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연 여성 잔혹사
서명숙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가벼운 잡담 형식이어서 술술 읽힌다.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이 나보다 한 연배 위인 만큼 나조차 아직 겪어보지 않은 극단적인 경험들도 많이 나온다. 아...끔찍해... 술집에서 술마시다가 여자들이 담배피운다는 이유로 술잔을 끼얹어버리는 그런 시대에 산다는 건 대체 어떤 걸까. 상상하기도 싫다.  

그런 한편, 지금 나의 얘기와 별 다르지 않은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아직 나는 학교라는 비교적 자유로운 공간에 있고, 속으로야 무슨 생각을 하든 적어도 담배를 피우는 나를 보고 대놓고 뭐라고 할 남자는 없다. (대신 돌려서 말한다. 나중에 애기가 위험하다느니 건강에 안좋다느니, 너무 많이 피우는 거 아니냐느니...왜 남의 태어나지도 않은 애 걱정을 자기가 해주는지 알 수가 없다. 담배가 남자의 생식능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모르면서 어쩜 여자 몸에 미칠 나쁜 영향에 대해서는 그토록 걱정해주는지. 젠장) 거의 대부분 시간을 학교 내에서 보내니 담배를 피우는데 별다른 불편함이 없다. 하지만 학교 밖에 나가면 사정은 달라진다. 일단 학교 밖에 나가면, 술집 밥집 만화방 이런 벽이 둘러진 곳이 아닌 길가에서는 담배피우는 것이 주저된다. 그래도 어은동 궁동에서는 그냥 피운다. 더 멀리, 둔산이라든가 대전역에 가면 정말 불편해진다. 의식적으로 사람들 눈 신경 안쓰고 그냥 피워버리려고 하지만, 그야말로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옆에 남자녀석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그래도 괜찮다. 비루한 태도이긴 하지만, 지나가는 누군가가 시비를 걸어도 내 편(남자)되어줄 사람이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사실 옆에 남자가 있으면 흡연중인 여자(나)를 빤히 쳐다보며 궁시렁 댈지언정 대놓고 뭐라고 하지는 않는다. 내가 겪었던 몇 번의 봉변은 모두 나 혼자일 때이거나 다른 여자애랑 둘이 담배피울 때 일어난 일이었다. 

낯선 고장, 특히 지방 소도시의 터미널이나 역 같은데서는 더더욱 담배를 꺼내들기가 힘들어진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나의 적이고, 내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는 순간 그들의 눈빛이 화살처럼 내게 박힌다는 느낌이 든다. 실제일 수도 있고 과장된 생각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울 때 따가운 시선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흘깃 보는 것도 아니고, 무슨 죄짓는 사람인양 일부러 빤히 쳐다보는 사람들도 있다. 몇년이 지나도 그 가증스런 눈빛은 그냥 지나쳐지지가 않는다. 야 이 씹새꺄 몰 꼬라바!! 하고 멱살이라도 잡고 싶을 충동에 그 때마다 사로잡히곤 한다. 물론 혼자 씩씩대며 삭여버리지만.  

아...흡연 여성 잔혹사 하니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참 많구나. 학교 앞에서 어떤 양아치 같은 놈이 담배 피우는 날 보고 "세상 말세네. 이년아 담배 그만 피워"하고 버럭 소리지르던 일. 그 인간은 학교 앞에 있는 자기 원룸에 들어가서는 창문밖으로 날 내다보고는, 아직도 피우고 있네 하면서 또 욕을 해댔다. (쓰다보니 또 열받네) 내가 어떤 대응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그다지 강하게 나가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남의 흡연권을 침해하고 생판 남에게 욕까지 해댄 인간은 그렇게나 당당하고, 잘못한 것도 없이 인격모독까지 당한 나는 왜 당당하게 나갈 수 없었던 건지. 한판 벌였어야 했는걸, 하고 두고두고 후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도 똑같은 일을 겪으면 과연 내가 욕이라도 한바가지 해주며 응수할 수 있을지 도저히 자신이 없다. 아, 여자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