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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에 관한 10가지 신화 - 한울아카데미 537 ㅣ 한울아카데미 537
해럴드 페핀스키 지음, 이태원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드디어 다 읽어치웠다! 상당히 기대를 하면서 골라든 책이었고 책의 내용도 나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읽는내내 얼른 끝내고 싶다는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초반부터 신경을 건드렸던 껄끄러운 번역체가 가장 큰 문제였으리라고 추측한다. 어색한 번역, 번역체라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문장 속에서 눈동자를 굴리다보면 어느새 이게 무슨 소린가, 헤매게 된다. 그러고보니, 한울아카데미 책들이 좀 그렇다. 기획은 좋은데 번역은 별로인.. 열악한 인문사회계열 출판사에 많은 걸 바라는게 무리인 줄은 알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다.
내용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다. 형법에 대한 내용을 다루면 상당히 까다로우리라고 예상되지만 저자들이 글을 쉽고 편안하게 잘 썼다. 평화주의 형법학이라고 일컬어지는 저자들의 입장은 대략 다음과 같이 압축된다.
"(미국의) 형사체계는 제대로 굴러가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벌을 받고 있는가? 벌은 받는 사람들은 적절한 벌을 받고 있는가, 그들은 벌을 받아야 마땅한가?
범죄에 대한 인식은, 노상에서 가시적으로 벌어지는 폭력에 대한 것으로만 집중된다. 사무실에서 -기업이나, 의료계에서, 정부에서-벌어지는 수많은 범죄들은 수사력의 부족과, 더 중요하게는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의 권력 및 유착관계 때문에 묻혀진다. 그에 반해 쉽게 적발되는 하층계급의 범죄는 쉽게 단죄되고 엄격하게 처벌된다. 이런 현상은 가난에 대한 차별, 인종적인 차별 속에서 더욱 공고해진다.
한편 (미국의) 급증하는 감옥을 가득 채우고 있는 대부분의 하층 계급, 유색인종들은 과도한 처벌을 받고 있다. 형법에 의한 처벌은 일반적으로 범죄에 상응하게 결정된다고 믿어지지만 이것은 기만적인 신화에 불과하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거주지, 사회적 배경, 재산, 학력, 직업, 심지어 외모까지 그에 대한 처벌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하층 계급의 불우한 환경과 그에 따른 낙인, 차별적인 법집행이 수많은 투옥자와 전과자들을 만들어내며, 악순환의 고리는 점차 강화된다.
그렇다면 형사체계는 어떻게 바뀌어야 하나. 다소 무리하게 요약하자면, 1. 범죄의 억제는 법체계를 통한 강제로는 본질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처벌에 대한 두려움을 강요하기 보다는, 사회적 관계망의 건강한 구성원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이 범죄를 억제하는데 더욱 효과적이며 바람직하다. 2. 투옥은 더없이 폭력적이거나 비인간적인 범죄자 등 최소한도에 그쳐야한다. 3. 하층 계급이나 열악한 처지에 있는 청소년들이 자신의 에너지를 건강하게 분출할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4. 형사체계에 속한 역량은 훨씬 중대한 범죄들, 즉 기업의 부정이나 폭력같은 화이트칼라 범죄를 막는데로 돌리도록 한다."
써놓고 보니 얼토당토않은 이상론 같아 보이기도 한다. 좀 이상론인건 맞는데, 그렇다고 저자들의 주장이 얼토당토않은 건 절대 아니다. (그렇게 보인다면 제대로 정리를 못한 내 책임) 책에서도 예로 자주 등장하는 스웨덴이나 스위스의 형사체계는 저자들이 주장하는 바에 상당히 근접해있다. 수용소에 죄수 노동조합이 있는 나라. 극소수의 흉악범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수감자들이 어느 정도 출입이 자유로운 감옥(감옥이라고 해도 될까...)에 있고, 정부가 그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을 당연한 의무로 여기는 나라. 무조건적인 처벌이 아니라, 지역 공동체에서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중재를 통해 적절한 해결 (가해자의 의무나 배상을 포함하여)을 꾀하는 나라. 지구상에 현존한다.
이 책의 주장은, 폐지논의가 진행중이긴 하나 국가보안법 같은 것이 아직도 건재하는 나라에서 너무 앞서가는 논설인 듯도 하다. 하지만, '범죄'가 무엇인지, '범죄'는 어디에서 유래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궁극적으로는 이 책의 저자들이 주장하는 형사체계에 전적으로 찬동하는 바이다. 참고로 이 책의 원제는 What causes Crime?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