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 없는가 - 종정 법전스님의 수행과 깨달음의 자서전
도림 법전 지음 / 김영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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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에도 법전스님은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언론에 많이 노출된 것도 아니고 베스트셀러를 저술한 바도 없다. 이번에 구술하여 내어놓은 자서전은, 담담하고 카랑카랑한 문체로 쓰여 있는데, 이런 점이 많은 이들에게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한국의 '불교'라는 '종교'는 솔직히 외부에서 볼 때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많다. 재산이나 권력, 지위 등을 두고 이런저런 구설에 자주 휩싸인다. 그럼에도, 한국 禪의 수준은, 분명 예사롭지 않다. 공부의 끝을 보겠다는 각오로 달려드는 훌륭한 스님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전통을 세워 가는 사람들 가운데 법전스님이 있다. 불교 신자이든 아니든, 공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괴로워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법전스님의 자서전은 분명히 울림이 있을 것이다.

인상적인 부분

잘 것 다 자고 먹을 것 다 먹고 시간 나면 잡담하고 그렇지 않으면 시비하고, 도대체 어느 겨를에 공부하겠는가. 부처조차 뛰어넘어야 하는 도의 길이 그리 쉬운 길이라면, 저 수많은 조사들이 무엇 때문에 몇 생을 두고 고행하면서 도의 길에 목숨을 바쳤겠는가. (19쪽) ; 잘 것 다 자고 먹을 것 다 먹고 시간 나면 잡담하고, 그렇지 않으면 시비하면서도 시간은 간다. 그러하지 않은 가운데서도 시간은 간다. 선택은 내가 한다. 무엇이 과연 행복한 삶인가.

성대가 좋은 묵담 스님께 3년 동안 절집에서 익혀야 할 염불과 예식을 배웠다. 예식의 일인자에게 예식에 대한 법을 익혔으므로 예법이 정확하고 명료할 수 있었다. (25쪽) ; 예식과 예법은 형식에 불과하므로 버려야 할 것인가? 그렇다면 法은 어디서 구할 것인가? 예법은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정확하고 명료해야 하는 것이다. 에법이 문제가 아니라 정확하지 못하거나 명료하지 못한 예법이 문제이다.

묵담 스님에게 옷 한 벌을 받아들고 말없이 올라가는 인곡 스님의 청빈한 뒷모습을 바라보던 내 가슴엔 언제나 서늘한 한 줄기 바람이 지나가곤 했다. (31쪽) ; 따르고 싶은 사람을 보았을 때의 느낌이 그러하다. 서늘한 한 줄기 바람.

머리를 깎았다고 다 승려가 아니요, 먹물 옷을 입었다고 모두 승려일 수 없다. (41쪽, 만암 스님의 말) ; 교회에 다닌다고 다 예수의 제자가 아니고, 학교에 다닌다고 다 학생이 아니며, 학위를 받았다고 다 학자가 아니다.

나는 자신을 낮추는 자세가 모든 일을 관통하게 하는 큰 힘이라는 것을 배웠다. (43쪽) ; 김수환 추기경은 자기를 바보라 하였고, 예수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었더라.

궁궐 같은 곳에서 재워주고 이렇듯 좋은 음식을 주는데 왜 공부하지 못하는가? (45쪽) ; 어쩌면 궁궐 같은 곳과 좋은 음식이어서 공부가 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노장을 처음 대했을 때 (중략) 태산을 만난 듯했다. (55쪽) ;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은 감사할 일이다. 그런데

배운 사람이 투철한 발심을 하면 스스로 스승을 찾게 된다. (59쪽) ; 즉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이 단지 행운일 따름이라 여긴다면 나무 아래에서 과일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하여

법을 위해 눈 속에서 용맹정진하고 제 팔까지 끊는 입설단비立雪斷臂의 신심으로 초조 달마 대사의 법을 이은 이조 혜가의 이야기는, 공부 길이 얼마나 힘들고 스승을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고 있다. (59-60쪽) ; 그러나

혜가 선사가 법을 얻은 것은 지극한 신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인연이 이미 익어 바늘 끝으로 겨자씨를 뚫은 것이지 반드시 팔을 끊었기 때문은 아니다. (60쪽) ; !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나는 오히려 살아 숨 쉬는 생동감을 얻었다. (67쪽) ; 自律 속에서 自由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뭐라 한마디도 말할 수 없었다. 앞뒤가 꽉 막힌 은산철벽과 같은 순간이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앉아 있자, 갑자기 성철 스님이 달려들어 멱살을 거머쥐었다. 그러곤 밖으로 끌고 나와 물이 담겨 있던 세숫대야를 들어 머리 위에 덮어씌웠다. (69쪽) ; 큰 은혜.

법상에 올라가 말로 일러주는 것만이 가르침은 아니다. 스승은 부처님 법대로 하루 24시간 사는 것을 보여주면 되고 제자는 그것을 보고 마음으로 배우면 된다. 스승은 일상생활에서 인간이 걸어가야 할 바른 행동을 보여주면 된다. (100쪽) ; 언젠가부터 師第라는 관계가 돈을 주고 지식을 사는 관계가 되고, 大學은 이를 중개하는 상인이 된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社會가 무엇을 요구하든, 大學을 중매로 만났든 연구소를 중매로 만났든 당사자들끼리라도 師第의 연을 이어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으리라 바란다.

참회란 무량겁토록 계속해야 해. 자신뿐 아니라 일체 중생을 대신해서 모든 죄를 참회하고, 일체 중생이 모두 불법을 깨달아 참된 삶을 살도록 기원해야 한데이. (106쪽, 성철 스님의 말) ;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때,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라고 비는 것이 그러하다. 인연의 망으로 짜여져 고해인 세상에서, 혹은 원죄로 고통받는 세상에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함을 믿을 때 어려움에서 벗어날 실마리가 생겨난다.

수행자에게 가장 괴로운 것은 지옥의 고통이 아니라 가사 옷 밑에서 대사大事를 밝히지 못하는 일이라고 했다. (120쪽-121쪽) ; 공부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여야 한다. 한편

수행자에게 화두 없이 캄캄하게 보내는 것보다 더 큰 불효는 없다. (159쪽)

여러 곳의 선방을 옮겨 다니면서 결제를 하게 되면 정신이 해이해지고, '직업적인' 수좌가 되기 쉽다. (186쪽) ; 무서운 말이 아닌가. '직업적인' 수좌, '직업적인' 목사, '직업적인' 신부, '직업적인' 수녀, '직업적인' 학자.

남이 방일할 때 방일하지 않고, 남이 잠잘 때 잠자지 않고, 쓸데없는 소리할 때 쓸데없는 소리 하지 않고, 남들이 건들거릴 때 건드리지 않고, 누가 보더라도 '저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할 정도로 노력해야 한다. (226쪽) ; 수월치 않아 보이는 길이 우월한 길이다.

오랜 세월, 가야산의 사자 역할을 하면서 총림의 구심점이 되었던 성철 노장께서 1993년 11월에 입적하였다. (231쪽) ; 스승의 죽음에 대한 유일한 기사이다. 성철 스님은 좋은 제자를 두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의 신심은 진정한 신심이 아니고 호기심이다. 어떤 때는 신심이 났다가 어떤 때는 신심이 떨어지는 것은 진정한 신심이 아니다. (237쪽) ; 호기심만으로는 공부를 이룰 수 없다.

나의 노파심인지 몰라도, 요즘 사람들은 행行에 걸림이 없다는 것을 막행막식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행에 걸림이 없다는 것은 이치에 걸림이 없다는 뜻이다. 이성과 접하고 고기를 먹고 술을 마셔도 괜찮다는 게 아니다. (249쪽) ; 공자가 從心所慾하더라도 不踰矩하더라고 말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단계를 거쳤는지 새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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