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와 전사 - 근대와 18세기, 그리고 탈근대의 우발적 마주침
고미숙 지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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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공간 수유+너머'라는 단체가 있다. 종로구 혜화동에 사무실이 있고 여기에서는 인문학을 중심으로 사회과학 분야까지 연구, 번역, 강연 등의 작업을 하고 있으며 일종의 코뮌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이 집단에는 이진경, 고병권, 고미숙 등 인문사회과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한번 정도 이름을 들어보았을 쟁쟁한 연구자들이 소속되어 있다.

<나비와 전사>는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고미숙이 심혈을 기울여 쓴 책이다. 책 제목에서 나비는 조선후기의 저명한 실학자 연암 박지원을 상징하고, 전사는 프랑스의 후기구조주의 철학자 미셸 푸코를 상징한다고 한다. 하지만 <나비와 전사>가 조선 실학과 프랑스 후기 구조주의의 연구서나 비교분석서는 아니다.

<나비와 전사>는 조선말, 한일합방기를 배경으로 한반도에 근대가 동터오는 현장을 인문학적 시선으로 조망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시기적으로 조금 앞선 정조조의 연암에 관한 기록과 그의 사상이 이용되었고, 흔히 푸코로 대표되는 프랑스 철학적 방법론 및 사유체계가 응용되었다. 고미숙의 분석에서는 푸코의 대표적 방법론인 고고학, 소위 지식의 고고학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나비와 전사>는 첫 장에서 근대의 동터옴의 모티브로 '기차', 특히 이광수의 '기차'를 시작으로 글을 시작해 간다. 그리고, 대한제국, 한일합방기의 주요 언론매체인 대한매일신보, 독립신문 등을 텍스트로 사용하여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나비와 전사>의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유기적으로 연결된 장들은 속도, 몸, 시간, 근대, 허준, 앎, 변강쇠와 옹녀, 소월과 만해, 병리학, 다산과 연암 등을 테마로 정말 재미있는 글을 보여주고 있다. <나비와 전사>도 마찬가지이지만 고미숙의 글들은 유익하고 재미있고 유쾌하기까지한 독서의 경험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인문학 서적이지만 마치 소설책을 읽는 것 같은 몰입과 줄어드는 페이지에 대한 아쉬움을 느끼게 하는 독서경험을 선사한다.

개인적으로는 책 전체가 다 좋았다. 첫 장이 조금 지루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다 좋았고, 어디 한군데 몰입과 독서의 즐거움을 떨어뜨리는 부분이 없었다. 독서한지 조금 지났지만 기억이 많이 나는 것은 3장의 변강쇠가와 이광수의 소설을 텍스트로 한 성적 판타지와 연애에 관한 내용이다.

우리에게 조선사회는 엄격한 유교적 윤리가 지배하고 성적으로 완강한 사회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미숙은 변강쇠가를 비롯한 민간의 텍스트를 인용하며 유교적 성적 엄격주의가 지배한 곳은 양반네의 규방과 침소이며 서민들은 성적으로나 생활상으로나 비교적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조선의 서민사회는 흔히 역사학에서 비교되는 서양 중세의 그것과는 또 달랐다. 중세의 기독교처럼 조선에는 유학이라는 지배이데올로기가 있었지만 그 이데올로기가 민중들의 구체적 삶에 다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은 서양의 중세와는 또 다른 양상이다.

한반도에서 성이 본격적인 통제를 받게되는 것은 오히려 훨씬 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그리고 시기적으로 겹치지만 조선이 민족국가라는 근대의 길로 들어서면서 부터이다. 그 원인이 조선의 식민지화 탓인지, 근대화의 탓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대한제국, 한일합방의 시기에 들어서면서 오히려 조선 민중의 성의식은 왜곡된다.

이후 일제 후에서 연애의 담론이 담론의 범위를 넘어서서 조선인의 의식구조에 어떻게 자리잡고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가 하는 인문학적 분석들도 이광수의 텍스트를 인용하여 설득력있게 기술되고 있다.

<나비와 전사>를 아직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서 일부분에 대한 감상만을 적어보았다. 그러나, <나비와 전사>의 다른 부분들도 정말 잘 써내려갔고, 인문학 책답지 않게 고리타분하지도 않고 흥미롭다. 관심있는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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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계질서를 리드하는 유럽합중국
T.R.리드 지음, 김정혜 옮김, 이호근 감수 / 한언출판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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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합중국>은 정통의 학술서적이나 유럽통합에 관한 르포타지라기 보다는 신문이나 잡지의 외교면 해설기사같다는 느낌을 준다.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은 <워싱턴포스트>지에서 오랜동안 기자생활을 한 저자 T.R.리드의 글쓰기나 기획,문체의 개성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유럽합중국>에서는 유럽연합이 탄생하기까지 유럽석탄공동체,유럽경제지대 등의 일련의 과정을 겪는 동안의 일들에 비교적 많은 지면이 할애되어 있다. 그리고, 그러한 각 단계별 통합을 거쳐 인구 5억의 단일통화권이 되기까지 공헌한 유럽의 정치,경제지도자들의 퍼스낼리티와 업적을 소개하는데에도 많은 지면이 할애되어 있다.

하지만 <유럽합중국>의 참 재미있게 독서할 포인트는 저자자신이 미국인이면서도 '무식하고 답답한' 미국인 대다수들이 유럽통합의 위력이나 유럽연합의 세계사적 의미를 너무나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고 폄하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부분들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그런 저자마저도 미국인이라는 한계에 갇혀 유럽과 세계경제의 블럭화 경향를 참으로 오만하게도 해석한다는 생각이 들지만 여하튼 흥미로운 독서의 경험이 되었다.

유럽통합과 세계적인 블럭화추세의 의미들

<유럽합중국>을 비롯한 지구촌적인 변화에 관한 책들,신문의 국제면을 읽으면서 늘 생각이 드는 것이 하나있다. 이런 변화들의 단일한 의미는 무엇일까하는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 그 어느 때보다 강화되는 미국의 국가패권주의? 아니면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항세력으로 등장하는 유럽연합, 중국의 등장? 사실 이런 분위기에 대한 논의는 미국의 이라크침공이전부터 계속 있어왔다.

그런 논의는 주한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한국적인 특성에 기인하는 탓인지 중심을 훑지 못하고 산만하게 분산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미국이라는 나라가 그러한 논의들의 핵심이다. <유럽합중국>의 독해에서도 결국 읽게되는 것은 유럽연합 자체가 아니라 미국이라는 제국에 대한 안티테제의 가능성으로서의 유럽연합이다. 그건 중국(또는 중화공동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며, 한국이 속한 동북아에서는 미국과의 관계가 향후 어떻게 자리매김하면서 동북아공동체가 형성될까하는 점으로 귀결된다.

글을 마치며

그 이름과 내용은 다르지만 유럽의 통합은 한반도의 통일을 연상시킨다. 그 통일의 형식에 대해서 그간 연합체,연방제,영세중립국제 등의 다양한 논의가 있어왔다. 그리고 요즘 각종 매체에서 떠들어 대는 것은 통일자체보다는 북한을 어떻게 포위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들이다. 물론, 거기에는 미국이 반드시 등장한다.

한반도의 통일과 동북아의 공동체형성 그리고 거기서 정말 배제시키고 싶은 미국이라는 존재. 그런 것들에 대해서 책을 읽은 후 떠오르기 시작했다. 유럽도 NATO라는 이름으로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유럽의 통합에 대해서도 미국이 중립적인 태도와 감정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은 한반도와의 공통점이다. 그런 공통점을 한 번 생각해 보면서 글을 마무리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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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 이후의 부의 지배
레스터 서로우 지음, 현대경제연구원 엮음 / 청림출판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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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터 서로우는 이제는 고전이 된 <제로섬사회>로 유명한 칼럼리스트이자 교수이다. 현재 미 매사츄세츠 공과대학(MIT)의 경영경제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미국 민주당 집권 존슨행정부에서 잠시 경제자문위원으로 일한 바 있고 최근의 저서로는 <세계화 이후의 부의 지배> 이외에 2000년에 국내출간된 <지식의 지배> 등이 있다. 그는 대표적인 지식사회론자로 알려져 있고 앨빈토플러 등과 함께 차세대 권력원천이 부(富)에서 지식으로 이전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세계화 이후의 부의 지배>의 원래 영어제목은 < Fortune favors the bold >이다. 한국사람도 잘 아는 서양의 격언 "행운의 여신은 용감한 자의 편이다."를 책 제목으로 달고 있다. 그런데 번역자가 책 내용과 연관해서 나름대로 <세계화 이후의 부의 지배> 라는 제목을 작명한 것 같다. 그리 좋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나쁘지도 않은 범상한 수준의 작명으로 생각된다.

<세계화 이후의 부의 지배>는 다분히 미국인의 입장에서 세계사의 최근 변동을 바라보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으로의 아시아계, 남미계 또는 아프리칸들의 이민에 의해 생기는 결과들(예를 들면 자국민들의 실업). 중국,대만,한국 등의 나라에서의 경제성장에 대한 평가. 이런 세계화 이후의 여러가지 국제사회적, 경제적 변화의 물결을 미국인의 입장에서 그리고 지식사회의 우월성을 주창하는 입장에서 논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세계화(globalization)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레스터 서로우는 세계화를 기회(opportunity)와 위협(threat)이라는 경영학자다운 관점에서 바라본다.(참고로 기회/위협분석은 경영전략에서 사용되는 SWOT분석이라는 툴의 일부이다.) 큰 변화는 위협이자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관점은 경영학의 종주국인 미국인들의 사고방식의 한 단면이다. 변동이 생긴다면 보수적인 사회체제에는 분명 균열이 생기고 기존의 시스템을 파괴하는 위협일 것이다. 이것은 최근의 세계화가 전세계적인 빈곤의 확대를 가져온다던가 3세계국가들의 고유문화를 파괴한다던가하는 비판에서도 그 일단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레스터 서로우나 미국인의 정서에서는 그런 변동과, 변동이 가져오는 위협은 일반론이며, 개인과 개별기업에게는 새롭게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위협을 기회로 바꾸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요구된다. 준비성,적응성,혁신정신 그리고 마키아벨리적인 교활함까지도 요구될 지 모른다. 하지만 레스터 서로우가 무엇보다도 강조하는 것은 한 가지다. 그것은 책 제목에 집약되어 있기도 한데,< Fortune favors the bold (행운의 여신은 용감한 자의 편이다) >라는 제목처럼 용감무쌍한 도전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 자에게만이 운명도 손을 내밀고. 행운도 입맞춤을 하는 것이다.

사실, <세계화 이후의 부의 지배>를 읽다보면 거부감이나 반감이 드는 구절들도 있다. 지나치게 미국과 서구중심적이라던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을 근거로 하는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과 자본주의의 우월성에 대한 맹신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레스터 서로우의 책은 읽을 만하고 받아들여야 할 만한 점들도 많다.

국내에서는 2005년 가을경에 출간된 걸로 기억하는데, 짱짱한 신간은 아니지만 최근나온 어떤 신간들도 제쳐두고 먼저 한 번 일독을 해볼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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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의 대중심리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3
빌헬름 라이히 지음, 황선길 옮김 / 그린비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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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의 대중심리>는 개인적으로 구하려고 무척 애를 먹었던 책이다. 1990년대 초엽 대학재학시절 어떤 선배의 소개로 처음 읽어보려고 했을 때는 아직 금서목록에서 내려오지 않아서 도저히 구할 수가 없었다.그리고,2000년 무렵 어느 신문에선가 서평을 보고 다시 기억이 나서 구입을 하려고 대학가 사회과학서점엘 갔을 때는 서점 주인이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하며 그런 책 보지 말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때는 도저히 이애가 가지 않았는데 그만큼 빌헬름 라이히에 관해서는 일반 대중이 아닌 지식인 사이에서도 편견의 벽이 높았던 때가 있었던 것 같다.여하튼 올해가 되어서 1940년대 독일에서 첫 출간된 이 책을 뜻밖에도 집근처 도서관에서 짱짱한 신간으로 구해서 읽게 되었다.그 때 기분은 감개무량하기까지 했다.

<파시즘과 대중심리>에서 빌헬름 라이히는 왜 노동대중이 히틀러나 무솔리니 같은 독재자에게 표를 찍고 쿠데타도 아닌 합법적인 선거로 집권을 시켰냐는 문제에 천작하고 있다. 라이히에 의하면 그것은 파시스트의 여론조작에 놀아나서 그런 것도 아니고 경쟁정당이였던 사회민주당의 무능때문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소위 말하는 <대중의 성격구조>에서 기인하는 자발적인 의사결정이라는 것이다. 대중은 자신들에게 억압을 가하리라고 예상을 하는 파시스트들의 집권을 스스로 욕망하여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그럼, 그 욕망의 뿌리는 무엇인가? 라이히에 의하면 그것은 대중이 태어나고 자라난 가부장제 가족구조에서 확대재생산된 것이라고 한다. 이진경의 프로이트적 해설을 조금 인용하여 설명하면 개인은 가정에서 엄마를 욕망하고 그 욕망은 아버지에 의해서 거세를 당할 수도 있다는 억압을 당하는 원천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 억압적이며 봉건적인 가족구조에서 성장한 대중들은 마치 매조히즘인 인간형으로양성이 되어 지배구조에 복종하며 그 복종에서 만족과 쾌락을 얻는다는 것이다.

라이히는 그런 현상에 대한 대안으로 <노동민주주의>를 주장하고 그런 생각에 동참하는 일군의 사람들과 실천에 옮기기도 했으나 그 자신의 책에서도 그렇고 다른 자료들을 봐도 그렇고 별로 만족스러운 결과는 얻지 못한 것 같다. 실제로 그의 말년은 대단히 불우해서 자신의 생각들을 실천해 보려다가 라이히는 자신이 소속되어 있던 공산당에서도 파문을 당하고,미국에 건너가서 오르곤 에너지라는 것을 연구하는 실험을 하다가 투옥되어 60세의 나이로 옥사를 한다.

최근 몇 년 한국사회에서는 대중들의 열정이 들끓었던 사건이 많았다. 월드컵열풍과 붉은악마, 미군장갑차사건, 황우석파동,대통령탄핵사건,독도분쟁 그리고 최근 지자체선거에서의 한나라당 압승. 그런 사건들을 단지 여론조작이나 대중들의 광적 선택이나 실수의 결과로 돌리기에는 해석상 미흡한 점이 많다. 그런 사건들을 보면서 주체적 존재로서의 대중과 자기의사결정을 하는 대중이라는 관점을 겨지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물론, 라이히에 의하면 대중의 오도된 선택은 가부장제 가족구조의 억압에 기인한 대중의 성격구조 탓일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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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희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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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가 시작되던 해인 2001년도 5월 <민음사>에서 책이 한 권 번역 출간되었다.책의 한국어 제목은 <소유의 종말>이였고, 제레미 리프킨이라는 미국인 문명비평가 겸 경제학자에게 관심이 있던 사람들에게 읽히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스테디셀러가 되어 관심있는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고 있다.

저자는 1990년대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노동의 종말>을 비롯해서 <육식의 종말>,<바이오테크 시대>, 작년에 국내 출간된 <유러피언 드림> 등의 저서를 썼다. 제레미 리프킨은, 자신의 책에서 밝힌 내용으로 보건데 미국의 60년대 소위 미국판 "운동권"인 반전운동 세대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책은 급진적이지는 않더라도 자본주의적 사회에 대한 비판과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소유의 종말>도 그 중 하나이다.

책의 원래 영어 제목은 "Age of Acess"이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접속의 시대'쯤 될 것이다. 그런데, 그의 책이 '...의 종말'로 제목이 스타일화되는 가운데서 <소유의 종말>로 제목이 정해졌다고 한다. 책의 내용에 비추어 보면 '접속의 시대'라는 제목도 큰 무리가 없고, 오히려 내용의 이해에 더 큰 도움이 된다고 하겠다.

<소유의 종말>은 일종의 미래학 서적으로도 볼 수 있다. 책이 쓰여진 시점인 20세기말에 인터넷 시대의 도래를 바라보면서 21세기의 사회,문화,경제,정치 양식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서술한 책이다. 위에서 언급한 "access"란 책에서 다양한 의미로 쓰이지만 우선 인터넷이나 웹과의 접속을 의미한다.

<소유의 종말>에서 제레미 리프킨은 사회,문화 전반에서의 '소유"의 양식이 '접속(access)'의 양식으로 바뀔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쉽게 예를 들면, 기존의 사회에서는 집과 자동차를 소유하고 재산으로 증식하는 사회였다면 앞으로의 사회에서는 집과 자동차 같은 내구재도 렌트하여 사용하는 사회로 바뀐다는 것이다.이런 내용은 에리히 프롬의 고전 <소유냐 삶이냐?>를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에리히 프롬이 좀 더 인간을 중심에 놓고 연구했다면, 제레미 리프킨은 사회와 문명을 중심으로 자신의 논지를 풍부한 예를 들며 전개하고 있다.

<소유의 종말>에서 제레미 리프킨은 비교적 비판적인 관점으로 사회의 변동(소유의 방식에서 접속의 방식으로의 변동)을 조망한다. 위에서 언급한 재산관계를 비롯해서 정보통신분야, 문화의 양식, 서민의 삶에서의 그러한 변동이 일종의 "문화적 다양성의 해체"로 귀결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한 현상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어떠한 사회변동도 반드시 상업화의 길을 걷게되고 그래서 도착하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에 따르면 그런 파국을 피하기 위해서 "고유(지역)문화의 보존"이라는 대안을 내세우고 있다.

이런 저자의 생각들은 반세계화주의자들의 생각이나 지역문화의 보존을 주장하는 시민사회론자들의 생각과도 일맥상통하며 실제로 많이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지역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은 통한다'고 생각하며, 지역 전통문화의 보존 못지 않게 현대적이거나 탈현대적인 양식을 띠는 문화와 대중문화도 포괄하여 사회적으로 '문화'를 새로 약속하는 일반적 합의가 요구된다고 본다.그리고, 접속의 시대가 이미 도래한 즈음에 있어서 제레미 리프킨이 지적한 구체적인 사회변동의 예를 참조할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생활에도 그가 제시한 '개념적 틀'과 '아이디어'를 적극 활용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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