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법서설 - 이성을 잘 인도하고 학문에서 진리를 찾기 위한
르네 데카르트 지음, 이재훈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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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이재훈 옮김, 휴머니스트, 2024)은 잘 알려져 있듯이 근대 철학의 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막상 읽어보니 명성에 비해 너무나 소박한 ‘에세이’라는 점이, 또한 ‘생각나는 나’의 존재만은 의심할 수 없다는 명제가 무척 단순 명쾌하게 서술되고 있다는 점이 새삼 흥미로웠다.


《방법서설》은 1637년 익명으로 출간된 《굴절광학》, 《기상학》, 《기하학》의 서문으로 쓰였다. 즉 일종의 방법론 소개인 셈으로, 데카르트가 자신의 연구 방향을 독자들에게 나름 친근하게(현대의 우리말 독자들에게는 해설이 없다면 충격과 공포이지만.) 설명하려고 프랑스어로 쓴 글이다. 책을 읽다 보면 원제에 해당하는 “이성을 잘 인도하고 학문에서 진리를 찾기 위한 방법서설”(휴머니스트판은 원제 전체를 제목으로 삼았다.)이 “내가 공부하는 법” 또는 “나처럼 공부하면 이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로 보여서 슬며시 웃음이 났다. 특히 지나치게 겸손 떠는 이런 문구를 읽고 있자니 종교전쟁 시대의, 그리고 교권이 아직 강력했던 시대의 자기 방어술로 보여서 쓴웃음도 나왔다. “이처럼 나의 계획은 이성을 잘 인도하려고 각자가 따라야만 하는 방법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나의 이성을 인도하려고 내가 어떻게 노력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19쪽).”


이 책에서 이재훈 국립창원대 철학과 교수가 해석하는 데카르트는 몽테뉴의 《에세》의 독자, 르네상스 인문주의 전통의 계승자다. 데카르트는 스콜라철학자들의 책에서 진리를 찾아 헤매다 몽테뉴를 따라 ‘세계라는 책’을 여행하기로 결심했고, 세계라는 책 속 여행의 끝에서 ‘나라는 책’을 여행하는 쪽으로 방향을 재설정한다. 이 판본에서 눈길이 가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데카르트의 시대를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 또는 이행기로 규정하고 단절에 집중하는 방식이 아니라, 데카르트 사유의 연속성을 당대의 휴머니티(humanity) 탐구라는 관점에서 살핀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끝날 줄 모르는 혼란 속에서도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탐색하려 했다는 점에서, 과연 종교전쟁 시대의 책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본인이 수학에 능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논리학과 기하학, 대수학조차 진리 탐구의 전제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는 현학적이고 동어반복적인 수학이 아니라 ‘생각하는 나’, 내가 스스로 관찰할 수 있고 통찰할 수 있는 범위 안의 내가 진리의 출발이라고 선언한다. 그 어떤 지적 권위가 아니라 나로부터 사고를 시작한다는 이 단순한 명제가 많은 것(이른바 ‘문명’이든 파괴든 또는 이 둘의 변증법이든)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이 중요하다(데카르트의 사유는 당대 철학자들의 문예공화국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스티븐 내들러의 《스피노자와 근대의 탄생》[김호경 옮김, 글항아리, 2014]에서, 스피노자 또한 데카르트의 독자로서 여러 데카르트 주석서를 쓰고 편지를 통해 철학자들과 논쟁을 벌였다고 서술된 것으로 기억한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점은 데카르트가 의사 또는 생리학자로서 심장의 운동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생명에 대한 기계론적 관점과 (지금의 관점으로는) 종 차별적 시선을 드러내는 대목으로 악명 높지만, 데카르트를 현대적인 시각(철학이 사유 일반에 관한 활동이 아니라 분과 학문 체계에 편입된 종목 중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의 ‘철학자’가 아니라 전일론적인 자연철학자로 보게 해준다는 점에서 눈길이 갔다. 이에 대해서는 홍성욱의 글을 참고할 만하다. 〈생리학자 데카르트〉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77920&cid=58939&categoryId=58951


옮긴이 이재훈 교수의 주석과 해설이 있었기에 데카르트에 대한 편견에서 조금 더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데카르트에게 근대주의의 폐해를 전적으로 돌리는 시각 같은 것. ‘생각하는 나’는 많은 질문을 낳았고 그 과정에서 생산도 파괴도 일어났지만, 데카르트가 인간의 절대성을 부각하고 주장했다는 식의 해설로부터는 거리를 둘 수 있게 해준다(데카르트의 서술을 따라가다 보면 다분히 스토아철학적인 부분도 발견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에만 최선을 다해야 하며, 그중에는 신체와 정신의 양생도 포함된다는 식의 접근을 말한다).


한편 옮긴이는 오늘날 철학의 기본 전제가 된 듯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 기술(techne)을 강조하는 철학적 경향을 신학적 절대주의의 세속화된 버전으로서 ‘기술적 절대주의’로, 기술적 절대주의를 추구하는 이들을 “니체와 하이데거 그리고 이들의 에피고넨(epigonen)들(184쪽 각주 19번)”이라고 규정한다. 여기서 니체와 하이데거의 에피고넨에는 프리드리히 키틀러 이후의 매체학자, 브뤼노 라투르를 비롯한 행위자연결망이론(ANT) 연구자, 이른바 ‘신유물론’으로 느슨하게 묶이는 이론적 담론의 제안자(마누엘 데란다, 제인 베넷 등)를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중심주의를 보다 면밀하게 비판하기 위해서라도 휴머니티 탐구를 옹호하는 새로운 《방법서설》을 살펴볼 가치는 충분할 것 같다. 데카르트는 여전히 간단하게 기각할 수 있는 철학자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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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심장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41
조지프 콘래드 지음, 황유원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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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콘래드의 《어둠의 심장》(황유원 옮김, 휴머니스트, 2024)은 콘래드 사망 100주년을 기념해 새로 번역한 판본이다. 같은 원서의 다른 번역을 살펴볼 깜냥은 없지만, “과연 시인”이라는 인상을 줄 만큼(이 또한 선입견임을 부정할 수 없지만) 옮긴이의 세심한 번역이 두드러진다. 그런데 콘래드라는, 이른바 ‘세계문학전집’의 세계에 입주한 작가가 왜 지금 시점에서 새삼스럽게 소환된 것일까? 그리고 왜 제목은 ‘어둠의 심장’일까? 소설의 내용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 두 가지다. 전자보다 후자가 좀 더 설명하기 수월해 보인다. Heart of Darkness(1899)의 한국어판은 그동안 《암흑의 핵심》(민음사판), 《어둠의 심연》(을유문화사판), 《어둠의 속》(민족문화사판, 문예출판사판), 《암흑의 오지》(큰글판) 등으로 번역되었다. 옮긴이는 왜 ‘핵심’이나 ‘심연’ 같은 직접적인 표현이 아니라 ‘심장’이라는 은유를 썼는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어둠의 심장》을 다 읽은 후 지금도 마음속에, 아니 귓가에 남아 있는 것은 한밤중에 쿵, 쿵 고동치며 들려오는 저 아프리카 숲의 어두운 심장 소리다. 나는 아프리카 숲에서 울리는 북소리를 실제로 들어본 적이 없지만 심장에 손을 가져간 뒤 눈을 감으면 자연히 그 북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자 ‘Heart’를 ‘심장’ 말고 다른 단어로 옮기기란 불가능해졌다(229쪽).”


‘어둠의 심장’이라는 번역은 소설이 긴 강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더한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끌고 가는 화자이자 행위자인 말로(C. Marlow)는 증기선을 몰고 콩고강을 거스른다(끝이 나지 않을 듯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서 말로는 남성화된 셰헤라자드처럼 보인다). 그와 증기선은 아프리카의 구불구불한 내장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대지에 초목이 만발하고 커다란 나무들이 왕이나 다름없던 태초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여행과도 같았어. 공허한 강물, 거대한 침묵,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숲. 공기는 뜨끈하고 빽빽하고 묵직하고 둔탁했어. 햇빛의 광휘에도 기쁨은 없었지. 길게 뻗은 수로는 지나는 배 한 척 없이 이어지다가 그림자가 드리운 먼 곳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네(81쪽).”


말로가 파고든 아프리카의 내장은 원시의 내장처럼 묘사된다. 하지만 서평가 정희진이 지적했듯이 《어둠의 심장》은 “근대적 주체, 제국주의 주체의 필연적 분열(233쪽)”을 드러낸다. 말로가 체험한 콩고강과 시간이 지나 사람들에게 끝없이 이야기를 풀어낼 때 머무른 템스강이 포개질 때, 아프리카와 영국이, 식민지와 제국이 포개지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자는 자신의 내장을 파고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둠의 심장’은 새로운 판본의 번역어로 적절하다고 하겠다. 남은 질문은 왜 지금 《어둠의 심장》이 새로 출간되었는가, 콘래드의 여러 작품 중에서 왜 이 소설이 새로 나와야 했는가이다. 문화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은 《정치적 무의식》에서 콘래드의 대표작으로 《로드 짐》과 《노스트로모》를 언급하면서, 그중에서도 《로드 짐》의 분석에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했다(제임슨이 주목하지 않았다고 해서 《어둠의 심장》이 별 볼 일 없는 작품이라는 것이 아니다). 제임슨의 분석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콘래드의 ‘해양 소설’에 있어 그의 문체가 보이는 인상파적인 성격, 바로 모더니즘을 부각한 점이다. 《어둠의 심장》이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모티프라는 것,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의 한가운데에서 다시 읽히고 쓰였음을 생각할 때 이 같은 분석은 너무나 전형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동시대 이론적 담론의 시선으로 봤을 때 시대착오적일 것이 분명한) 제임슨의 시대구분, 즉 리얼리즘/산업자본주의-모더니즘/제국주의-포스트모더니즘/후기자본주의라는 렌즈로 들여다보면, 새로 번역된 《어둠의 심장》은 포스트모더니즘 또한 역사화된 지금, 미학과 정치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는 데 필요한 텍스트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이 말은 미학을 정치로, 정치를 미학으로 곧장 번역할 수 없음을 전제한다. 여기에는 매개가 필요하며, 여기서 그것은 소설 또는 텍스트다). 《어둠의 심장》이 보여주는 제국주의의 풍경 또는 제국주의의 인상은 역사를 소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금도 장기지속되는 수탈의 역사를 환기시킨다.


비록 옮긴이가 《어둠의 심장》을 너무 학술적으로 읽지 말기를 제안하고, 탈식민주의적 주제가 “동양인인 우리에게(231쪽)” 피부에 와닿는 주제는 아니라며 정치적 독해를 거부하는 제스처를 취하지만(물론 탈식민주의가 “엄숙한 학술 세미나 현장[231쪽]”에서 오르내리는 주제임은 부정할 수 없다), 탈정치적 제스처를 불러일으키는 텍스트의 정치성을 옮긴이가 강조하고 싶어 했던 바로 그 문체를 통해 읽어내는 쪽이 보다 흥미로울 것이다.


새로 읽는 《어둠의 심장》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사운드다. 옮긴이가 강조한 “뚫고 들어갈 수 없을 듯이 빽빽한 문체, 어둠에 가까운 문체(227쪽)”는 제국주의란 유령의 제국임을, 제국주의자들이 ‘모험’ 속에서 대면하는 것이란 분열과 공포임을 자백하는, 성마르고 낮게 으르렁거리는 사운드로 가득 차 있다.


“닻사슬이 내려가며 들리는 둔탁하게 덜컹거리는 소리가 멈추기도 전에 어떤 외침이, 무한한 황량함이 내지른 듯한 아주 커다란 외침이 우중충한 공기 속으로 천천히 솟구쳤어. 그러고는 멎었지. 야만적인 불협화음의 음조로 크게 항의하는 듯한 소리가 우리의 귀를 가득 채웠어. 전혀 예상치 못한 소리였기에 모자 아래의 머리카락이 곤두설 지경이더군. 다른 사람들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나에게 그 소리는 안개 자체가 너무 갑자기 내지른 비명처럼 들렸고, 이 떠들썩하고 애절한 으르렁거림은 사방에서 한꺼번에 울려 퍼진 게 분명했어(94~95쪽).”


무엇보다 말로가 대면을 갈망하면서도 회피하고 싶어 했던 남자(커츠)는 오직 목소리로만 존재하는 유령이다.


“나는 하마터면 그녀에게 ‘당신은 저 말이 안 들리십니까?’ 하고 외칠 뻔했어. 거세어지는 바람의 첫 번째 속삭임처럼 위협적으로 점점 커지는 듯한 속삭임, 우리를 온통 둘러싼 집요한 속삭임으로 황혼은 그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지. ‘끔찍하구나! 끔찍해!’(183쪽)”


이야기꾼을 위협하고 또 이야기꾼이 독자를 위협하려 동원한 사운드는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인다. 제국주의의 유령은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으며 끈덕지게 같은 소리를 내뱉는다. “끔찍하구나! 끔찍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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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니바퀴와 괴물 - 경제학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가
다이앤 코일 지음, 김홍옥 옮김 / 에코리브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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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에 대한 경제학자의 응답. 경제학이 실제로 무엇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고, 공공을 위한 경제학을 구축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는 (여전히 주류에 비해) 흔치 않은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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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니바퀴와 괴물 - 경제학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가
다이앤 코일 지음, 김홍옥 옮김 / 에코리브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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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에는 조지프 콘래드의 《어둠의 심장》 읽기를, 토요일에는 다이앤 코일의 《톱니바퀴와 괴물》 읽기를 마쳤다. 《어둠의 심장》에 대해서는 오래전 힘겹게 읽었던 프레드릭 제임슨의 《정치적 무의식》 중 콘래드 부분(〈5장. 로맨스와 사물화: 조셉 콘래드에서 플롯 구성과 이데올로기적 봉쇄〉)을 다시 읽고 리뷰를 쓰는 게 좋겠다.


다이앤 코일의 《톱니바퀴와 괴물》(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르, 2023)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와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충격 속에서 예비되고 쓰인 책이다(지은이가 2012년부터 2020년 사이에 했던 강연을 바탕으로 개고했다). 영국 옥스포드대학교에서 경제학 학사학위를,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은 지은이는 주류경제학의 세례를 받은 경제학자로 보인다. 하지만 지은이 스스로 밝혔듯이 다양한 직업을 경험했기에(영국 재무부 소속 경제학자로 이력을 시작해 《인디펜던트》의 기자로 일했고 BBC 신탁 부위원장, 영국 경쟁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현재는 맨체스터대학교를 거쳐 케임브리지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과거의 이론에 경도되지 않고 보다 실질적이면서 현실에 바탕을 둔 교육과 정책 수립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은이는 경제학과 경제학자에 대한 힐난(“경제학자들은 현실을 너무 몰라.”)을 되받아치는 한편, 경제학과 경제학자가 놓치는 부분(“경제법칙은 큰 틀에서 바뀌지 않아.”)을 적극적으로 개선하려 한다. 지은이에 따르면, 경제학의 수행성(performativity) 또는 반영성(reflexivity)이 글로벌 금융위기를 촉발했는데도 경제학자들은 이를 면밀하게 들여다보지 못했다. 무엇보다 경제학자들은 행동주의를 이론 틀에 수용하긴 했어도(행동경제학), 신고전학파 또는 한계효용학파의 전제인 수확 체감의 법칙(생산을 위한 요소의 투입이 지속될수록 생산량이 오히려 줄어드는 경향)에 여전히 매여있어 수확 체증의 법칙(생산을 위한 초기 투자액은 크지만 한계생산비용이 0에 수렴하는 경향)이 강하게 작동하는 디지털 경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경제이론이 글로벌 금융위기와 팬데믹, 디지털 경제와 인공지능의 부상 같은 사회경제적 변화(보다 강하게 말하면 ‘정세[conjoncture]’)를 따라가지 못하는 현상은 ‘그저 이론적인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경제학은 숱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기업(보다 적극적으로 말하면 국가와 자본)에서 정책과 경영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현실을 더욱 나쁜 방향으로 주조할 것이기에, 지은이는 경제학이 보다 나은 측정 기준(metrics)을 고안해 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류경제학의 철학적 전제인 공리주의, 방법론적 개인주의, ‘분리 프로토콜(경제학을 사실에, 철학을 당위의 자리에 올려놓고 경제학이 공평무사한 사실을 다룬다고 간주하는 태도)’, 개인을 톱니바퀴에, 사회를 기계장치에 빗대는 은유, 일종의 제국주의적 태도를 내려놓아야 한다. 상호 의존성과 자기 반영성이 강한 디지털 경제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때, 그리고 그동안 뒷전으로 밀려났던 후생경제학에 대한 관심을 부활시킬 때 금융위기와 팬데믹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보다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지은이의 주장이다. 이를 집약하는 용어가 바로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이다. 지은이는 오래된 용어인 정치경제학의 부활을 제안함으로써, 경제학이 ‘사실’에 입각한 (기술적인[technical]) 학문이 아니라 공공의 의무를 다하는 (정치적인[political]) 학문임을 천명한다.


《톱니바퀴와 괴물》은 지은이가 경제학계 ‘내부’의 사람이라는 점에서 (지은이는 경제학자가 현실의 ‘외부’에 있을 수 없음을 거듭 강조한다는 걸 덧붙여야겠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금융을 사회문제의 태풍의 눈으로 보고 연구했던 사회학자, 인류학자 들의 연구가 어느 정도 학계에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단적으로 지은이는 경제학의 수행성을 이야기하면서 도널드 매킨지(Donald Mackenzie)의 연구(《카메라가 아니라 엔진이다: 금융모델은 어떻게 시장을 형성했는가(An Engine, Not a Camera: How Financial Models Shape Markets)》 등)를 직접 언급한다.


디지털 경제의 행위자들이 톱니바퀴(Cogs)가 아니라 괴물(Monsters)이라는 지은이의 은유는 미셸 칼롱(Michel Callon)이 〈경제적 시장이 사회적인 것의 증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소고(An Essay on the Growing Contribution of Economic Markets to the Proliferation of the Social)〉에서 다룬 ‘사회적인 것의 증식’과 ‘호모 이코노미쿠스 2.0’에 상응한다(매킨지와 칼롱은 브뤼노 라투르, 존 로 등과 함께 행위자연결망이론[Actor-Network Theory, ANT]을 구성하는 데 기여한 [ANT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인간 행위자들’이다). 수행성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측정 기준 또는 계측학이라는 문제로 넘어가는 것도 자연스럽다. 이론의 구축이 현실의 구축으로 직결된다는 것이 수행성 개념의 핵심이기 때문이다(그렇기에 지은이는 ‘실질 GDP[real GDP]’의 관념성/비현실성을 지적하는 한편, 경제를 계측할 새로운 척도를 개발해야 할 필요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1장만 잘 넘어가면 2장부터는 비전공자도 비교적 순조롭게 읽을 만한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6장에서 사회주의 계산 논쟁을 언급하는 대목이 흥미로웠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전한다 해도 완벽한 계획경제를 달성할 수 있을 만큼의 정보를 소화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전망은, 기술진보를 ‘진보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섣부른 희망을 유보시킨다는 점에서 생산적이다(계산이라는 관점에서 시장경제 옹호자와 계획경제 옹호자가 같은 전제를 공유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조하나 보크만의 《신자유주의의 좌파적 기원: 냉전시대 경제학 교류의 숨겨진 역사》[홍기빈 옮김, 글항아리, 2015] 또한 참고할 만하다).


번역은 전반적으로 잘 읽히게끔 다듬어졌고 주석도 비전공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많이 덧붙인 흔적이 보인다. 그럼에도 아쉬운 부분이 있다. reflexivity를 ‘반영성’이 아니라 ‘반성성’으로 번역한 것과 political economy를 ‘정치경제학’이 아니라 ‘국가경제학’으로 번역한 것이 그렇다. 전자는 ‘반영’이라는 개념을 놓치고, 후자는 《자본(론)》의 부제인 ‘정치경제학 비판’에 대한 강신준 교수의 주장에 의지하는 바람에 지은이가 사회 참여적인 경제학의 부활을 제안하는 뉘앙스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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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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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는 예전에 북스피어판을 읽어서 패스. 표제작 <숨>은 문장이 정갈하니 아름답고,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과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은 각각 시간여행과 다세계 해석을 명민하게 풀어낸다.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은 매체이론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더욱 흥미롭게 볼 단편이다(또한 이 단편에는 우리 기억의 왜곡과 일그러진 자아상을 냉정하게 돌아봄에 따른 섬뜩함이 따라붙는다). 늘 그렇듯 김상훈 선생의 번역에 많이 빚진다.


선집에 일관된 문제의식은 자유의지로 보인다. 우리가 물리적 객체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 주체인 것은 자유의지 때문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그것이 제아무리 허구더라도 우리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우리가 해야 할 일>, 95쪽)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테드 창의 소설을 하드 SF라는 범주로만 독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테드 창은 기술진보 속에서 인간이 겪는 딜레마를 신중하고 세심하게 들여다본다. 결국 소설은 인간이 쓰고 읽는다는 것, 그것을 깊이 인식하고 쓴다는 것에 테드 창 소설의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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