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학과 평화학
토다 키요시 지음, 김원식 옮김 / 녹색평론사 / 2003년 9월
평점 :
품절


여담으로 시작하자면, 일본 사람들은 뭔가를 종합해서 정리하는데 참 탁월하다는 생각이 든다. 판타지 라이브러리라는 시리즈가 있다. 온갖 동서고금의 판타지물들에 대해 항목별로 정리한 책들인데 이 시리즈를 보면 항상 감탄을 하게 된다. 이런 거, 일본 사람들이 참 잘하는 거 같다. 

[판타지 라이브러리]와 이 책은 주제상 거리가 멀지만, 이 책 역시 '폭력'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매우 종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면에서 흡사하다. 책은 직접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이라는, 폭력에 대한 다소는 모호한 구분으로부터 시작한다. 즉각 알아차릴 수 있듯이 직접적 폭력은 주체와 대상, 행동의 의도와 결과가  명확한 폭력이고 구조적 폭력은 그렇지 않은 것을 가리킨다. 환경 파괴, 대기업이나 강대국의 행위에 의한 피해 등을 폭력의 개념 내로 포괄하기 위한 범주화로 보인다. 개인 대 개인의 폭력이나 개인의 폭력성 문제는 책에서 다루는 범위 밖이다. 

테러, 전쟁, 사형. 국가와 같은 공적 조직이 수행하는 대표적인 직접적 폭력이다. 테러는 나쁜 것, 전쟁은 불가피한 것, 사형은 (악질범죄자에게) 당연한 것이라는 도식이 굳어져 있는 우리에게 이 세 가지를 한 데 묶는 건 괘씸해 보이기도 한다. 사실 (근대) 국가가 UN을 제외한 다른 공적 조직과 대별되는 가장 큰 요인이 바로 합법적 폭력(전쟁 수행력, 사형 및 구금 등 경찰력)을 독점한다는 것 아닌가. 하지만 저자는 국가의 폭력이 과연 정당한가에 의문을 제기한다. 전쟁 중 사망 비전투원의 비율이 2차 대전 후 증가하면서, 급기야 현대전에서는 80-90%의 사망자가 민간인이다. 그렇게 되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전략 폭격이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몇 만피트 위에서 폭격하는 행위는 이제 일종의 게임 같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전략폭격을 중심에 두는 현대전이 테러와 뭐가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사형에 대해서는, 요사이 여러 글을 읽다보니 사형 폐지로 가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 역시 사형 폐지론자이다. 가장 중요한 원죄 형사 가능성 (오심으로 인해 사형당하는 경우)에 대해 저자는 미국과 일본의 원죄 형사 통계를 들이댄다. 정말 할 말이 없어진다. 2003년 일리노이주에서 13명의 사형수가 무혐의라는 것이 밝혀져 한꺼번에 석방된 케이스는 매우 유명하다. 플로리다 주에서는 5명의 사형이 집행될 때마다 2명의 다른 사형수가 무죄방면된다고 한다. 정말 끔찍한 통계가 아닐 수 없다. 일본도 원죄 형사가 많기는 매한가지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왜 다르겠는가.

 좀 간추려서 써야겠다.

책을 읽으면서, 군수산업, 담배산업, 남북 격차, 글로벌 대기업의 지배 문제, 핵 (전쟁용이든 민사용이든), 생명공학기술의 이용, 출산기술 등의 문제를 '폭력'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환경학과 평화학이 무슨 관계일까? 처음 책을 집어들었을 때 좀 생뚱맞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둘다 잘 살아보자는 거고, 막연하게는 큰 관련이 있을 거 같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키워드는 '폭력'이다. 평화의 반대는 전쟁이 아니라 폭력이다. 환경 문제는 '지구에 대한 폭력' '자연에 대한 폭력'으로 압축된다. 우리의 환경학과 평화학은 공존, 자연과의 평화로운 공존, 타인과의 평화로운 공존을 지향해야 한다. 이 때의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와 같은 소극적인 개념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구조적, 간접적 폭력까지 없애는 적극적인 평화여야 한다.

한때 환경운동이라든가 평화운동은 Main stream에서 떨어져 나온, 소위 '부문'운동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하지만 직접적, 구조적 폭력에 대한 적극적인 반대라는 관점은, 우리시대의 진보적인 이슈들을 아우를 수 있는 좋은 이정표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현대의 폭력이 자본주의의 폭력인가 남성중심 사회의 폭력인가. 여성이 남성 대신 사회를 움직인다면 세상은 다를까.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봤지만, 결론지어지지 않은 문제이다. (하긴 나만 결론을 못냈을까) 저자가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언급한 다른 영장류들의 사례는, 내 개인적인 여성편애에 근거를 더해주었다. 일단 다른 영장류든 인간이든 여성이 주도하거나 남녀평등의 수준이 높은 집단은 4대 원초적 폭력(전쟁, 살인, 새끼죽이기, 강간)이 없이 평화롭고 평등하다. 하하 -_-v. 이 문제에 대해서는 좀더 생각해 볼 것이 많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고 나서 생긴 추가 독서목록이다.

- 민족국가와 폭력, 앤서니 기든스

- The Anatomy of Human Destructiveness, 에리히 프롬

- 악마같은 남성, 랭햄 & 피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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