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창작과 비평 203호 - 2024.봄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창작과 비평 203호 – 2024.봄 


1.

계간지를 읽는 기분은 신간을 읽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마치 OTT 리스트들을 보며 작품을 고르듯, 이번 호에는 어떤 시인들과 소설가들의 작품이 실렸는지,

또 어떤 거대한 담론으로 인문학 근력을 기를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시간이 됩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읽어도 되고, 제목을 보며 골라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2.

백민정 / 왜 귀신의 공공성인가?: 다산과 우리 담론의 모색 (K–담론을 모색한다 1)


제일 먼저 눈에 띄었던 건, 백민정의 '왜 귀신의 공공성인가' 였습니다.

백 만 관객 영화 ‘파묘’를 보고 나온 직후여서 저의 눈길을 사로 잡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다산' 정약용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육각형인간' 그러니까 조선 후기의 '다재다능'한 문신이었습니다.


조선 후기의 유교적 근대성 혹은 실학적 근대성을 이야기할 때 '다산'을 호명한다는 것에 백민정은 부적절한지를 김상준의 유교적 근대성론을 조선후기에 적용한 점을 반박하며, 17세기 이후 예송논쟁을 통해 조선형 혹은 유교적 국가가 이미 탄생했다고 한 부분에 대해 다산의 귀신이야기를 구체화합니다.


호기롭게 다산 정약용의 '재미있고, 흥미로운 귀신이야기'로 쉽게 접근했다가, 유교적 근대성 등이 나오면 뒷걸음질케 되지만, 차근차근 읽다보면, 눈에 띄는 문장도 보입니다.


p.329

다산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나쁜 부모를 원망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부모를 원망하는 것이 오히려 부모를 섬기는 효도의 한 방법이다. 만약 잔혹하고 냉담한 부모를 원망하지 않으면 그것은 부모를 남처럼 대하는 것이다. 그에게 효는 부모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자식에 대한 부모의 책무와 함께 상호적이고 호혜적인 관계 원리였다. 원망함을 분석한 다산의 글이있다.

"아버지가 자애롭지 않으면 아들이 원망해도 되는가? 아직 안된다. 그러나 자식이 효를 다했는데 아버지가 자애롭지 않아서 마치 고수가 순임금에게 한 것처럼 한다면 부모를 원망해도 된다. 임금이 보살피지 않으면 신하가 원망해도 되는가? 아직 안된다. 신하가 충성을 다했는데도 임금이 보살피지 않기를 마치 회왕과 굴평에게 한 것처럼 한다면 임금을 원망해도 된다"

-<다산시문집> 권10 원원


다산 정약용의 왕과 신하의 이야기에서 현재를 바라봅니다.

과연, 우리가 뽑은, 우리를 대신해서 나랏일을 할 신하들은 다산이 말하는 어떤 ‘신하’일까요. 

최교선의 '갱신하는 말, 다시 쓰는 미래'와 박래군의 '416 운동 10년, 무엇을 바꾸었는가'를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해보는 4월의 첫 날입니다. 


3.

장혜령 / 사랑의 역사 외


수많은 시인 중 아는 시인의 이름이 보이면, 일단 그들의 시부터 훑습니다. 

그러다 장혜령 시인의 시가 눈에 띕니다.

이번에 실린 <사랑의 역사>, <모르는 당신>을 읽으면 굉장히 구체적인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집니다.

4월의 아직은 찬기를 머금은 바닷바람이 부는 제주 협재 바다의 밤입니다.

'아득함'이 느껴지는 두 편의 시를 읽고나니, 제주도를 1박2일이라도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찾아보니, 시도 잘 쓰고 소설도 쓰는 작가입니다.

'아득함'을 가진 작가가 쓰는 소설은 또 얼마나 좋을지 작가의 작품들을 검색하며 두근거립니다.

이렇게 계간지를 읽다보면, 새로운 '최애'를 찾는 재미도 있습니다.


4.

성해나 / 길티 클럽 : 호랑이 만지기


일단 이 소설에는 덕질용어가 가득합니다. 

덕질이 생소한 독자는, 덕질 용어부터 이질감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덕질에 발을 잠시라도 담가본 독자라면, 기출 문제 변형처럼 읽힙니다.

재미있지만, 주의할 점은 저처럼 '과몰입'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소설 내용을 이야기 하기 전, 짧은 덕질 이야기를 하자면, 덕질에 '찐팬'과 '라이트팬'으로 나뉩니다. 

'라이트하다'라는 동사는 덕질에서는 '가볍게 좋아하는 정도'를 뜻합니다.

예를 들어, "나 BTS 노래 좋아해. 노래 중에 '봄날(대중적인 노래여야함)'이 좋아" 이러면 '라이트'입니다.

하지만, "나 BTS 좋아하는데, 어제 K리그에 뷔가 직관한 거 봤어?"라고 말하면, 어느 정도 '찐'입니다.


소설 속 화자는 김곤 감독의 열광적인 '찐 덕후'입니다.

디시갤에서도 활동하고, n차 관람도 하며, 소수 단톡방에서 김곤의 정보를 누구보다 빨리 알고, 굿즈도 사모읍니다. 흔히 말하는 '시네필'은 아니지만, '시네필'이고 싶은 덕후입니다.

화자에게는 남자 친구 길우는 "모럴이 없다"라고 내뱉는 구남친과는 달리, 무덤덤한 무색무취의 남자입니다. 이런 남자가 봐도 화자의 덕질에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김곤 감독에게 '그.런.일'이 있었는데도 말이죠.


어느 날, 화자는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 노미네이트 된 김곤 감독의 시상식 장면과 이후에 있을 영상통화를 위해 이태원의 한 펍에 갑니다. 거기서 처음으로 자신에게 디시갤에서 처음 말을 건 오영도 만나고, 다른 '선생님'들도 만납니다. 오묘한 온도차가 그들 사이에 있습니다. 자신의 아이를 휴대폰 배경화면으로 해놓은 '미지 선생님'과 주인공을 빼고, 다 영화를 잘 아는 사람들이며, 김곤 감독과의 친분도 어느정도 있어보입니다. 자신의 덕질을 '소녀같다'고만 말하는 그들에게 느끼는 심리를 작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P.208

4. 친목질 절대금지.

은근히 파벌을 형성하며 사람을 우습게 만드는 것도, 내가 진지하게 던진 질문들이 귀엽다거나 소녀답다는 말로 전락하는 것도 달갑지 않았지만,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그저 넘어갔다.


주인공은 이런 싸한 분위기 속에서도 자신에게 친근하게 대하는 오영과만 대화를 나눕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카테고리로 묶인 '미지 선생님'에게 친밀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김곤 감독의 '그 일'을 언급한 미지 선생님의 말에 주인공은 오영의 "우리는 정말 좋아서 빠는 거잖아요"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일명 '쉴드'로 자신의 덕질이 타인들과의 덕질의 순도보다 높음을 말합니다. 

바로 이렇게요.


"사실이라고 입증된 것도 없는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자신이 낄 수 없다 느꼈던 모임에서 그녀의 김곤 감독의 쉴드는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쇼미더머니 목걸이가 됩니다. 그리고 그녀는 왠지 모를 찝찝함과 고양감을 동시에 느끼며, 며칠 후, 김곤 감독의 신작 GV에 참석합니다.


성해나 작가도 장혜령 작가처럼 새로운 '최애'가 될 것 같습니다.

이번 2024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에도 성해나 작가의 작품이 실렸습니다.

책을 사서 제일 먼저 읽을 것 같습니다.


5.

이 밖에도 문학평론 황정아 '이토록 문제적인 '인간'에서 나온 켄 리우 작가의 작품들을 읽어봐야겠다,고

봄 계간호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이제 저의 4월 장바구니 목록엔 '종이 동물원'과 '2024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이 담겨있습니다.


다음 여름호는 어떤 주제가 담길지 기대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피버 드림
사만타 슈웨블린 지음, 조혜진 옮김 / 창비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디에나 다 있지만, 어디에도 있으면 안 될 이야기.

사만타 슈웨블린의 '피버드림(Fever Dream)'이다.

소설 속 등장인물과 장소는 단순하다.

아만다, 니나, 카를라, 다비드 그리고 그들이 사는 농촌 마을과 병원.

소설은 다비드의 속삭임에서 시작된다.

- 벌레 같은 거예요.

- 무슨 벌레인데?

- 벌레 같은 거요, 어디에나 다 있는.

아만다와 다비드의 대화는 아만다와 카를라의 대화로, 자신의 딸 니나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카를라는 6년 전 아들 다비드에게 있었던 일을 아만다에게 이야기한다.

남편 오마르가 데리고 온 종마, 개울 물 그리고 녹색 집.

아만다는 카를라의 대화를 듣고 이 모든 이야기가 ‘말도 안 된다'라고 생각한다.

아만다가 이야기하는 동안 다비드의 '속삭임'은 들리지 않는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아만다에게 다비드는

- 그건 아주머니의 생각이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럼, 다비드가 생각하는 '중요한 이야기'는 무엇일까.

이어지는 아만다와 니나의 ‘구조 거리’에서 다비드가 말하는 (혹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중요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처럼 이어져 있다는 ‘구조 거리’는 원작의 제목이 스페인어로 ‘구조 거리(Distancia de rescate)'인 것을 감안하면,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중요함이 소설 속에서 어떤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알기 쉽다. 작가는 '실'이라는 것을 통해 등장인물 사이의 긴장감을 독자로 하여금 노골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아만다는 '구조 거리'에 대해 다비드에게 설명한다. '딸아이와 나를 갈라놓는 그 가변적인 거리'. 즉, 자신의 딸 니나에게 일어날 위험을 사전에 측정하고, 그 거리를 재서 ‘구조 거리’를 계산하며, 이 행동은 자신의 엄마로부터 이어져왔다. 아만다과 딸 니나는 보이지 않는 실로 이어 니나가 자신의 시선에서 벗어나도 ‘안전함’이 느껴지면 실은 매우 짧게 느껴지고, ‘위험’이 감지되면 그 실은 팽팽하게 당겨진다.

- 정확한 순간은 바로 세세한 점에 있어요. 그러니 자세히 살펴봐야 해요.

다비드는 아만다에게 말한다.

‘정확한 순간’이 다비드가 궁금해하는 그 벌레(병의 원인)의 시작인 것일까.

카를라의 6년 전 ‘아들이었던’ 다비드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사라진 줄 알았던 종말이 전날 마신 우물 물로 인해 죽고, 카를라는 자신의 아들 다비드도 그 종말이 마신 물을 마셨다는 생각에 가망이 없을 거라 생각한다. 카를라는 의사보다는 ‘녹색 집의 여인'에게 간다. 그리고 그 뒤 다비드는 카를라를 '엄마'라 부르지 않고, 카를라는 자신의 아들이 ‘괴물’이 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하나의 궁금점이 생긴다. 카를라와 다비드 사이에도 아만다가 이야기하는 '구조 거리'가 존재했을까.

카를라와 다비드의 ‘구조 거리’의 실은 남편 오마르가 데리고 온 말이 사라지고, 집에서 나오면서부터 끊어졌다.

소설 속에서 다비드는 “중요한 거예요”라며 아만다가 말하는 ‘구조 거리’에 대해 끈질기게 물어온다. 소설의 시작에서 그들의 대화 주제인 ‘벌레’는 ‘구조 거리’의 실이 끊어지면서 생겼을 수도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 준다. 하지만 소설의 뒤로 가면 갈수록 ’구조 거리’는 더 먼 과거에 끊어져 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만다가 본 “속눈썹도, 눈썹도 없고 피부는 분홍색, 진한 분홍색에 비늘로 뒤덮여 있는” 이상한 아이들. 이미 이 농촌에 사는 엄마와 아이들 사이에는 태어나기 전부터 ‘구조 거리’는 없었다. 그들은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중독'된 상태로 태어났고, ‘안전함’을 뜻하는 실은 이미 끊어진 채 태어난 것이다.

소설의 배경은 아르헨티나로 작가 사만타 유웨블린이 태어난 곳이다. 아르헨티나는 밀가루와 대두유의 제1위 수출국이며, 가공되지 않은 대두는 전 세계 수출국 중 3위를 차지한다. (아르헨티나 식용유 위원회, 농축산부, 종자 생산자 연합, NOSIS, INTA, CEMA 대학교 및 부에노스아이레스 무역관 자체 조사자료 종합)

아르헨티나의 살충제 살포량은 1990 년 9백만 갤런(3만 7천8백 리터)에서 2013년 기준 9배 증가했으며(http://archive.boston.com/bigpicture/2013/10/agrochemical_spraying_in_argen.html) 8년이 지난 지금은 얼마나 더 많은 살충제가 살포되고 있는지는 ‘agrochemicals in Argentina’로 구글링해봐도 쉽게 알 수 있다. (https://news.mongabay.com/2020/08/agrochemicals-and-industrial-waste-threaten-argentinas-gran-chaco)

사만타 유웨블린은 이러한 과도한 살충제로 인한 수질 오염 그리고 그로 인해 사람들이 살충제로 인한 중독 현상을 말, 오리, 개 등 농촌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물들과 물(우물, 이슬)을 통해 ‘어디에나 다 있는’ 것으로 보여 준다. 작가는 소설에 대한 관련 인터뷰에서 “아르헨티나는 농약과 관련된 제품 중 하나인 콩의 가장 크다. 우리는 이 콩을 전 세계에 퍼뜨렸다. (콩은) 우리 음식의 기초이다. 콩은 쿠키, 냉동 생선, 시리얼 바, 수프, 빵, 모든 종류의 밀가루, 심지어 아이스크림까지 모든 것에 있다"라고 유전자 조작이 되고, 살충제의 범벅이 된 콩에 대해 이야기했다.

다시 소설로 돌아오자.

마치 퍼즐 맞추기 같은 아만다와 다비드의 대화에서 다비드는 아만다의 이야기를 정확히 갈라 나누진 않지만,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는 일’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다비드의 대답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이 소설의 주제는 좀 더 명확해진다.

작가는 이러한 구분에 대해 한 인터뷰에서 ‘말할 가치가 있는 것과 말할 가치가 없는 것에 대한 흥미로운 비유(What an interesting kind of metaphor for what is worth saying and what is not worth saying)’라고 답했다.

'피버드림'은 2021년 넷플릭스를 통해 영화화된다.

'버드박스', '다크', '더 레인' 등 이미 환경에 대한 공포를 다룬 넷플릭스 영화, 드라마는 많이 나왔다.

'피버드림'이 보여주는 '두려움'은 한층 더 가깝게 느껴질 것이다. 마치 아만다 옆에 다가와 앉에 있는 '다비드'의 목소리처럼 말이다.

두 명의 대화에서 세 명의 대화로 그리고 침묵으로 이어지는 '실'로 이어진 대화들.

이 대화들의 선명함은 소설을 읽고 난 후 영화를 볼 때 배가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의 글을 읽는다는 건, 때론 아득하고 때론 무섭다. 2002년 월드컵이 한창인 그때 나도 해언, 다언, 다희 그들처럼 고등학생이었다.
특정 배경이 가진 ‘과거형이라 이제는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것. 그대로 결정돼버린 것’(p70인용) 그 무서운 힘이 이 소설을 이끌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베이징, 내 유년의 빛
베이다오 지음, 김태성 옮김 / 한길사 / 201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베이징 공항은 늘 사람을 숨 막히게 했다. 커다란 붉은 새의 둥지처럼 생긴 공항은 매번 새롭게 느껴졌다. 여러 번 베이징에 갔지만 천안문, 자금성 등 유명한 곳은 거의 가보지 않았다. 그저 그들의 생활 속 한 부분처럼 살아가려 여러날을 길에서 서성거렸다.

 

“여름날의 햇빛이 거리를 두 부분으로 나눴다. 그늘진 곳은 물처럼 시원하여 나는 사람들을 따라 이리저리 물고기처럼 헤집고 다녔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을 바꿔 햇빛이 강하게 내리쬐는 쪽으로 가서 고독하고 오만하게 자신의 그림을 밟고 섰다. 머리가 온통 땀에 젖고 이어서 몸 전체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21p)

 

붉은 해가 진다는 것을 느끼는 건 택시들의 자연스러운 승차거부였다. 서울에서는 있을 수 없는 택시들의 퇴근 시간. 땅거미가 지는 베이징의 여름. 길에서 나는 매캐한 매연 냄새와 침을 삼킬 때마다 느껴지는 모레알 같은 느낌은 갈 때마다 모래사막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이 들었지만,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이 좋았다.

 

 

“색깔로 다지지면 철회색에 황토가 약간 섞인 것이 베이징의 겨울의 바탕색이었다. 이 색깔이 모든 냄새를 이끄는 장수로서 사람들의 입과 혀를 메마르게 하고 목구멍을 연기로 가득 차게 했다”(26p)

 

베이징의 겨울은 한국의 겨울보다 유독 메마른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온몸으로 추위를 막아내고 있었으며, 길을 가다 누군가와 부딪히면 차디찬 몸이 깨져버릴 것 같은 추위였다. 모래바람 마저 불면 눈을 질끈 감고 앞으로 걸었던 기억이 난다.

 

 

<베이징 내 유년의 빛> 속의 베이징은 내가 다녀온 베이징과 닮았지만 많이 다르다. 자신이 알던 베이징은 사라지고, 또 다른 베이징이 되어버린 곳을 보며 그는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낮고 짙게 깔린 '문화 대혁명' 속에 있던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구슬치기, 딱지치기 등 사소한 단어의 나열에서 보여주는 친근감과 사촌 누나를 좋아해서 수영을 연습하던 작가의 어린 시절에서 풋풋함이 느껴졌다. 그의 주변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어쩌면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공통분모였을 것이다. 그의 회상은 작은 구슬에서 가구로 또 자신이 살던 ‘싼불라오 후통 1호’으로 중학교로 이어진다. 이어지는 그 굵고, 단단한 선에서 나는 작가가 중국 역사의 길 한가운데에서 살아옴을 느낄 수 있었다. 들불처럼 일어난 어른들의 세계를 보고 위험해하던 소년은 그 들불이 되어 ‘혁명’ 앞에 또 다른 ‘혁명’으로 서있던 것이다.

 

책은 베이징의 ‘빛과 그림자’라는 얇은 기억부터 시작하여 ‘아버지’라는 큰 기둥 같은 존재로 끝난다. 이 흐름 어쩌면 나라는 사람의 인생의 흐름 속 한 부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중간 중간 삽입되어 있는 부모의 일기 속에서 그 시대 작가를 키워 온 그들의 강인함을 엿볼 수 있었다. 결국 이 책은 작가의 유년을 지키고, 버티고, 앞으로 나아가게 해 준 '아버지'를 위해 쓴 책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상하이, 여자의 향기
왕안이 지음, 김태성 옮김 / 한길사 / 201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가 만든 무대에 위에 뛰어들다

 

상하이는 코미디다에서 작가 왕안이는 상하이를 무대 위에 디자인한다.

배경과 사람들의 복장 그리고 언어에 대해 작가는 소설처럼 흘려보낸다, ‘사소함을 구체적으로 만드는 그녀의 글에는 수많은 주인공들이 숨 쉬고 있다.

 

작가는 감독이 되어 독자에게 멀리는 상하이 전체를 가깝게는 집 안과 밖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이야기한다. 화면은 바다 위의 상하이에서, 거리 풍경으로 서양식 주택을 보여주고, 석양을 바라보거나 가로등 아래를 비춘다. 석양에서 작가는 서서히 지는 태양의 빛을 거리에 흩뿌리고 다시 그 모습을 설명해준다.

 

정오 이전의 격렬한 햇빛처럼 마구 가라앉았다가 일어서지도 않고 요란하게 들끓지도 않는다. 빛과 그림자 모두 강렬하지 않다. 이때가 되면 햇빛은 아주 조용하게 가라앉고 그 미세한 빛의 입자들이 공기 중에 넓게 흩어진다. 빛은 아주 얇은 층을 이루지만 마구 새어나가진 않는다” (67p)

 

은 유리창으로 번져가고, 지붕 위로 사람들의 얼굴로 번져나간다. 또 소리를 실어 멀리 전달되어 황혼이 내릴 때는 빛과 소리, 냄새가 전부 얼굴을 바꾼다. 이렇듯 작가가 감각적인 문장에서 상하이를 한 번이라도 가본 사람은 거닐던 어느 골목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해가 지는 풍경은 어느 나라에서나 이뤄지기에, 이 모든 풍경들은 내가 거니는 골목을 비추는 것과 동일해 보인다. 작가가 옆집에서 들리는 코 고는 소리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도 모르게 그녀보다 더 낮은 자세로 그 소리를 들으려 애썼다.

 

 

찰나의 순간은 잔상을 만들어 낸다.

 

 

 

 

현실의 일상생활은 이처럼 면밀하고, 심지어 뒤얽힌 채로 우리의 감각기관을 뚫고 들어온다” (15p)

면밀하고, 뒤얽힌 삶의 끝은 감각기관인 걸까. 도시에 머무르며 느끼지 못한 냄새들을 그 도시를 떠나고 온 뒤에야 내가 살아가는 도시에서 그 냄새를 우연히 맡았을 때 기억은 추억으로 변해 눈앞에 펼쳐진다.

 

나에게 그 냄새는 마라샹궈(麻辣香锅)’였다. 알싸한 향의 산초와 고추기름이 든 마라 소스로 해산물, 채소 등을 볶아낸 요리로 매콤하면서, 밥반찬으로 손색없는 음식이다. 사실 상하이의 대표 음식은 아니지만, 상하이 도시 골목 구석구석을 거닐다 보면 이 냄새가 가득하다는 걸 느낄 수 있다.

 

4월의 어느 날, 쉬후이구의 골목길 어디선가 마라샹궈 냄새가 났다. 길을 걷던 지인과 나는 동시에 멈춰서 냄새가 나는 곳을 응시했다. 지인이 말했다.

마라샹궈를 먹어 본 사람은 맛있는 냄새로 맡아지지만, 먹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중국 냄새가 난다고 생각한다고.

 

맞는 말이다. 감각기관은 찰나의 순간에 잔상이 되어 자리 잡는다. 오래도록 추억기억으로 남는 것이다. 작가가 보여준 상하이의 잔상들은 아마 타국에 사는 나로서는 완전히 흡수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한 공간은 시간 속을 흐른다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 대해 객관적으로 인식하기 어렵다’. (245p) 그저 삶의 공간일 뿐 냉소적으로 그곳을 바라보고, 피상적으로 지나칠 뿐이다.

 

여름으로 접어드는 4월의 어느 날, 이 책을 들고 상하이 여행을 떠났다. 작가가 느꼈던 감정들을 조금이나마 알고 싶어 다섯 번의 상하이 여행 중 처음으로 배를 타고 황푸강을 건넜다.

 

황록색 강물은 너무 걸쭉해서 제대로 흐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물결도 흙덩이 모양인 데다 강한 비린내를 풍기고 있었다. 이런 물질과 사물이 내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124p)

 

그녀가 이야기 했던 황푸강을 바라보았다. .

4월의 상하이는 벌써부터 여름 냄새가 났다. 와이탄의 빛나는 골목들은 사람들로 넘쳐났고, 황푸강은 깊은 어둠으로 그 빛들을 더 밝게 빛내주고 있었다.

2원을 내고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강의 비릿한 냄새와 사람들의 몸 냄새에 머리가 어지러워 지려할 때 쯤 배에서 내렸다.

 

나에게 이 책은 가이드북이었다. 그녀가 말하는 상하이의 여자남자의 부분을 포함해 모든 글들이 나에겐 내가 걷는 여행 공간을 세밀하게 들여다보게 해준 책이다.

이 책 덕분에 분주한 여행이 아닌 차분한 여행이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