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문화로 읽는 나무사전
강판권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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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유명한 김춘수의 <꽃>의 한 구절을 되뇌어 보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름이 단순한 낱말의 나열이나 조합인 것처럼 보이더라도, 이름이 붙는 순간 거기서 의미가 발생한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름은 언제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름을 매개로 사물과 타인을 만난다. 그러니까 이야기를 쌓는다. 오래 쌓인 이야기는 때론 구전되고 때론 기록되어 역사가 된다. 오래된 나무에 나이테가 새겨지듯, 역사의 주름은 깊어진다.


하물며 무명의 나무, 무명의 꽃에 이름을 붙였을 때, 그 이후에는 스쳐지나가는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에 그치지 않게 된다. 내가 보는 나무, 냄새 맡는 꽃, 맛있게 먹는 과일도 이름 없이 만날 수는 없다. 즉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나무를 만나는 것이다. 강판권의 『역사와 문화로 읽는 나무사전』에서 인상적인 지점은 우리가 나무를 이해하는 방식을 잘 드러낸다는 데 있다. 『나무사전』은 학명과 식물학적 지식을 통해 나무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 우리가 언제나 '인공적 자연'으로서, 역사와 문화로서 자연을 만나왔음을 보여준다. 때문에 제목에 '역사와 문화로 읽는' 이라는 보충설명이 들어갔을 것이다.


최충헌의 아들 최우崔瑀(?~1249)도 잣나무에 관심이 많았다.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에 따르면, 그는 안양산安養山에 있는 잣나무를 옮겨다 집 뜰에 심었다. 그런데 안양산은 강도江都에서 며칠 걸리는 거리였고, 옮긴 시기도 추운 겨울이었다. 그런 까닭에 이 작업에 참여했던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방榜을 붙일 정도였다. "사람과 잣나무 중 어느 쪽이 소중한가?" 또 고려 25대 충렬왕의 비妃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는 민간에서 잣을 거두어들여 강남에 보내 장사까지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 특히 그녀는 잣이 나지 않는 지역에서까지 잣을 징수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74~75쪽)


잣나무에 얽힌 고려 시대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한 그루의 나무에는 역사가 스며 있다. 단지 오래 나이를 먹었다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가 나무를 이해하고 기억하는 데에 이야기가 늘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저자는 역사학자로서 학명과 식물학적 지식을 배제하지는 않지만, 주된 관심은 우리가 나무와 관계를 맺어온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나무사전』은 식물학자의 관점이 아니라 역사학자의 관점으로, 그리고 나무를 사랑하는 한 사람의 관점으로 썼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나무사전』은 은행나무와 소나무, 매화나무와 사과나무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나무는 물론, 멀구슬나무, 고욤나무처럼 제법 생소한 나무에 이르기까지 다루고 있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자연이 아무리 '인공적 자연'이라고 하지만, 도시에서 무심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동안 쉽게 지나치기 쉬운 것이 나무일 것이다. 조경부터 식생활, 건축까지 『나무사전』에 담긴 풍부한 역사 이야기를 통해 나무와 좀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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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 시대 - 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알랭 드 보통 지음, 최민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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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소식`에 지쳐 다시금 책을 집어들었다. 피하려 해도 좀체 피할수 없는 뉴스의 홍수 속에서, 그저 지나치려 했던 헤드라인들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뉴스의 시대>를 읽으며 현실을 직시하는 것과 뉴스에 매몰되지 않는 것 사이의 긴장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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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희생자들 - 스탈린 사후, 굴라크 생존자들의 증언
스티븐 F. 코언 지음, 김윤경 옮김 / 글항아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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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 테러라는 질곡을 거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외면해서는 안 되는 역사이다. 역사가 늘 `지금 여기`의 문제라는 것을 알려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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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드릭스 2014-09-18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블로그는 하시는 군 ㅋㅋ

oneitherside 2014-09-22 19:27   좋아요 0 | URL
엉ㅋㄷ
 
뉴스의 시대 - 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알랭 드 보통 지음, 최민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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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의 『뉴스의 시대』의 원 제목은 <The News : A User's Manual>이다. 말 그대로 '뉴스에 대한 사용설명서'다. 이런 '~사용설명서'라는 제목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예컨대 『자본주의 사용설명서』라던가 『뉴라이트 사용후기』처럼 책의 계몽적 목적을 분명히 하는 식이다. 그렇다면 알랭 드 보통이 뉴스에 대한 사용설명서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교육에 대해 별의별 소리를 떠들어대면서도, 현대사회는 자신의 구성원들을 가르치고 있는 가장 영향력 있는 수단을 검토하는 데 참으로 무심하다. 교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건 간에, 보다 더 강력하고 지속적인 교육은 방송 화면과 전파를 통해 이뤄진다. (…) 뉴스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현실을 만드는 으뜸가는 창조자다. 혁명가들이 그러하듯, 만약 당신이 한 나라의 정신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미술관, 교육부, 또는 유명 소설가들의 집으로 향하지 마라. 정치체의 신경중추인 뉴스 본부로 곧장 탱크를 몰고 가라. (13쪽)


보통은 누구나 뉴스를 보지만 정작 제대로 뉴스 보는 법을 배운 적은 없다고 주장한다. 지금 중·고등학생이 어떻게 공부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중·고등학생 때 읽었던 도덕·윤리 교과서에는 뉴스의 정의나 기능 따위는 적혀 있어도 어떻게 읽어야 더 나을지에 대해서는 좀체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 같다. 민주시민이라면 그 정도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일까. 사실은 입시 외에 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우리 교육의 문제가 여기서 나타나는 셈이다.


특히 뉴스가 일상을 잠식하다시피 하는 오늘날, 뉴스를 피한 채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세월호의 비극과 7.30 재보선의 여파에 대해 굳이 찾으려 들지 않더라도 일간지의 헤드라인에서, TV 속 뉴스 프로그램에서, 하다못해 포털 사이트의 인기 검색어에서 관련 뉴스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뉴스에 관심도 없고 굳이 보려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하더라도 이미 뉴스 속에 파묻혀 사는 한 그런 선언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만큼 뉴스에 일상이 휩쓸리기 쉬운 때에 뉴스에 대한 사용설명서 하나쯤은 있어도 좋지 않을까. 그런데 『뉴스의 시대』는 그저 뉴스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알려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보통은 정치, 해외, 경제, 셀러브리티, 재난, 소비자 정보의 6가지 주제로 각각의 뉴스를 해석하는데, 이들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공통적인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뉴스를 더 나은 삶을 위한 수단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우리는 빼어난 셀러브리티들을 고작해야 소극적인 궁금증이나 엉큼한 호기심에 걸맞은 신비한 유령처럼 대하기를 그만두어야 한다. 그들은 성실함과 전략적 사고를 통해 특별한 위업을 이룬 보통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 사람에게서 무엇을 보고 받아들여야 할까?'라는 기본적인 질문을 염두에 두고 그들을 사례연구 대상으로 삼아 자세히 뜯어보고 엄밀히 분석해야 한다. (190쪽)


고대 그리스에서 영웅을 숭앙한 것이나 중세 유럽에서 가톨릭 성인을 통해 삶의 모범을 찾는 것처럼, 현대에는 뉴스의 주요 지면을 장식하는 셀러브리티에게서 자신이 받아들일 만한 부분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보통은 소비처럼 어떤 본보기도 없이 자율적인 선택의 영역이라고 상상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같은 관점을 도입한다.


이는 분명 중요한 문제지만, 소비자 정보 뉴스를 그런 실용적인 조사에만 한정시키는 건 우리가 특정 제품을 사고 싶어하는 마음을 품게 된 애초 동기의 핵심적인 특징을 간과하는 것이다. (…) 우리는 그저 물건을 소유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 물건을 소유함으로써 변화하길 바라는 것이다. 일단 우리가 충분한 관심과 관대함을 가지고 소비 행위를 살펴볼 경우, 우리가 결코 못 말릴 정도로 물질주의적인 인간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우리 시대를 다른 시대와 뚜렷이 구분되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물질적 상품의 획득을 통해 각종 복잡한 심리적 목표를 성취하고자 노력하는 우리의 야망이다. (258쪽, 강조는 본문)


그런 점에서 알랭 드 보통이 뉴스를 바라보는 관점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연상시킨다.


그러니 "인간이니 인간적인 것을 생각하라", 혹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니 죽을 수밖에 없는 것들을 생각하라"라고 권고하는 사람들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우리들이 불사불멸의 존재가 되도록, 또 우리 안에 있는 것들 중 최고의 것에 따라 살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이 최고의 것이 크기에서는 작다 할지라도, 그 능력과 영예에 있어서는 다른 모든 것을 훨씬 능가하기 때문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도서출판 길, 372쪽)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것에 따라 사는 것." 알랭 드 보통은 헤겔이 "삶을 인도하는 원천이자 권위의 시금석으로서의 종교를 뉴스가 대체할 때 사회는 근대화된다(11쪽)"고 말한 것을 인용하면서, 종교를 대체한 뉴스 혹은 현대의 종교로서의 뉴스를 활용하는 방법을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찾는 것으로 보인다. 좀더 넓게 말하자면 뉴스에 대한 '철학적 관점'의 도입, 이것이 『뉴스의 시대』를 단순한 실용서에 그치지 않도록 하는 동력이 된다.


철학적인 이야기를 고답적이지 않게 풀어내는 알랭 드 보통의 장기가 『뉴스의 시대』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된다. 뉴스에 빨려들어 일상마저 망각하는 데서 벗어나 뉴스를 '더 나은 삶'을 향한 수단으로 재구성하는 것.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그만큼 필요한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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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의 공간/장소이지만 획일화될 수 없는 공간/장소로서의 헤테로토피아. 푸코가 중단한 미완의 기획 헤테로토피아는 유토피아적 기획을 전체주의로 환원하는 경향에 대항하는 데 어떤 함의를 줄 수 있을까. 연구자들이 언급만 하던 헤테로토피아 개념을 직접 책으로 만날 수 있다는 기쁨이 하나(번역자도 신뢰가 가는 분이고), 그리고 오랫동안 푸코와 대면해 온 연구자의 강의를 기다리는 기쁨이 또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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