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목.도둑맞은 가난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11
박완서 지음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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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의 청춘은 불타고 있는가


대학생 때 읽었던 <그 산은 정말 거기 있었을까> 이후 두 번째 접하는 박완서 작가의 작품이다. 이 책에 코멘트를 달자면 “조용히 속삭이는 청춘들, 불 속에서 꿈틀거리다” 정도가 되겠다. 책에 수록된 일곱 작품 모두 ‘6.25 전쟁’을 중점으로 다룬 이야기들로 짜여있다. 이야기 속에는 가난, 가족을 잃음, 거짓말, 부정, 갈취, 도난 당함 등 각종 속된 것들로 가득하다. 구역질 나는 그 속된 것들 속에서도 팔팔 끓는 청춘들은 교훈을 얻는다. 절대 죽지 않는다. 죽지 못해 산다 해도 결국은 끝끝내 살아간다.

<나목>의 주인공 이경은 어느 건물 끝 옥상까지 함께 올라가주고 싶은 존재다. 자신의 모든 가족을 잃고, 진정한 화가(일 거라고 믿는) 옥희도를 사랑하는 이경에게 누가 비난의 화살만을 골라 던질 것인가. 잘못된 선택 가운데서도 ‘죽어야겠다’는 그의 생각은 사그러들지 않는다. 작가도, 플롯도, 독자인 나도 그를 죽이거나 살릴 수 없다. 오롯한 이경의 선택만이 청춘의 작은 불씨를 살려냈다. 결국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시작하는 행동을 통해 인간은 성장형 인간으로서 거듭난다.

<도둑 맞은 가난>의 ‘나’ 역시 전쟁을 담은 운명에 휩쓸린 존재라고 볼 수 있다. 쓰나미에 맞듯이, 그와 함께 할 거라고 생각했던 상훈이 꺼낸 반전의 대사로 인해. ‘나’는 상훈을 내쫓은 이후 방바닥에 드러누워 의욕을 잃어버린다. 과연 그는, 그가 속한 세계는 The end인가? 온가족이 싸늘한 주검으로 누워있는 것을 목도한 이래 ‘나’가 치열하게 가난과 맞서싸운 과정은 다 아무 것도 아니게 되어버린 걸까?

전쟁 역시 특정 성별의 지배욕, 권력욕을 위한 도박판인 것 같다는 생각을 독서하는 내내 지울 수가 없었다. 각자의 서사에 조금이라도 감정이입해버리면 눈물을 쏟아내버릴 것 같았다. 소리라도 대신 질러주고 싶었다. 그 발악해버리고 싶은 마음은 몇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어떻게 보면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전 세대를 아우르는, 긴 실선에 촘촘히 배겨있는 것 같은 청춘은 여전히 불타고 있다. 각자가 원하고 열망하는 목표를, 혹은 다른 지점을 향해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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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랩걸 :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사이언스 걸스
호프 자렌 지음, 김희정 옮김 / 알마 출판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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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자가 격리 기간을 이용해 알라딘에서 1개월 무료로 대여할 수 있는 전자책으로 <랩걸>을 지정했다. 생각보다 진입 장벽이 높은 책은 아니었지만 붙들고 있던 시간이 상당히 길었다(전자책이라 스마트폰으로 감상한 것도 한 몫). 한 사람의 과학도로서의 일대기라는 것은 솔직히 내 관심사 밖이다. 그러나 저자 호프의 삶은 어떻게 보면 내 관심사를 조금 넓혀준 것에 일가견이 있다.


그저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는 방식이 아닌 보통의 일상을 식물이 살아가는 법과 비교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중반부쯤 읽었을 때, 식물에 대한 설명 이후에 호프의 어떤 에피소드가 나올지 예측이 가기도 했다. 이 책은 과거와 미래를 함께 내다볼 수 있는 책이다. 그가 약국에서 일했을 때, 이후 동료 빌과 치열하게 실험해가는 과정은 대학생 때 어떻게든 생계를 이어나가려 했던 내 모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책의 후반부에서 그간의 일들을 정리하는 대목에서 나의 5년 후, 10년 후, 2~30년 후는 어떻게 설계되어야 할지 잠시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마음의 치유 또한 빼놓을 없다. 밑줄 그은 부분들을 다시 읽어보는데, 친한 친구가 건네주는 위로만큼이나 힘이 나는 글귀들이 많았다. 때로는 맛있는 음식이나 재미있는 영화보다도 여러 마디의 문장들이 친근하게 느껴지고, 눈물을 흘릴 눈물을 닦아줄 있는 휴지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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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베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7
서머셋 모옴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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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첫 책: 이토록 마음을 일렁이게 만드는 한 인간의 성장기


본래 고전 작품을 읽는 데 시간이 짧게 소요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인생의 베일>은 오랜 독서 기간 동안 먼지 탄 커튼을 젖혀 커튼 뒤 풍경을 보기 위해 애쓰는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주인공 키티의 짤막한 일대기는 여성으로써, 나아가 인간으로써 겪을 수 있는 최대한의 사건들이 응축됨으로 보는 내내 마음의 동요를 자주 불러일으켰다. 심지어 작품 해설까지 완벽했던 이야기.

이 책의 주요 포인트는 2가지이다. 하나는 키티의 선택, 또 하나는 인간에 한한 종교의 역할이다. 키티는 책의 초반부부터 후반부까지 많은 선택들을 하게 된다. 그의 선택은 불륜으로 인해 처음부터 ‘안돼..’라는 탄식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하지만 부정(Love Affair)이 궁극적으로 그를 성장하게 만들었고, 모멸감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에 힘을 주는 요소가 되었다. 혹자의 이리로 가라, 저리로 가라는 말에 현혹되어서 길 한복판에서 방황할 수도 있겠다마는 키티는 선택을 할 때만큼은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긍정적’이라는 단어에 포장된 모든 언어를 통한 선택보다 비난 받아 마땅한 선택이 난데없이 뿌려진 씨앗에 물을 줄 수 있는 것이다.

키티가 메이탄푸에서 만난 원장 수녀를 비롯한 수녀들은 인간들 위에 군림한 종교라는 것이 삶에 어떤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크리스천의 시각으로 본 수녀들은 내 신앙 생활에도 굉장한 귀감이 된다. 잘 알지 못하는 데서 온 한 사람을 편견없는 눈으로 바라봐주고 그의 말을 모두 귀담아 들어주는 모습은 키티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그는 월터나 찰스에게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단 말이다.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이라는 것을 키티는 바랐던 것이었으나 결국 사랑은 찰스가 아닌 월터에게서 느낄 수 있었다. 지팡이 행세를 하며 인간의 머리를 짓누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발밑에서 겸손을 행하며 사는 삶. 수녀들은 때로는 유머로, 때로는 진중함으로 키티에게 방향성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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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주인공만 모른다 재미있는 영화 클리셰 사전
듀나 지음 / 제우미디어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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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생에 본 영화들에 나왔던 각종 클리셰들이 낯설지 않아 흥미로웠다. 공감성 수치 90% 정도랄까? 사실 제목을 봤을 때 페미니즘적 평론이라고 생각했으나 딱히 그런 느낌을 받지는 않았다. ‘여자 주인공’ 말고도 서사의 흐름을 못 따라가는 인물들은 널렸다. 아마 그 중에서 여주가 대표의 희생양이 된 게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재미있던 점은 낯설지 않은 클리셰가 등장했을 때, ‘이 클리셰는 바로 이런 영화에 등장했었지.’하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는 점이다. 이래서 경험과 습득이 중요한가 보다. 이론 텍스트만 내내 읽다 지칠 때 한 번쯤 접하면 좋은 작품인 것 같다. 단 89개의 클리셰에 지나지 않으니 빨리빨리 읽어낼 것! 끝으로 드라마에 대한 내용도 소개가 되어있으니 영화 덕후, 드라마 덕후 두 마리의 독자를 다 잡을 수 있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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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중인 시체 Corpse on Vacation K-픽션 스페셜 에디션
김중혁 지음, 정이정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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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off : 나는 살아있는 시체입니다.


김중혁 작가가 가진 이야기는 상당히 시각적이다. 워낙에 보기 드문 소재를 가지고 텍스트 랠리를 이어가다 보니 나중에 영화로 만들어진다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비교적 최근 작품인데, 초기 단편 소설들의 느낌이 군데군데 묻어난다. 화자 ‘나’와 주원(가명이다)의 셰익스피어 작품 대사 이어 말하기 같은 소재는 다른 작가들이 표현하기 어려운 유머다.

각설하고 이 이야기는 영화 <무간도>와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가 일구어낸 무간지옥에 들어가 어떻게 죽을지를 궁리하는 주원의 삶은 무간도의 두 주인공 유건명과 진양인의 삶과 데칼코마니를 이룬다. 그 와중에 주원으로부터 버려진 ‘나’ 역시 그와 나눈 대화록을 집에 와서 불태워버림으로 새로운 생애를 마주한다. 게다가 제목은 보통 비범한 게 아니다. 휴가 중인 시체라니. 애초에 시체는 365일 휴가 아닌가..? 책과 영화 모두 어떻게 살 것인지를 죽음이라는 반대의 개념으로 풀어냈다고 느꼈다. 다만 약간의 억지를 섞어 설명하자면 이야기 속 주원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살았을 거라 해도 소위 말하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삶을 꾸역꾸역 갉아먹고 있지 않을까.

다시 제목을 떠올려본다. 과연 여기서의 시체는 누구인가? 주원이 종국에 어떤 수로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 모습이 바로 휴가를 맞은 시체의 모습이 아닐지 의심해본다. 막말로 죽으면 그가 가진 죄책감이 일단은 없어질 거고 그가 ‘나는 곧 죽는다’라는 문구의 플래카드가 붙은 버스를 정처 없이 몰고 다니는, 사회를 향한 속죄 행위도 중단될테니. 반대로 주원이 살아있을 거라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제목이 이야기에 반하게 되는 것인지 생각해보면 그건 아닌 것 같다. 앞 문단에서 언급한 <무간도>의 유건명처럼, 주원과 ‘나’는 사는 동안 저마다의 방법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지옥 세계 속에서 발버둥치며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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