계가 정말로 이런 식으로 움직일까? 애덤스미스의 시대에는 바로 그렇게 움직였다. (중략) 그리고 오늘날은? 경쟁적 시장기구가 아직도 작동하는가? 이것은 간단히 답할 수 없는 문제이다. 시장의 성격이 18세기 이후 크게 변화했기 때문이다. (75쪽) ; 당연하지만 사람들이 쉽게 넘어가는 논리이다. 애덤스미스는 뛰어난 사람이지만, 그의 견해를 200년이 지난 오늘날에 그대로 적용해도 될 만큼 전지전능한 존재는 아니다. 그 때와 지금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알아야 함은 기본이다.

 

스미스는 정부가 복지법안을 가지고 간섭해 올 때 정부가 시장체제를 약화시킬 것인가 강화시킬 것인가 하는, 후대 경제학자들에게 지적인 고민을 안겨주는 문제에는 직면하지 않았다. 그의 시대에는 빈민구호를 제외하고는 복지법안이라는 것이 사실상 없었다. (89쪽) ; 시장경제체제에서 정부라는 주체의 개입정도를 논의하는 데 애덤스미스를 끌어들이는 것은, 무모한 시도일 수 있다.

 

아마 애덤스미스처럼 자신의 시대를 완전히 포괄한 경제학자는 다시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침착하고 완고함에 빠지지 않고 악의를 품지 않으면서 철저히 비판적이며 몽상적 이상에 빠지지 않고서도 낙관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94쪽) ; 사실, 오늘날 뛰어난 경제학자들 상당수는 애덤스미스와 비교할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시대를 완전히 포괄한 사람들일 것이다. 다만 그들이 경제학회지에 싣는 글은 철저히 경제학적 방법론에 기반을 둔 것일 터. 어떤 학자가 경제학도 치밀하게 파고들면서 법학도, 인문학도 마찬가지이며, 직면한 문제에 대해 어느 방법론이든 자유롭게 구사하면서 답을 찾아간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닌가. 아무튼 애덤스미스에 대한 저자의 상찬은, 조금 과도해 보이기는 해도, 보기 싫지 않다. 부럽고, 배우고 싶다.

 

이상하게도 현실세계의 일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학구적인 맬서스였고, 이론가로서의 면모를 보인 것은 실무적 인간인 리카도였다. (중략) 따라서 그들은 매사에 논쟁을 벌였다. (중략) 그런데 신기하게도 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였다. (108-111쪽) ; 그러기에 둘 다 좋은 학자로 기억되는 것일 터이다.

 

사실 우리가 자본주의경제라고 부르는 구조 이외에, 스미스와 맬서스 그리고 리카도의 비전 가운데 들어 있는 또 다른 공통요소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은 노동계급을 본질적으로 수동적인 존재로 보는 시각이다. (중략) 이 문제는 다음 장에서 다룰 주제이다. (136쪽) ; 하일브로너의 장점이 이런 부분이다. 그는 역사적으로 우리가 그들보다 뒤에 살았기에 알 수 있었던 사실을 그들이 몰랐노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그저 다음 장에서 다룰 주제일 뿐이다.

 

고백하건데 (173쪽) ; 고백하건대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노동을 착취하는 사업장이 과거의 일이 되어버린 나라에서 잉여가치 개념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저술하던 당시에는 이것이 단순한 이론적 구성물만은 아니었다. (209쪽) ; 잉여가치 개념이 단순히 이론적 개념이 아니라 역사적 개념일 수도 있다는 것. 오늘날 이 개념을 그대로 투영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를 수도 있겠다는 것.

 

마르크스는 그를 향해 바쳐진 모든 우상숭배에도 불구하고 분명 무오류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피할 수 없는 어떤 존재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겠다. 즉 자신이 발견한 사회사상의 대륙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긴 위대한 탐험가인 것이다. (222쪽) ; 마르크스를 '학자'로 보는 저자의 관점. 대체로 동의할 만하다.

 

프랑스에서는 레옹 왈라스(중략)라는 이름의 저명한 경제학자가 수학을 이용해서 시장에 가장 적합하고 정확한 가격을 얻어낼 수 있음을 증명했다. (231쪽) ; 하지만 그러한 가격이 존재한다는 믿음(신앙!)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바스티아는 (중략) 이렇게 썼다. 모든 사람들은 국가의 비용으로 살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들은 국가가 모든 사람들이 부담하는 비용으로 유지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238쪽) ; 탁월한 혜안!

 

마셜이 홉슨과 같이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는 비전을 가지거나 또는 에지워스가 헨리 조지와 같은 사회 불의에 대한 감각을 가졌더라면, 세계는 격렬한 사회변화에 대해 전혀 준비되지 않은 채로 20세기의 대재앙에 부딪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건대 사상이란 그것이 아무리 이단적인 것이라 해도 무시해서는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278쪽) ; 저자의 취향을 잘 설명해준다. 저자는 빅토리아 시대 당대의 주류 경제학자들이 이단적 경제학자들이 가졌던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한다. 그런데 마셜이나 에지워스가 홉슨이나 헨리 조지의 견해를 어설프게 수용했다면 마셜이나 에지워스가 당대에 그 영향력을 갖지는 못했을 수도 있고, 그랬다면 다른 주류학자가 그 지위를 차지했을 수도 있다. 애석한 일이지만, 마셜이나 에지워스의 능력이 그뿐이었다면, 이후에 벌어졌을 대공황을 예측하지 못한 것을 두고 그들을 비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저자 역시 이를 애석하게 생각할 뿐 비난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저자가 이들을 언급함으로써 그 책임을 묻고, 비난하고 싶어하는 것은 현대의 주류경제학(자)일 수도 있겠다.

 

미국의 전문가들은 자신을 가르친 유럽 선생들의 발자취를 따라갔고, 미국 사회를 전혀 맞지 않는 틀에 강제로 집어넣었다. (중략) 한마디로 말해서 공식 세계의 경제학(official economics)은 변호론이었을 뿐, 사태를 제대로 인식할 능력이 없었다. (중략) 필요한 것은 이방인의 눈이었다. (중략) 미국 출생이지만 천성적으로 어느 국가의 시민도 아니었던 소스타인 번드 베블런이라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눈이 있었다. (285쪽-287쪽) ; 그곳에 살면서도 다른 이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예민한 통각을 가진 사람, 구약 시대에는 예언자라고 불렀고, 지금은 지식인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1875년 (291쪽) ; 1857년

 

사물의 본질에 도달하려는 한 가지 결의 이외에는 자신의 견해를 전혀 내보이지 않고 근본문제를 궤뚫어보고 있는 명민한 정신 (297쪽) ; 꼭 배워야겠다 싶은 자세는 아니지만, 분명 매력적이고, 혹은 부럽다.

 

베블런은 '혁명'을 더욱 상세히 설명했다. 결국 일단의 기술자들이 사회로부터 원군을 얻어 혼란한 기업체계를 인수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315쪽) ; 오늘날 미국에서 CEO라는 것은 "강도귀족"보다는 "기술자"에 가까운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을 설혹 은폐라 밀어붙일 수는 있었고, "강도귀족"으로 드러난 자들에 대해 대중과 지식인의 분노가 있다는 것, 이렇게 역사가 진보한다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마르크스처럼 베블런도 영국의 군주제처럼 이 기업체제가 미국이라는 크게 변화된 세계에 얼마나 순응했는지를 진지하게 탐구하지는 않았다. (중략) 그는 생활의 완전한 재배치자 역할을 하는 기계가 노동자의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처럼 기업가의 본질을 바꿔놓을 것임을 파악하지 못했다. (323쪽) ; 체제라는 것이 외부의 자극에 대해 스스로를 변화하여 버티는 힘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인간에게 그러한 능력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세계는, 스스로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을 떠안고 변해간다.

 

베블런은 인간에 내재한 난폭성과 창의성이 합리하의 외투 아래 질식되도록 만드는 '경제법칙'으로는 인간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아첨이 덜한 고고학이나 심리학 같은 보다 근본적인 어휘로 인간을 다루어야 한다고 말했다. (325쪽) ; 그런 의미에서 이른바 행동경제학자들은 베블런의 가장 충실한 제자들일지도 모르겠다. 심리학이 과연 경제학의 '제국주의'를 끝내줄 것인지, 아니면 또 한 번 경제학의 내성을 길러줄 자극이 되어줄 것인지 주목해 볼 테다.

 

그의 관점은 순수한 지적인 문제에서는 너무나 급진적이었던 반면, 문화라는 문제에서는 그야말로 에드먼드 버크식의 철저한 보수주의자였다. (374쪽 - 375쪽) ; 케인스에 대한 이 chapter는 그의 저서 몇 부분과, 그에 대한 걸출한 전기로 채워져 있다. 이 문장은 그 외의 출처에서 비롯된 몇 안 되는 부분의 하나. 보통 사람들은 순수한 지적인 문제에서는 철저히 보수적이면서 문화라는 문제에서는 너무나 급진적인 경우가 많다.

 

슘페터는 역사에서 특별한 능력을 가진 소수의 개인인 엘리트의 중요성을 믿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중략) 변화와 발전을 서술하는 역사는 사회의 활력 없는 대중에게 엘리트들이 끼친 영향을 쓴 이야기이다. (중략) 리더는 바뀌겠지만 리더십은 바뀌지 않는다. (중략) 슘페터가 말하는 소수는 혈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성과 의지'에 의해서 선택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그들은 재능을 가진 귀족이며, 슘페터가 속한 엘리트 그룹이다. (405쪽 - 409쪽) ; 그 자체로 온전히, 플라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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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니까 청춘이다 - 인생 앞에 홀로 선 젊은 그대에게
김난도 지음 / 쌤앤파커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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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이 책을 읽고 위로를 얻을 것이다. 따뜻하고, 보살펴주는 저자의 문체는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는 20대에게 분명, 위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조금 여유가 있다면, 그냥 위로를 얻는 데서 그치지는 말기를. '한땀한땀' 책의 내용을 되새기면서, 내 삶을 바꾸어나가는 계기로 삼기를.  

삶, 을 살면서. 그래, 그 삶을 사는 것은 바로 나이고, 그렇다면 질문의 시작은 내가, 누구인가, 그리고 무엇을 바라며, 어떻게 해야 행복할 것인가로 시작될 것이며,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나는, 어떻게 내 삶을 적극적으로 만들어나갈 것인가, 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20대는 너무 바빠서, 자기를 돌아볼 틈도 없고, 한가로이 책을 읽을 시간도 없다고, 착각한다. 없는 시간을 내어 이 책을 읽으며, 자기를 돌아보기를, 권한다. 무턱대고 달리지 말고, 한 번쯤 숨을 크게 들이내쉬며, 자기가 지금 어디쯤 서 있는지, 어디로 갈 것인지를 생각, 생각, 생각하는 계기로 삼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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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좌파 : 세 번째 이야기
김규항 지음 / 리더스하우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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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이래야 한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 우리는 서로 대화를 나누어야 하고, 이를 통해 '우리'의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저런 이유로 대화를 피한다. '정치적 입장'의 차이라느니 '코드'라느니 '스탠스'라느니 하는 말로 둘러대지만, 사실은 자신의 욕심을 숨기기 위해 말을 이용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 그 단어들, '진보적'이니, '보수적'이니, '좌'니' '우'니 기타 등등 여러 현란한 '가치'들, 이것이 각자가 의미하는 바가 있겠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이런 단어들은 단지 나와 너를 가르고, 내가 너를 이기려고 하는데 사용하기 위한 무기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시작될 수 없다.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내가 지금 뱉어내는 이 말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며, 따라서 상대방과 이야기를 통해 내 견해가 수용될 수도, 설득당할 수도, 조정될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그 말이 다시 내 생각과 같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김규항이라는 사람은 여지껏, 자기가 뱉어내는 말이 곧 자기가 생각하는 바와 같음을 삶으로 입증해 왔고, 하여, 이 당연한 것을 실천하였으므로, 존중받아야 한다.  

남을 속이기 위한, 혹은 더 가련하게도, 심지어 자신을 속이면서도, 자신이 속는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많은 지식인, 인 척 하는 사람들, 가운데 김규항의 글은 빛난다. 

인상적인 부분들 

개혁이란 "사회문화적 표피를 변화시키지만 경제 질서와 계급 관계라는 본질은 끝없이 후퇴시킨다"는 내 의견 (28쪽) ;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전문가들(혹은 직업인)력에 의해 '개혁'이 이루어지고 있다. 늘 같아 보이는 가운데, 사실 더 나은 방식으로 제도를 바꾸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그 가운데에는 언론의,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는 것도 있지만, 사실 대단히 중요한 문제임에도, 그것이 '전문성'의 외피로 감춰져 있기에 눈에 띄지 않는 경우도 많다. 개혁이라는 것은 개혁'주의자' 혹은 '개혁세력'을 자처하는 자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이 전제에서, 이것이 경제 질서와 계급 관계라는 본질을 끝없이 후퇴시킨다고 보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하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한 문장의 질문에 한 문장으로 답을 하라면, 용기를 내어, 답을 유보하는 쪽을 택하겠다. 

회개란 교회에 안 가던 사람이 교회에 나가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뒤집는 것'이다. (36쪽) ; 예수와 교회에 대한 김규항의 통찰은 단호하고, 인상적이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주류 사회의 가치관에 오염되어 있으며 그 오염된 가치관으로 다시 우리의 운동을 평가하곤 합니다. (중략) 운동의 성과나 전망을 평가하는 유일한 잣대는 진보성입니다. (46쪽) ; 어디 '운동'에 한정되는 것이겠나. 세상에 대해 말한다는 것을, 가시적 성과를 가지고 말하는 것은 배움을 구부려 세상에 아부하는 것의 시작이다.  

주사파가 문제인 건 그들이 계급보다 민족을 우선시하거나 마르크스보다 김일성을 위대학 여겨서가 아니다. (중략) 주사파가 문제인 건 그들이 남한 인민도 북한 인민도 아닌 북한 정권을 무작정 따르기 때문이다. (97쪽) ; 여기서 밑줄그어야 할 단어는 '무작정'이다. 

옛날엔 보수적인 부모도 "동무들과 서로 돕고 양보할 줄 알아야 사람이다"라고 가르쳐다. 그러나 이젠 진보적이라는 부모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중략) 보수와 진보가 한 몸이 된 이 미친 행진을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공멸'뿐이다. (111-113쪽) ; 디스토피아, 머지 않아 현실이 될. 

천황제의 특징은 천황을 신처럼 떠받들면서도 정작 천황이 누구인가는 상관이 없다는 데 있다. 일본 천황이 누군지도 모르는 한국인이 영락없이 천황제의 신봉자처럼 살 수도 있는 것이다. 곰곰이 살펴보면 우리 안의 천황제는 아주 많다. (150쪽) ; 여기에서 역시 밑줄그어야 할 단어는 '누군지도 모르는'이 되겠다. '맹목성'이 사람을 망친다. 

아이들은 연예인이 자유롭고 편안하면서도 물질적으로 아주 잘 나가는, 근사한 삶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194쪽) ; 혹은 '열심히 할 ' 대상을 잃은 아이들에게 몇 안 되는 성공 모델이어서일 수도 있다.  

현실사회주의가 패망한 건 그게 사회주의라서가 아니라 전제정이었기 때문이다. (198쪽) ; 동의. 마찬가지 맥락에서 자유주의를 참칭하며 폭주하는 어떤 체제가 전제정으로 치닫는다면 이에 반대하여야 한다는 점에도 동의. 어려운 문제는, 사회주의는 전제정으로 치닫을 만한 속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지적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가이다. 

게다가 이 빌어먹을 사교육 사업의 주역들은 모조리 386 운동권 출신들이다. (215쪽) ; 어렵지 않게 돈을 벌어, 그 돈을 조롱한다. 가슴 아픈 역설. 

세상의 모든 시위는 결례다. (259쪽) ; '때문에 그 제한에 한계가 없다'고 말해서도 안 되며, '때문에 그 결례에 한계가 없어도 된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나는 그들이 인민에게 지지와 연대를 호소하기 전에 그들 자신을 되돌아보길 바란다. 언제나 인민에게서 '기자님', 'PD님'이라 불리는 그들은 정작 인민에게 뭘 했는지 되돌아보길 바란다. (278쪽) ; 스스로 사회적 강자임에도 약자들의 도움을 구하려면, 자신이 강했을 때 그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어야 한다. 

그 아이들은 정말 앞선 걸까? 부자 부모 덕에 우리 아이들을 따를 수 없이 앞서가는 그 아이들은 정말 '인생에서도' 앞선 걸까? (305쪽) ; 감정을 제거하고, 학문의 입장에서만 보더라도, 조기에 나가는 것이 더 많이 가는 것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든지 증명할 수 있다. 사회가 이상한 열기에 휩싸여 있다. 

인텔리들은 뭐가 옳은가를 해명하느라 아무것도 안 하는 경향이 있다. (327쪽) ; 아프다. 

예수는 그런 모든 면들을 뒤섞거나 절충한 인물이 아니라 그런 모든 면들이 함께 존재하는 사람이다. (327쪽) ; 이해하기 어렵나? 물리학의 '차원'으로 설명하면 조금 더 쉬울 수도.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고독하다. (372쪽) ; 어디선가 김훈이 같은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둘이 사이가 좋을 것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냄새가 날 것 같다. 같이 자전거를 타면서 놀면 친해질 수도. 

그가 말하는 '교육 문제'란 실은 '대입 문제'를 뜻한다. (389쪽) ; '교육 문제'에 대해 말하고 싶다. 

어설프게 수련한 사람들일수록 현실 사회문제를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 (중략) 색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중략) 눈에 보이는가 안 보이는가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중략) 예수와 석가가 인민 속에서 중생 속에서 부대끼며 살았던 건 수련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418쪽) ; 동감 

갈수록 책을 책으로만 읽는 이들이 많아져 걱정이다. (중략) 제 지식과 정보를 모조리 긁어모아 피상적인 리뷰를 교환하는 인터넷 시대의 애서가들 (중략) 그들이 '김규항의 신간'에 기대하는 건 '자극과 카타르시스'다. (493쪽) ; 미안합니다. 자극과 카타르시스에 머무르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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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과 정부 - 경쟁과 협력의 관계
이준구 지음 / 다산출판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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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구 교수는 "잘 팔리는" 경제학 교과서의 저자로도 이름이 높다. 그 교과서들은 가급적 쉬운 설명틀을 유지하면서, 수학 공식보다는 직관을 강조하여, 상식으로부터 깊이 있는 이론의 분석까지 시도하는 점이 돋보인다. 학부 수준에서의 강의뿐 아니라 급변하는 경제현상들과 경제이론에 대해서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는지라, 그 긴장과 특유의 설득력 있는 문장이 결합하여 경제학 문외한에게도 흥미로운 책을 지속적으로 출간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새 열린 경제학"도 탁월한 책이다.

한편 이준구 교수의 "칼럼"에 대해서는 다소 불만이 있다. 조금 논리가 성기거나 거친 면이 있고, 단정적인 부분이 있다. 호흡을 길게 가져가기 어려운 칼럼이라는 장르의 성격 때문일 것인데, 간혹 파격적인 아이디어들을 담고 있음에도 그만한 논거가 열거되어 있지 않아 아쉬울 때가 많다.

이 책은 "시장과 정부"라는 제목 그대로 시장 영역과 정부 영역이 경제영역에서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일반론(제 I 부)과 이를 바탕으로 한 정책제언(제 II 부)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 I 부는 그대로 학교에서 교재로 사용해도 될 만큼 정돈되어 있고 이해하기 쉬우며 깊이를 놓치지 않고 있다. 반면 제 II 부는 약간 산만하고 다소 듬성듬성하다. 한 chapter가 대여섯 페이지인데, 100페이지 정도로 늘렸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이다.


인상적인 부분 혹은 사소한 시비

시장은 지금까지 사람이 만들어낸 제도 중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13쪽) ; "시장"을 너무자 自然的인, 따라서 인간 본성에 기반을 둔 것이어서 더 이상 어찌 거역할 수 없는 것처럼 여기는 시각이 있고, 경제학에서 하나의 신화를 만들었다. 과거에는 역사학, 사회학이 이 신화에 도전하였다면, 최근에는 심리학적 연구 성과들이 바로 그 "본성" 부분을 건드리고 있다(이른바 "행동경제학"). 하지만 생각해 보면 시장은 "제도"이고 이는 헌법(constitution) 내지 법(law)의 영역이다. 모종의 가정을 더한다면 인간의 "합의"에 의해 만들어낸 것이라고 보아도 좋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합의에 의해 어떠한 "제도"도 마음대로 변경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정부의 개입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가격기구의 조정기능에 큰 신뢰를 갖고 있다. (63쪽) ; 그렇다면 이는 "믿음"의 문제인가? 놀랍게도 그렇다고 한다.

가격기구의 조정기능이 얼마나 믿을 만한지에 대해 경제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려 있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와 같은 견해의 차이는 '믿음'의 차원에 속하는 문제처럼 보인다. 왜냐 하면 양측 모두 자신의 견해가 분명히 맞는다는 명백한 증거를 갖지 못한 채 논쟁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64쪽) ; 그렇다면 증거를 충분히 획득하고, 나아가 전제를 재검토해서 문제 자체의 문제를 점검하는 것이 현시대의 과제가 될 것이다.

공공재를 얼마만큼 생산하는 것이 바람직한지는 결국 국민의 생각에 달려 있다. 따라서 정부는 국민의 의견을 종합해 어느 수준이 적합한지 알아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국민이 이에 대해 정직한 의견을 말하지 않을 수 있다는 데 있다. (78쪽) ; 경제학자들은 명백히 의식하고 있지는 않겠지만, 이 부분 대의제의 필요성에 대한 입증이다.

관료들은 본질적으로 예산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106쪽) ; 기업의 CEO가 주주이익 극대화보다 회사규모 확대에 더 관심을 갖게 되는 현상도 비슷하다.

어떤 개인이 건전하지 못한 행동을 한다고 해서 정부가 이를 모두 막아야 할 이유는 없다. (중략) 지금 당장 대마초 같은 마약을 합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결코 아니다. (중략) 그러나 이에 대한 논의 그 자체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136쪽-137쪽) ;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하여 개인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건전하지 못한 행위를 정부가 모두 막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건전하지 못한 행위는 법을 동원해서라도 정부가 막아야 한다는 것이 공동체의 의사(will)인 경우가 많다. 술/담배를 허용한다는 것이 마약 금지를 불평등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규제가 시작되는 점에서 효과면에서는 양자간 질적 차이가 발생하게 되나, 양적 차이의 스펙트럼으로 존재하는 해악의 경우 어느 선에서인가 결단을 통해 규제를 시작해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안전띠를 매는 일에 대해 정부가 방관만 하고 있으라는 말은 아니다. 안전띠를 매야 하는 이유를 부단히 설득해 쓸모 없는 죽음을 맞지 않도록 유도할 필요는 있다. (146쪽) ; 그 설득의 비용/편익보다 단속의 비용/편익이 우월하다면 후자가 합리적이지 않을까?

카지노 이용자를 부유층으로 한정한다는 것은 일정 금액 이상의 돈을 가져오는 사람에게만 카지노 입장을 허용한다는 뜻이다. (152쪽) ; 빚을 내서라도 입장할 사람은 막지 못하고, 카지노의 배만 불려줄 수도 있다.


흡연자는 담배 소비를 줄임으로써 세금 부담을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159쪽) ; 같은 논리라면 복권 구매자도 구입을 줄임으로써 역진적 세금부담(151쪽 참조)을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을 갖고 있다.

총제적 소득(161쪽) -> 총체적 소득

명백한 범법행위를 하는 데도 모른 체하는 것은 더 나쁜 일이다. (175쪽) ; 범법행위를 신고해야 할 윤리적 의무가 있을까? 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많다.

실질적인 의미에서 가파라치는 계약직으로 고용된 교통경찰이라고 말할 수 있다. (177쪽) ; 바로 이 지점이 위험하다. 국민들에게 침익적 처분행위를 하는 공무원을 계약직으로 고용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이 논리는 부유한 가정과 가난한 가정의 자제가 똑같은 확률로 명문 고등학교에 들어간다는 매우 비현실적인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 (199쪽) ; 꼭 그렇게 볼 것은 아니다. 소위 비평준화 고교의 정원이 현재의 이른바 특목고 정원보다 상대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평준화 제도를 유지하는 동안 한 지역에서 이른바 명문고등학교가 다수 생길 가능성도 늘 열려 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지금 체제보다 가난한 가정의 자제가 이른바 수월성 교육을 받을 기회가 늘어나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비평준화 제도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지방에서의 학연을 중심으로 한 견제불가능한 권력 카르텔이 구축될 가능성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자세히 논할 만한 것은 아니다.

물가안정, 서민생계 보호, 국제경쟁력 강화 등은 삶의 질을 가져올 수 있는 수단으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지, 그것들 자체가 궁극적 목표가 될 수는 없다. (224쪽) ; 결국 가치를 형량/조정해야 할 문제이다. 누군가에게는 당장의 버스요금이 장래의 건강보다 중요할 수 있다.

어느 정부라 하더라도 감히 이들의 저항에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둘 수 없으리라고 보는 것이 나의 솔직한 생각이다. 그러나 개혁을 하려 해도 아이디어가 없어 할 수 없다는 말만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265쪽) ; "저항"이 반드시 유형적/물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이를 "무릅쓰는" 것이 "의지"만으로 가능한 것도 아니다. 사회적 저항의 원인을 연구하고 이를 극복할 합리적 방안모색까지 "아이디어"의 범주에 포함된다.

부동산은 누가 어느 것을 보유하고 있는지가 바로 드러나기 때문에 오히려 소득보다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259쪽) ; 하나 더 남는 문제는 소유와 사용/수익의 주체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문제는 변칙적인 상속증여 행위를 하는 사람들까지 선의의 납세자고 보기는 힘들다는 데 있다. (275쪽) ; 그러나 다른 문제는, 선의인지 악의인지를 판단하는 주체가 정부, 구체적으로는 공무원 개인이며, 그 판단에 자의가 개입할 여지가 많다는 사실이다.

형식논리에 얽매여 조세법률주의에 어긋나는 그 어떤 것도 허용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런 설득력이 없다. (275쪽) ; 이렇게 헌법적 가치를 무시할 수는 없다. 이 부분은 조세법률주의에서 요구하는 "명확성"의 정도를 어떻게 완화할 것인가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반대논리가 좀더 큰 설득력을 가지려면 현행의 상속증여세 운영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구제적인 (-> 구체적인) 증거를 대야 한다. (277쪽) ; 입증책임은 개혁을 주장하는 쪽이 부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단 일을 벌여좋고 보자"(230쪽 참조)는 식이 될 수 있다.

우선 누가 진정한 기업의 주인인지부터 분명하게 밝혀져야 한다. (282쪽) ; 이 부분에 대한 답은 쉽다. "주주"이다. 다음으로 밝혀여쟈 할 더 어려운 과제는 진정한 주인의 의사(will)와 이익(interest)간에 무엇을 더 우선시해야 하는지이다. 주주의 경영참여, 배당금, 매도차익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기도 하지만 상충하는 경우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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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없는가 - 종정 법전스님의 수행과 깨달음의 자서전
도림 법전 지음 / 김영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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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에도 법전스님은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언론에 많이 노출된 것도 아니고 베스트셀러를 저술한 바도 없다. 이번에 구술하여 내어놓은 자서전은, 담담하고 카랑카랑한 문체로 쓰여 있는데, 이런 점이 많은 이들에게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한국의 '불교'라는 '종교'는 솔직히 외부에서 볼 때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많다. 재산이나 권력, 지위 등을 두고 이런저런 구설에 자주 휩싸인다. 그럼에도, 한국 禪의 수준은, 분명 예사롭지 않다. 공부의 끝을 보겠다는 각오로 달려드는 훌륭한 스님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전통을 세워 가는 사람들 가운데 법전스님이 있다. 불교 신자이든 아니든, 공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괴로워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법전스님의 자서전은 분명히 울림이 있을 것이다.

인상적인 부분

잘 것 다 자고 먹을 것 다 먹고 시간 나면 잡담하고 그렇지 않으면 시비하고, 도대체 어느 겨를에 공부하겠는가. 부처조차 뛰어넘어야 하는 도의 길이 그리 쉬운 길이라면, 저 수많은 조사들이 무엇 때문에 몇 생을 두고 고행하면서 도의 길에 목숨을 바쳤겠는가. (19쪽) ; 잘 것 다 자고 먹을 것 다 먹고 시간 나면 잡담하고, 그렇지 않으면 시비하면서도 시간은 간다. 그러하지 않은 가운데서도 시간은 간다. 선택은 내가 한다. 무엇이 과연 행복한 삶인가.

성대가 좋은 묵담 스님께 3년 동안 절집에서 익혀야 할 염불과 예식을 배웠다. 예식의 일인자에게 예식에 대한 법을 익혔으므로 예법이 정확하고 명료할 수 있었다. (25쪽) ; 예식과 예법은 형식에 불과하므로 버려야 할 것인가? 그렇다면 法은 어디서 구할 것인가? 예법은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정확하고 명료해야 하는 것이다. 에법이 문제가 아니라 정확하지 못하거나 명료하지 못한 예법이 문제이다.

묵담 스님에게 옷 한 벌을 받아들고 말없이 올라가는 인곡 스님의 청빈한 뒷모습을 바라보던 내 가슴엔 언제나 서늘한 한 줄기 바람이 지나가곤 했다. (31쪽) ; 따르고 싶은 사람을 보았을 때의 느낌이 그러하다. 서늘한 한 줄기 바람.

머리를 깎았다고 다 승려가 아니요, 먹물 옷을 입었다고 모두 승려일 수 없다. (41쪽, 만암 스님의 말) ; 교회에 다닌다고 다 예수의 제자가 아니고, 학교에 다닌다고 다 학생이 아니며, 학위를 받았다고 다 학자가 아니다.

나는 자신을 낮추는 자세가 모든 일을 관통하게 하는 큰 힘이라는 것을 배웠다. (43쪽) ; 김수환 추기경은 자기를 바보라 하였고, 예수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었더라.

궁궐 같은 곳에서 재워주고 이렇듯 좋은 음식을 주는데 왜 공부하지 못하는가? (45쪽) ; 어쩌면 궁궐 같은 곳과 좋은 음식이어서 공부가 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노장을 처음 대했을 때 (중략) 태산을 만난 듯했다. (55쪽) ;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은 감사할 일이다. 그런데

배운 사람이 투철한 발심을 하면 스스로 스승을 찾게 된다. (59쪽) ; 즉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이 단지 행운일 따름이라 여긴다면 나무 아래에서 과일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하여

법을 위해 눈 속에서 용맹정진하고 제 팔까지 끊는 입설단비立雪斷臂의 신심으로 초조 달마 대사의 법을 이은 이조 혜가의 이야기는, 공부 길이 얼마나 힘들고 스승을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고 있다. (59-60쪽) ; 그러나

혜가 선사가 법을 얻은 것은 지극한 신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인연이 이미 익어 바늘 끝으로 겨자씨를 뚫은 것이지 반드시 팔을 끊었기 때문은 아니다. (60쪽) ; !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나는 오히려 살아 숨 쉬는 생동감을 얻었다. (67쪽) ; 自律 속에서 自由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뭐라 한마디도 말할 수 없었다. 앞뒤가 꽉 막힌 은산철벽과 같은 순간이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앉아 있자, 갑자기 성철 스님이 달려들어 멱살을 거머쥐었다. 그러곤 밖으로 끌고 나와 물이 담겨 있던 세숫대야를 들어 머리 위에 덮어씌웠다. (69쪽) ; 큰 은혜.

법상에 올라가 말로 일러주는 것만이 가르침은 아니다. 스승은 부처님 법대로 하루 24시간 사는 것을 보여주면 되고 제자는 그것을 보고 마음으로 배우면 된다. 스승은 일상생활에서 인간이 걸어가야 할 바른 행동을 보여주면 된다. (100쪽) ; 언젠가부터 師第라는 관계가 돈을 주고 지식을 사는 관계가 되고, 大學은 이를 중개하는 상인이 된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社會가 무엇을 요구하든, 大學을 중매로 만났든 연구소를 중매로 만났든 당사자들끼리라도 師第의 연을 이어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으리라 바란다.

참회란 무량겁토록 계속해야 해. 자신뿐 아니라 일체 중생을 대신해서 모든 죄를 참회하고, 일체 중생이 모두 불법을 깨달아 참된 삶을 살도록 기원해야 한데이. (106쪽, 성철 스님의 말) ;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때,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라고 비는 것이 그러하다. 인연의 망으로 짜여져 고해인 세상에서, 혹은 원죄로 고통받는 세상에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함을 믿을 때 어려움에서 벗어날 실마리가 생겨난다.

수행자에게 가장 괴로운 것은 지옥의 고통이 아니라 가사 옷 밑에서 대사大事를 밝히지 못하는 일이라고 했다. (120쪽-121쪽) ; 공부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여야 한다. 한편

수행자에게 화두 없이 캄캄하게 보내는 것보다 더 큰 불효는 없다. (159쪽)

여러 곳의 선방을 옮겨 다니면서 결제를 하게 되면 정신이 해이해지고, '직업적인' 수좌가 되기 쉽다. (186쪽) ; 무서운 말이 아닌가. '직업적인' 수좌, '직업적인' 목사, '직업적인' 신부, '직업적인' 수녀, '직업적인' 학자.

남이 방일할 때 방일하지 않고, 남이 잠잘 때 잠자지 않고, 쓸데없는 소리할 때 쓸데없는 소리 하지 않고, 남들이 건들거릴 때 건드리지 않고, 누가 보더라도 '저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할 정도로 노력해야 한다. (226쪽) ; 수월치 않아 보이는 길이 우월한 길이다.

오랜 세월, 가야산의 사자 역할을 하면서 총림의 구심점이 되었던 성철 노장께서 1993년 11월에 입적하였다. (231쪽) ; 스승의 죽음에 대한 유일한 기사이다. 성철 스님은 좋은 제자를 두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의 신심은 진정한 신심이 아니고 호기심이다. 어떤 때는 신심이 났다가 어떤 때는 신심이 떨어지는 것은 진정한 신심이 아니다. (237쪽) ; 호기심만으로는 공부를 이룰 수 없다.

나의 노파심인지 몰라도, 요즘 사람들은 행行에 걸림이 없다는 것을 막행막식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행에 걸림이 없다는 것은 이치에 걸림이 없다는 뜻이다. 이성과 접하고 고기를 먹고 술을 마셔도 괜찮다는 게 아니다. (249쪽) ; 공자가 從心所慾하더라도 不踰矩하더라고 말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단계를 거쳤는지 새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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