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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뮤얼슨 vs 프리드먼 - 시장의 자유를 둘러싼 18년의 대격돌
니컬러스 웝숏 지음, 이가영 옮김 / 부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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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레이션이 치솟은 현재의 상황은 70년대 후반 볼커가 연금의장으로 취임했을 때와 유사하다. 볼커는 이자율을 올려 통화량을 제한시키는 통화주의적 방안을 실천했다고 알려졌으나 그때 볼커의 정책을 둘러싼 프리드먼과 새뮤엘슨의 반응은 현재에서 과거를 바라보는 관점과는 꽤 차이가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과거를 되돌아보면 모든 것이 분명해보인다. 하지만 그 당시는 혼돈이었고 누구도 미래를 점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와중에 최고의 지성을 자랑하는 프리드먼과 새뮤엘슨 조차도 제대된 상황의 해석과 해결책을 내놓지는 못한다. 경제학을 바라보는 관점은 여럿이고 경제학이 현실을 해석하는 방식도 다양하다. 프리드먼과 새뮤엘선은 자유와 통제라는 큰 가치관의 차이 뿐만 아니라 개인의 성향 또한 큰 차이가 있었다. 대부분의 학문적, 정치적 성향의 구분도 실상 자유와 통제라는 이분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 또한 인간 본성의 한 부분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경제학을 이해하는 가장 큰 요소는 즉 인간에 대한 이해이며, 그런 면에서 인간 본성의 큰 각 부분을 차지한 프리드먼과 새뮤엘슨의 논쟁을 돌아보는 것은 경제학 뿐만 아니라 인간의 이해를 늘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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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텨내는 용기 - 아들러의 내 인생 애프터서비스 심리학
기시미 이치로 지음, 박재현 옮김 / 엑스오북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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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론의 관점에서 보면, 화가 나서 큰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니라 큰 소리를 지르기 위해 화를 내는 겁니다. 불안해서 밖에 나가지 못하는 게 아니라 밖에 나가지 않으려고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거나 그만둘 때는 그럴 만한 목적이 먼저 있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분노라는 감정이 뒤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조정하는 게 아니라 상대가 내 말을 듣게 하려고 분노라는 감정을 사용하는 겁니다. 타인의 동정을 얻기 위해 슬픔이라는 감정을 만들어내는 것도 같은 이치지요. p. 34

목적론은 ‘어디서’ 왔는지가 아니라 ‘어디로’ 가는지에 주목합니다. 어디로 향하는지 알면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니까요. 그 사람의 라이프스타일을 알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예컨데 ‘인간은 누구나 남의 실수를 비웃는다’는 세계상을 가진 사람은 어려운 일을 앞두고 긴장합니다. ‘1등 아니면 안 된다’는 자기이상을 가진 사람이라면 시험이 어려울 때 아예 포기할 수도 있다는 것쯤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지요. p. 56

아들러는 어떤 외적 요인에 의해 현재의 내가 만들어졌다는 생각을 철저히 부정합니다. 그것을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란 점을 강조합니다. 
세상을 위험한 곳이라고 여기고 타인을 적으로 보는 사람은 타자와의 관계를 회피하려고 합니다. 타자에게 단점이나 결점이 있어서 싫어진 게 아니라, 그가 싫어져서 단점이나 결점이 보이는 겁니다. p. 83~84

“열등 콤플렉스를 고백한 바로 그 순간 생활의 어려움을 넌지시 암시한다. 어떤 상황의 원인이 될 만한 다른 사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부모나 가족, 충분하게 교육받지 못한 과거 혹은 어떤 사고, 방해, 억압을 거론할지도 모른다.” p. 122

첫째, 신경증자가 ‘만일 이 증상이 없었다면……’이라고 말할 때, 그 목적은 경쟁에서 지거나 체면이 구겨지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일을 할 때도 반드시 성공한다는 확신이 없으면 아예 처음부터 도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 둘째, 신경증자는 과제를 스스로 해겨할 수 없다는 생각에 타자에게 의존적으로 문제 해결을 맡깁니다. 열등 콤플렉스가 깊은 사람은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다른 사람에게 기대는 것을 구원이라고 여깁니다. 
셋째, 신경증자는 우울, 음주, 환각 등의 증상을 통해 주위 사람들을 지배합니다. 우울한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 불평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주위 사람들은 병에 걸린 사람을 내버려두지 못하지요. 아이가 불안에 사로잡혀 밖에 나갈 수 없다고 하면 부모는 외면하지 못하지요. (……) 화를 냄으로써 상대를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이끌려는 사람, 슬픔을 표현함으로써 누군가를 자신의 곁에 붙잡아두려는 사람, 타자를 비난하는 사람은 모두 타인을 지배하려는, 잘못된 우월성 추구의 사례이지요. 잘못된 우월성 추구는 공동체 감각에 반합니다. p. 122~123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노력이 필요하며, 불가능한 것만 아니라면 대개는 해결할 수 있습니다. 아들러는 로마 시인인 베르길리우스의 말을 인용해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할 수 없다’는 생각이 고정관념이 되지 않도록 없애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p. 159

인생의 과제 대부분은 대인관계에 관한 것이라서 타자를 적으로 생각하는 한 그 관계가 좋아질 리 없습니다. 타자는 적이 아니라 친구라는 생각을 해야 인생의 과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p. 162

타자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괘념치 않는 것도, 단점을 장점으로 보는 것도, 나를 좋아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지만 그보다 더 적극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내가 남에게 전혀 도움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공헌감을 갖는 것입니다. 공동체에 유익한 일을 할 때 내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그런 나에게는 가치가 있다고 믿게 되는 것이지요. 아들러 심리학이 칭찬 대신 용기를 주라고 권하고, “고맙다”는 말을 하자고 제안하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나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p. 174

일단 과제가 주어지면 가능한 한 조금씩이라도 시작하려고 들지요. 이것이 바로 용기입니다. 아들러는 이것을 ‘불완전한 용기’ ‘실패할 용기’라 불렀습니다. 실패가 두려워 처음부터 과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바람직한 태도이지요. 똑같은 실수를 여러 번 반복하는 건 문제지만, 실패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배울 수 없지요. p. 184

미국의 소설가 폴 오스터가 8살 때 처음으로 야구경기를 보러 갔습니다. 경기가 끝난 뒤 뉴욕 자이언츠의 윌리 메이스와 직접 만났지요. 메이스는 유니폼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고서 오스터의 눈앞에 서 있었지요. 오스터는 용기를 내어 말했습니다. 
“사인해주세요.”
“응. 좋아. 그런데 꼬마야, 너 연필은 갖고 있니?”
그런데 오스터는 연필을 갖고 있지 않았어요. 주변에 연필을 갖고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미안하구나.”
메이스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야구장을 떠났습니다. 
그날 밤 이후 오스터는 어디에 가든 연필을 갖고 다니게 되었습니다. 연필로 뭔가를 하겠다는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더 이상 준비를 게을리 하고 싶지 않았다. 단 한 번 연필이 없다는 이유로 불의의 기습을 당하지 않기 위해, 두 번 다시 똑같은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달리 배운 건 없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히 배웠다. 주머니에 연필이 있다면 언젠가 그것을 사용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작가가 되었다.” p. 226~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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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생각한대로, 꿈꾸는대로, 의지만 강하다면 모든 것이 이뤄질까? 이런 생각이 줄기차게 나오는 미국 자기계발서의 근본 사상이 된 심리학자 아들러의 사상 해설서, '버텨내는 용기'는 약간 다른 생각을 전한다. 물론 외적인 요인이 성격 형성에 결정적 요인이 아니라는 근본 생각은 같다. 그러나 자기계발, 발전이 오로지 개개인의 영달을 위해서 이뤄지면 안된다는 것에서 흔한 자기계발서와 아들러의 사상은 차이가 있다. 

이른바 '공동체의식'. 타인에게 우월감을 가지고 지배하려고 들기보다는, 그것보다 큰 그림에서, 타인에게 도움이 될 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된다는 것이다. 

흔히 우리가 갖는 피해의식, 온갖 트라우마에 대한 설명도 다르다. 그것은 어떤 결과가 아니라 무엇을 하기 싫기 때문에 생겨난 증상이라고 아들러는 설명한다. 즉 우리가 핑계대기 위해 무수히 갖다붙이는 심리학 용어들의 용례가 잘못된 것이다. 

문득 이렇게 하나씩 근거 없는 핑계와 이유들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는 무엇이 남는가 생각했다. 그곳에는 아마 아무 것도 없는, 발가벗은 내가 있을 것이다. 그 맨몸의 나를 바로 바라볼 수 있는가, 그것을 인정하는 용기를 가질 수 있는가,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것인가 아닌가에 따라, 즉 공동선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그 후에 남는다. 

차분하고 단정한 문체로 써내려간 책은 읽기 쉬웠고, 난해하지 않고 올곧은 주제 의식이 아들러의 사상과 닮아 있었다. 나의 하루가, 늘 이런 용기가 필요하기에, 하루하루 버텨내야 하는 것이 무수히 나를 기다리기에, 실패할지라도 조금씩 해나가야 하기에, 이 책을 읽어나가며 마음 한 켠에서 새로운 종류의 용기가 생겨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용기는 근거없는 자신감이 아닌,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그리고 많은 것을 아우르는 품 넓은 종류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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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들 보르헤스 전집 2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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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얇은 단편집에서(각주를 빼면 책은 절반으로 줄어든다) 20세기 포스트 모더니즘, 환상문학 등 거의 모든 문학사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한 편 한 편의 완성도가 높고 깊이가 남다르다. 말인즉슨 알아먹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가상인물이 실제인물이 쓴 책을 평하고, 실제인물이 가상인물이 쓴 책을 평하며, 가상인물이 쓴 책에 대한 설명, 실제인물이 쓴 책에 대한 설명이 뒤섞인다. 한 편 안에서도 줄거리가 나뉘고 그 은유와 환유, 그리고 인용은 고대와 근대를 넘나든다. 도서관 사서로 55세에 눈이 멀기전까지 엄청난 양의 책을 읽었다는 보르헤스의 방대한 지식이 문장 하나하나에 녹아들어 있다. 책의 두께에 얕잡아보고 뛰어들었다가는 나처럼 한 권 읽는데 몇 년이 걸린다. 그리고 읽고 나서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자연히 '왜 이렇게 어렵냐'며 불평을 하게 된다(개떡같은 번역 탓도 분명히 있다). 정신적 사디즘이고 자학이라 할만하다. 그래서 스티븐 킹은 'On Writing'이란 책에서 '똥을 누다라고 쓸 것을 대변을 누다라고 하지 마라'며 쉽게, 머릿속에 떠오른 대로 글을 쓰라 했다. 친숙한 말, 이해하기 쉬운 말이 옳다는 주의다. 그러나 번역가 황현산이 수필집 '밤이 선생이다'에서 밝힌대로 어려운 글은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 '똥'뿐만 아니라 '대변'도 존재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독성' 좋은 글은 모든 글쟁이가 지향해야 하는 바이지만 그렇다고 '쉬운 글'이 장땡도 아니다. 

그러나 점점 어려운 글은 설 자리가 없다. 조금이라도 글이 어려우면 이해하지 못한다. 한국인의 독해능력 하락과도 연관이 있다. 최신 연구결과에 따르면 OECD국가 중 한국인의 독해능력이 19위였다고 한다. 문맹은 아니지만 글이 무슨 뜻인지는 모른다. 하다못해 일국의 대통령이 쓴 페이스북 메시지는 제대로 된 문장 하나 없이 말줄임표로 끝을 맺는다. 아무리 가벼운 의사소통이 페이스북이란 미디어의 속성이라 해도 그 자리가 기대하는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다. 게다가 대선 전 토론에서 보여준 문장해독 능력으로 볼 때 이것이 의도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그 이의 수준임을 알게 된다. 

하긴 '문장에 주어가 없다'며 명명백백한 말을 부인하던 것이 몇 년 전이다. 뉴스에 나오는 정치인의 언어도단은 귀를 의심케 한다. '논리'라는 단어의 뜻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부끄러워 말할 수 없는 것을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공식석상에서 내뱉는다. 일베라는 이들이 쓰는 글은 도저히 해석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다. '자유'를 접두어로 쓰는 집단들의 공통된 특징이기도 하다. 결국 이 모든 것은 한국어 능력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대중의 한국어 능력이 떨어질수록 언어의 호흡은 짧아진다. 긴 글을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SNS의 타임라인은 긴 호흡을 방해한다. 잘 편집된, 즉 가공된 정보만 소화할 뿐 원문이나 원천에 접근하지 않는다. 책은 인용될 뿐 읽히지 않는다. 정보도 마찬가지다. 언어는 파편화되고 논리는 사라진다. 비논리가 일상이 된다. 어느누구도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 논리가 있어야 책임이 성립되는데 원래 논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문장을 찾기 힘들고 유장한 논리가 설자리가 없다. 

조지오웰의 소설 '1984'에서 빅브라더는 언어를 단순히 만들고 뜻을 좁히는 것으로 인민의 사상을 통제한다. 즉 언어의 깊이를 없애 단편적이고 기계적인 지시로 역할을 제한한다. 여기서 인민은 언어를 통한 상상과 혁명의 실마리를 놓치게 된다. 나는 학생에게 한국어 대신 영어를 공부하게 하고, 누구보다 한국어의 깊이를 발굴할 대학생들에게 영어 강의를 듣게 하는 이들의 의도를 되묻고 싶다. 생각할 능력을 앗아가고 단지 소비하는 객체로만 존재하게 하는 메커니즘, 그 악순환의 시작은 한국인으로부터 한국어를 빼앗아 간 것이 아닌었던가하는 의심도 함께. 

예전에 나는 자주 잘 읽히지 않는 책을 보면 저자를 욕하곤 했다. 물론 쉽게 쓸 수 있는 것을 어렵게 쓰는 것은 나쁘다. 그러나 어렵게 써서 어렵게 읽어야 하는 것들이 있다. 하나하나 짚어주며 떠먹여주는 것이 아니라 빠져들어서 안간힘을 다해 헤엄쳐 나가야 하는 깊이를 지닌 텍스트다. 그 텍스트의 미로 속을 헤매어야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 어려움의 강도만큼 사고가 깊어지는 것은 물론이다. 홍세화씨가 “독서는 사람을 풍요롭게 하고, 글쓰기는 사람을 정교하게 한다”라고 썼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보르헤스의 소설을 읽으며 저자가 아닌 나를 탓했다. 여전히 알아먹기 힘들지라도 가끔 문장 하나가 반짝하고 빛날 때가 있었다. 그 실마리, 놓치지 말아야 할 텍스트의 힘이자 상상력의 가능성이다. 그렇기에 텍스트의 '어려움'이 지금의 '어려움'을 전복시킬 열쇠가 되지는 않을까? 비록 먹고 사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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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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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끼는 부지런하다. 매일 새벽 5~7km를 달리고 오후까지 글을 쓴다. 그리고 그는 몇 가지 소재를 부지런히 다룬다. 여자, 섹스, 도시, 고양이, 재즈, 클래식이다. 그 중 여자 이야기는 어떤 소설에도 빠지는 법이 없다(정작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만난 여자친구와 결혼을 해 매우 평범하고 평온한 결혼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이번 단편집 제목은 작정을 했는지 '여자 없는 남자들'이다. 궁금하다. 읽고 싶다. 색채 없는 어쩌구보다는 훨씬.

소설은 '남자들'보다는 남자들이 바라본 여자에 대한 것이다. 과연 여자란 무엇일까? 갑자기 여자가 없어져버린 남자들은 끊임없이 되묻는다. 아이를 유산한 후 상대 배우와 계속 육체관계를 맺은 배우 아내를, 자신이 출장 간 사이 동료와 섹스하던 아내를, 간호사로 일하며 바람을 피우고 잠자리에서 옛 이야기를 하던 한 여자를, 생각하고 추억한다.

그런데 알 수가 없다.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고 몇 십년을 함께 살아도 그녀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지 않았던가, 라는 탄식만 나온다. 하루끼가 좋아하는 소재인 고양이는 여기서 여자와 등치된다. 오고 싶을 때 오고 한참 애교를 부리다가도 어느 순간 등을 돌리고 사라져 버린다. 그 고유의 흐름을 남자는 이해하지 못하고 잡아둘 수도 없다.

그래서 남자들은 술을 마신다. '가후쿠가 보기에, 세상에는 크게 두 종류의 술꾼이 있다. 하나는 자신에게 뭔가를 보태기 위해 술을 마셔야 하는 사람들이고, 또하나는 자신에게서 뭔가를 지우기 위해 술을 마셔야 하는 사람들이다.' 또 음악을 듣는다. '손님이 오지 않는 가게에서 기노는 오랜만에 마음껏 음악을 듣고, 읽고 싶던 책을 읽었다. 바짝 마른 땅이 빗물을 빨아들이듯 지극히 자연스럽게 고독과 침묵과 적막을 받아들였다. 아트 테이텀의 피아노 솔로 음반을 자주 들었다. 현재 그의 심경과 잘 어울리는 음악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알 수 없다.

그 깨달음으로 가는 여정에는 하루끼 소설 특유의 뜬금없는 폭력과(기노), 느닷없는 재회(예스터데이)가 기다리고 있다. 이미 전작에서 많이 본 장치이지만 읽을 때마다 재미있는 것은 하루끼의 능력이다. 결국엔 여자에 대한 불가지론을 피면서, 하루끼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는 결론 아닌 결론을 내린다.

'여자한테는 그런 게 있어요(...). 그건 병 같은 거에요. 가후쿠 씨. 생각한다고 어떻게 되는 게 아니죠. 아버지가 우리를 버리고 간 것도, 엄마가 나를 죽어라 들볶았던 것도, 모두 병이 한 짓이에요. 머리로 아무리 생각해봤자 별거 안 나와요. 혼자 이리저리 굴려보다가 꿀꺽 삼키고 그냥 살아가는 수밖에요.'

매년 노벨 문학상 후보 1순위에 꼽히는 작가가 내리는 결론이다. 무책임해 보이지만 또 어딘지 모르게 설득력 있다. 하긴 어딘지 모르게 재미있고 어딘지 모르게 흥미로우며 어딘지 모르게 빠져드는 게 하루끼 문학의 매력이 아닌가. 그리고 그것은 하루끼가 사랑하는 도시의 뒷골목과 나른한 고양이와 그리고 스쳐간 여인의 뒷모습과 닮아있다. 어딘지 모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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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 플랜 모중석 스릴러 클럽 19
스콧 스미스 지음, 조동섭 옮김 / 비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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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범죄를 맞이할 때, 우리는 그이가 원래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악한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생각보다 약하고 또 잔인하다. 성격은 상황에 따라 바뀌고, 상황에 따라 바뀐 성격은 예상치 못한 결말로 우리를 이끈다. 그렇게 운명은 우리를 갑자기 저 낭떠러지로 내팽겨친다.

소설 '심플플랜'은 평범한 사람들이 마주친 엄청난 행운과, 그 행운이 초래한 파국을 빠르고 집요하게 그린다. 고백하자면 읽다가 가슴이 떨려 몇 번이나 책장을 덮어야 했다. 다시 책장을 펼치면 멈추지 않은 공포, 그 공포의 근원은 타인이 아닌 오로지 나의 본성, 더 나아가면 우리가 가지는 '평범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인물들은 미국소설임에도 지극히 우리의 이웃과 닮아있다. 그 이웃은 티비 공익광고에 나오는 환한 미소에 잘 차려입은 갑남을녀가 아니다.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잊어버리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진짜 이웃, 불편하고 더러우며 실패자라고 생각하는, 아니면 너무 평범해서 존재 자체를 모르가 살던 이웃이다.

작가는 그 이웃들을 그리며 우리의 내면 깊숙한 악을 끄집어낸다. '너도 그럴 거야. 맞지?'라고 속삭이는 듯 하다. 더욱 무서운 것은 작가의 뱀 같은 치밀함에 결국 '예'라고 답할 수 밖에 없는 나의 무기력함이다.

이런 소설을 읽고 나면 그 어떤 심리학 도서보다도 더 많이 인간에 대해 알게 된 것 같다. 그것은 사실이기도 하다. 저 눈 밝은 이들이, 누구보다도 상상력이 뛰어나고, 그 상상력 때문에 또 누구보다도 많은 알코올과 니코틴과 불안에 휩싸여 살아가는 저 작가들이 펼쳐놓은 세계가, 가장 인간의 진실에 가까이 닿아 있음을 우리는 문학의 질긴 생명력을 통해 이미 익히 알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생명력은 밝음이 아닌 어두움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우리의 의식 위로 살짝 드러난 미소가 아닌, 미소가 지나고 간 뒤 오래 머무는 무표정 속에,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망망대해와 같은 심연 속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잊지 말라고. 우리는 그런 존재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진짜 우리를 마주할 때 우리는 몸서리친다. 그 몸서리침, 바로 소설 '심플플랜'이 정조준한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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