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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살이 되면 ㅣ Dear 그림책
황인찬 지음, 서수연 그림 / 사계절 / 2023년 4월
평점 :
얼마 전 일요일 아침 동네를 걸었다. 이전에는 갖가지 꽃들이 봄을 알리는 길을 걸으면 감탄하며 카메라에 담기 바빴다. 그런데 올해는 그 아름다움이 문득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또 시작이구나. 또 한 해를 살아내야 하는구나. 봄, 여름, 가을, 겨울... 다시 겨울이 올 때까지 또 긴 한 해를 살아야 하는구나. 한없이 웅크리고 움츠러든 채 가만히 있고 싶은데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키워내야 하는구나. 이제, 그만하고 싶다.
특별한 일이 있는 건 아니다. 우울한 것도 아니다. 올해는 어느 해보다 더한 생기를 갖고 시작한 해이다. 그런데 덜컥 모든 일이 번거롭다. 백 살까지 이러고 살아야 할까. 백 살이 되면 그저 숨만 쉬며 살아도 되려나. 온갖 생산적인 일을 주문받으며 나를 쥐어짜지 않고 그저 가만 살아도 되는 것일까.
백 살이 되면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살고 싶다. 이제껏 알던 인연들과는 멀찍이 홀로 고요히 있고 싶다. 백 살이 되면 맑고 고운 것만 보고 듣고 싶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오르는 대로 움직이고 싶다. 세상 게으르게 볕을 쬐며 온종일 나무늘보와 달팽이와 느림을 나누고 싶다. 이렇게 하나둘 꼽아보니 내가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 어떤 것을 원하는지 보이는 것도 같다. 흠... 어찌 기다리나. 백 살까지 기다리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을 다시 추려볼 일이다.
<백 살이 되면>, 시 제목만으로도 많은 생각의 물꼬를 틔운다. 그런데 왜 로또가 되면, 방학이 되면, 어딘가에 가면 등이 아니고 백 살이 되면 일까. 하루하루가 백 년의 잠이 필요할 만큼 고단하기 때문일까.
시 제목뿐 아니라 표지 그림도 참 좋다. 더 넘기지 않아도 되겠다 할 정도로 한 장으로 충분하다. 해사한 사람과 마주함에 마음이 무장해제된다. 바람소리, 새소리, 물소리만 들리는 어느 한적한 물가에서 둥둥 떠다니는 나뭇잎사귀라도 된 양 한가롭고 평화롭다. 모든 페이지가 물 흐르듯 자연, 그 자체다.
어느 날은 눈물이 날 것처럼 마음 어딘가를 울리고, 어느 날은 세상 가장 큰 품에 안긴 듯 따뜻하게 감싸고, 백 살이 될 때까지 지니고 있어도 좋을 책이다.
나는 타임머신이 있다면 절대 과거로는 가지 않을 것이다. 지난 세월을 다시 살고 싶지 않다. 무얼 더 잘해 바꾸고픈 욕심도 없다. 껑충 백 살로 건너갔으면 좋겠다. 정말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