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2강 둘다 신청합니다. 서울의 아파트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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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명 신청합니다. 1강이 이에 2강도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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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명 신청합니다. 서중석 선생의 <<대한민국 선거이야기>>나 <<한국 현대사>>를 읽고 강의를 꼭 직접 듣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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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legows > 노명우 저자 강연 후기, "우리의 상식을 의심할 수 있어야 한다"

 

 

저자 노명우는 자신의 책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노동의 이유를 묻다》(이하 《노동의 이유를 묻다》)의 출간을 제안 받았을 때 누군가의 해석자, 해설자가 아니라 ‘우리의 주제로 학문을 할 수 없을까’라는 문제의식을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막스 베버의 책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해설하는 것이 아니라 베버의 문제의식과 방법론의 현실 적용에 대해 생각하며 책을 썼다고 한다.

저자의 책 《노동의 이유를 묻다》를 123쪽까지 읽고 강연에 참석했다. 2시간 강연에 1시간 30분 가량은 저자의 강연 시간이었고 나머지 30분 가량은 질의응답 시간이었다. 강연은 저자의 책 《노동의 이유를 묻다》의 목차에 따라 진행되었고 책의 핵심 내용을 간추려 전달하는 형식이었다. 이런 강연 형식은 책을 읽고 청강한 사람은 한 번 더 내용을 정리하거나 읽으면서 생각났던 의문을 풀 수 있고, 책을 읽지 않고 청강한 사람은 강연을 들은 후 책을 읽으면 보다 상세한 내용들을 알 수 있다. 
 

저자가 책의 ‘머리말’에서 밝힌 목차의 핵심 내용은 아래와 같다(책 《노동의 이유를 묻다》는 총 256쪽이다)

1. 프롤로그(15-35쪽): 막스 베버의 문제 의식
2. 1장(39-61쪽):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탄생 배경과 베버의 연구 방법론 

3. 2장(65-167쪽):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분석과 해석
4. 3장(171-237쪽): 베버의 문제 의식과 연구 방법론에 따라 “21세기 노동 윤리”와 현대 현상 분석

이제부터 강연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저자의 관점과 막스 베버의 책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위해 위와 같은 목차에 따라 진행된 강연의 핵심 내용을 개괄하겠다. 베버는 “근대적 자본주의, 즉 합리화된 자본주의”가 서양 문화만의 고유한 ‘합리성’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고 근대 자본주의의 상징인 서양 부르주아 계급의 특성, 즉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분석을 통해 다른 지역이 아니라 서구에서 근대적 자본주의가 출현한 현상에 대해 분석하고자 했다.

이 현상의 분석을 위해 “베버는 경제적 토대가 사회를 규정한다는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적 해석에 관념론적 해석을 더했다. 베버의 관념론적 해석은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기는 하지만, 정신이 그대로 물질로 환원될 수 있다고 보지” 않고 “정신은 독자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적 해석이 경제와 물질적인 것에 주목한다면 관념론적 해석은 ‘문화’에 주목한다. 베버는 “경제만이 아니라 문화를 통해서도 사회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문화를 통해 사회를 분석한 결과물이다.”


왼쪽: 칼 마르크스(1818년 5월 5일(독일)-1883년 3월 14일), 오른쪽: 막스 베버(1864년 4월 21일(독일)-1920년 6월 14일)(이미지 출처: http://kangch07.egloos.com/912084

“막스 베버는 자신의 학문을 사회학이라고 했고, 자신을 사회학자라고 말했다.”(강연) 베버는 역사주의적이고 심리주의적인 ‘이해’의 지식과 자연과학적인 ‘설명’의 지식을 구별하려 했다. 베버는 “자연과학을 모방하는 사회과학의 경향을 지향했던 실증주의 사회과학을 비판”하면서 “신칸트학파의 입장을 계승해 이해 모델을 구축했고 그러면서도 개성기술학(쉽게 말해 인간 개개인의 특성을 기술하는 학문)으로 빠져들지 않고 이해 모델에 입각한 사회과학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그래서 베버는 “이념형(Ideal type)의 발견이라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념형은 보편적인 특징을 기초로 대상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념형의 발견 방법은 인간의 패턴을 만드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사기꾼이 왜 사기를 치는지 알기 위해 세상의 수많은 사기꾼들을 모두 만나 그들의 주관성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사기꾼들 각각의 개별적 특성을 조합해 사기꾼들의 보편적인 특징을 찾아내는 방법이다. 가까운 예로 우리의 의식 속에 있는 ‘강남 아줌마’, ‘홍대에서 노는 클럽 죽돌(순)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강남 아줌마’와 ‘홍대에서 노는 클럽 죽돌(순)이’의 대표적인 ‘이념형’인 것이다.

베버는 위와 같은 방법론을 가지고 “자본주의가 발생하기 시작한 1620~1720년경”을 분석했다. 저자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분석과 해석’을 위해 고대에서 근대까지 사람들의 노동에 대한 의식의 변화와 근대 자본주의의 탄생과 발전 그리고 배경, 프로테스탄트의 탄생과 그 배경 그리고 근대 자본주의 정신과 프로테스탄트의 금욕주의적 노동 윤리가 맞물려 돌아가는 지점을 설명한다. “가톨릭의 특권에 기초한 중세 질서에 저항하는” 프로테스탄트의 순결주의적(가톨릭 사제들의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는 것)인 금욕주의는 노동을 인간의 활동 중 최고의 것으로 예찬하고 부의 축적이 “착실하고 근면한 노동의 산물인 한 도덕적으로 인정”한 자본주의 정신과 잘 어울렸다. 베버는 이런 금욕주의적 자본주의 정신의 이념형으로 종교 설교자 리처드 벡스터와 프랭클린을 꼽았다. 벡스터는 종교 설교자로서 프로테스탄트의 금욕주의와 자본주의 정신이 맞물려 돌아가는 지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고, “프랭클린은 세속화된 자본주의 정신의 사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사제들만 실천하는 가톨릭의 고립된 금욕주의와는 다르게 프로테스탄트의 금욕주의는 자본주의의 확산과 더불어 프로테스탄트의 금욕주의에 기반한 노동윤리로 세속화되어 전 세계에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금욕주의적 노동윤리를 내재화했으며 “부는 더 이상 비난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리고 “노동윤리는 21세기의 우리에게는 상식이 되었다.”(강연)

마지막으로 저자는 베버가 분석한 1620~1720년 경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300년 가량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베버의 문제의식과 연구 방법론 중 “우리가 현대 사회를 분석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이론을 구별해” “제국주의 시대를 거쳐 냉전 체제를 경과해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급격하게 변화”한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의 변화에 맞추어” 그 형태와 의미가 변한 노동을 분석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저자는 막스 베버의 이론의 일정 부분이 현재까지 사용가치가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막스 베버의 책이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베버를 통해 우리는 각자의 인생에서 ‘노동’이 차지하는 의미에 대해 성찰할 수 있다. 나는 왜 일을 해야 하는 것일까? 나의 삶에서 노동에 어떤 비중을 부여할 것인가? 직업 세계로 들어가기 전이든, 이미 직업 세계에서 활약하고 있든, 한번쯤은 노동과 직업이 자신의 삶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244쪽) 

 

왼쪽: 영화 <쇼퍼 홀릭>, 오른쪽: 영화 <타짜>(이미지 출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81&aid=0001997456, 네이버 포토)

저자는 현대적 현상으로 ‘테일러리즘’, ‘셀프 테일러리즘’, 포디즘에서 비롯된 ‘지름신과 쇼퍼홀릭’ ‘도박’과 자본주의의 노동 윤리를 거부하는 자발적 실업가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막스 베버의 분석 방법론을 이용해 이 현상들을 분석한다. 저자는 현대인들이 “노동을 해야 할 의무와 노동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생기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노동에 집착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단적으로 “프로테스탄트의 세속적 금욕주의가 종말을 고한 현대 사회에서 인간들이 노동을 하는 이유는” 현대 자본주의가 체제가 부추기는 ‘소비주의’에 의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현명한 수단으로 변화한” 쇼핑을 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 저자는 이런 악순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현대의 노동자들은 “나는 왜 열심히 일해야 하는 걸까”와 같은 “노동해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담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가 “노동자에게 노동 윤리를 숭상하라고 가르치지만” 정작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자본주의 경쟁에서 막대한 부를 거머”쥐는 기이한 현상과 “지표는 좋으나 행복하지는 않은 삶”(강연)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대안을 생각한다. 강연 당시에 저자는 답답한 듯 인상을 찌푸리면서 아직까지 적합한 대안을 찾지 못했다고 말하며, 우리의 상식을 의심하는 것이 그 대안을 찾는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여기까지가 강연의 핵심 내용이다. 1시간 30분 가량의 강연이 마무리되고 질의응답 시간에는 청강자의 4~5개의 질문과 저자의 답변이 오고 갔다. 그 질문들은 비록 충분하지는 않더라도 저자의 책을 읽으면 알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 저자의 답변 중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저자가 20대에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읽으면서 책에 쓴 메모 중에 베버에게 “이 자본주의 부르주아의 앞잡이…”, “속지 말자”같은 메모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저자의 책 《노동의 이유를 묻다》를 읽으면서 근대 프로젝트의 폐해에 대해 생각했다. 근대 프로젝트는 인간 삶을 보다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은 분명하지만 자본주의의 부작용과 위생 권력의 문제 같은 병폐들을 낳았다. 물론 문제점이 없는 완전한 체제는 존재하지 않지만 근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근대의 병폐들을 본래 자신이 갖고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거나 근대 프로젝트가 주입한 것을 고유한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칼뱅파의 프로테스탄트들이 구원의 확신을 갖기 위해 금욕주의적 노동윤리를 내재화한 것처럼 근대인들은 삶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근대가 주입한 노동윤리, 위생윤리들을 내재화했다. 강연에서 저자가 말한 것과 같이 우리가 지니고 있는 우리 고유한 것이라고 믿고 싶은 우리의 상식을 의심하는 것이 근대 프로젝트의 병폐를 치료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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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legows > <고미숙의 에로스 특강> 후기, "내 사랑을 하자"

081206, 고미숙, 그린비 출판사, 2~4pm



이 강연후기는 고미숙 선생의 직접적인 ‘강연’과 그린비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영상’을 보고 고미숙 선생이 자신의 글을 읽고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내 나름의 방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울 지도 모른다는 날에 홍대입구 역 부근에 있는 그린비 출판사로 들어갔다. 이중의 책장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공간에는 귀여운 탁자가 있었고 초록의 식물이 햇빛을 받으며 자라고 있었다. 강연 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도착했는지, 출판사에 낯선 사람이 등장해서인지 그린비 출판사 사람들은 낯선 웃음과 분주한 움직임으로 간식과 음료수를 그 귀여운 탁자에 올려 놓고 간단히 강연 준비를 마쳤다.

2시. 고미숙 선생 등장. 고미숙 선생은 “대학에서 독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 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지식인공동체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고,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나비와 전사》,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이 영화를 보라》 등의 책을 썼다. 이번 강연은 얼마 전 출간한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이하 《호모 에로스》)의 출간 기념 “에로스 특강”이었는데, 강연 형식으로 고미숙 선생이 많은 발언권을 가졌고, 주고받는 대화가 주로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점심 시간에 밥 한끼 먹으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강연이 시작되었다.

출간 기념 강연이든 아니든 책을 쓴 모든 저자는 자신이 책을 쓰게 된 이유를 강연의 핵심 주제로 삼고 그 핵심 주제로 나아가는 저자 자신을 설명하기 마련이다. 고미숙 선생도 마찬가지였다. 《호모 에로스》를 쓰게 된 계기와 문제의식이 강연의 핵심 주제였다.

인간의 신체는 본능적으로 사랑과 성을 갈구하는데 왜 인간은 그 본능을 억압하는지, 어떻게 억압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지의 문제의식으로 시작해 연애와 성적인 욕망을 공부를 통해 발전시키고 분출하는 것에 대한 강연이 시작되었다.

강연을 들어보니 고미숙 선생이 《호모 에로스》를 쓰게 된 계기는 ‘사랑’, ‘성’이라는 대상이 그 “인과의 사슬”에 따라 인간의 삶에 변하지 않고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미숙 선생은 《호모 쿵푸스》를 출간한 후 대중 강연에서 청중들이 ‘사랑’, ‘성’과 같은 주제에서 보이는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관심을 보일 때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의문을 가졌다고 한다.

20세기 이후 민주주의 시대와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정치경제적으로 구성된 사회에 살면서 현대인들은 외형적으로 자유롭게 사랑하고 희로애락의 감정을 분출하며 삶을 향유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실제로 현대인의 삶과 사랑은 사회의 도덕과 윤리라는 억압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고미숙 선생이 말한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규정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성의 체험에 굉장히 빈곤하다



한국 남성 중 대다수 혹은 일부가 첫경험을 사창가에서 돈을 주고 경험하는 것과 성적인 욕망을 해소하는 것이 이런 삶의 현상이 아닐까. 여성에게 의무처럼 강제로 주어진 ‘순결’도 마찬가지다. 그런 사회의 강제로 인해 원하고 본능적으로 섹스를 비롯한 성적 행위를 원할 때에도 원치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미덕인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 그로 인해 ‘여자는 튕기니까 몇 번 더 시도하라’는 남성들의 술자리 여담이 일반적인 남성들의 생각처럼 굳어진 것이다.

이것은 간단히 볼 문제가 아니다. 어느 시대든 그 시대를 상징하고 규정짓는 도덕과 윤리가 존재했었다. 이 도덕과 윤리는 그 시대의 상황에 따라 기계적이고 현실적으로 변한다. 먹고 사는 문제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20세기에 산업 사회가 대두하면서 남성은 공장에서 일을 하고 여성은 집에서 소위 집안 일을 해야 했다. 여성의 출산 기능과 남성에 비해 연약한 신체가 이에 한 몫을 했다. 산업 사회는 그 사회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의 본능을 억압하는 도덕과 윤리가 필요했다. 노동을 통한 성취감이나 삶의 희로애락 따위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어쩌면 21세기를 사는 사람들도 아직까지 20세기 산업 사회가 규정한 도덕과 윤리의 잔재와 본능의 솟구침 사이에서 허덕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랑과 성이 제도로 인해 ‘소유’와 ‘재산권의 확장’으로 왜곡되어 사랑의 힘이 소진되고 부부끼리 칼부림이 나서 죽거나, 죽이거나 한다. 가장 깔끔한 경우는 법정에서 해결하는 것이 되어버린 상황이 현실이다.

고미숙 선생은 이런 강연의 핵심 주제를 문학 작품과 텔레비전 드라마, 고전을 예로 들며 강연을 이어갔다. 그리고 ‘공부’를 통해 “외부 세계와 나의 리듬”에 대해 고민하고 진리와 삶의 간극을 좁히는 것이 사회의 도덕과 윤리(Moral)가 소리 없이 행하는 에로스의 억압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공부는 사회적으로 주입된 망상과 표상을 내던지는 것이다


그러나 고미숙 선생이 ‘공부’라는 개념어를 고전 공부 이외에 어디까지 규정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사회가 주입한 기존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우발적이고 충동적인 것들을 수용하고 상상력을 발휘하며 사는 삶의 방식이 꼭 공부만을 통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일까. “편지 한 장을 쓰더라도 많은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일까. 텍스트를 다루며 사는 고미숙 선생의 지극히 자기 중심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사고는 아닐까. 연애 편지를 쓸 때는 공부가 아니라 진심을 담는 것이 중요하다. 연애 편지의 진심처럼 삶은 공부만을 통해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맥락 속에서 잡아야 할 것들이 무궁무진하다. 각자가 잡아야 할 것들이 있고 고미숙 선생은 공부를 잡은 것이다. 공부가 삶의 억압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참여했던 독서 모임에서 만난 친구가 있다. 그 친구와의 술자리에서 친구가 술을 한 잔 들이켜고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말한다.

다른 사람의 욕망을 살고 있는 내가 싫어요

 

친구의 그 말은 자본과 권력이 그들의 지속된 팽창을 위해 주입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에 대한 의식이었을 것으로 나는 받아들였다. 그 때 나는 그 동생이 책을 읽고 현실을 받아들일 때(볼 때), 공부할 때 그리고 그 주입된 삶의 욕망(일류 대학을 나와 일류 기업에서 일하고 나이든 후에는 유능한 일류 CEO가 되어 성공했다는 소리를 듣는)에서 벗어날 때 그런 의식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친구를 지금은 만나지 않는다. 친구가 잡은 것은 무엇일까.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각설하고 《호모 에로스》와 고미숙 선생의 강연의 핵심 관점에서 보자면, 내가 사랑하는 방식, 사랑하는 상대를 대하는 방식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내 본능과 맞대어 보고 차이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이 공부요, 사랑의 시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입된 사랑 방식으로 너무 본능에 치우친 방식으로 “인연을 갉아 먹는” 짓은 하지 말자. 내 사랑을 하자.

 

<작가와의 만남 1기 강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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