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픽션들 ㅣ 보르헤스 전집 2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4년 9월
평점 :
이 얇은 단편집에서(각주를 빼면 책은 절반으로 줄어든다) 20세기 포스트 모더니즘, 환상문학 등 거의 모든 문학사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한 편 한 편의 완성도가 높고 깊이가 남다르다. 말인즉슨 알아먹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가상인물이 실제인물이 쓴 책을 평하고, 실제인물이 가상인물이 쓴 책을 평하며, 가상인물이 쓴 책에 대한 설명, 실제인물이 쓴 책에 대한 설명이 뒤섞인다. 한 편 안에서도 줄거리가 나뉘고 그 은유와 환유, 그리고 인용은 고대와 근대를 넘나든다. 도서관 사서로 55세에 눈이 멀기전까지 엄청난 양의 책을 읽었다는 보르헤스의 방대한 지식이 문장 하나하나에 녹아들어 있다. 책의 두께에 얕잡아보고 뛰어들었다가는 나처럼 한 권 읽는데 몇 년이 걸린다. 그리고 읽고 나서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자연히 '왜 이렇게 어렵냐'며 불평을 하게 된다(개떡같은 번역 탓도 분명히 있다). 정신적 사디즘이고 자학이라 할만하다. 그래서 스티븐 킹은 'On Writing'이란 책에서 '똥을 누다라고 쓸 것을 대변을 누다라고 하지 마라'며 쉽게, 머릿속에 떠오른 대로 글을 쓰라 했다. 친숙한 말, 이해하기 쉬운 말이 옳다는 주의다. 그러나 번역가 황현산이 수필집 '밤이 선생이다'에서 밝힌대로 어려운 글은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 '똥'뿐만 아니라 '대변'도 존재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독성' 좋은 글은 모든 글쟁이가 지향해야 하는 바이지만 그렇다고 '쉬운 글'이 장땡도 아니다. 그러나 점점 어려운 글은 설 자리가 없다. 조금이라도 글이 어려우면 이해하지 못한다. 한국인의 독해능력 하락과도 연관이 있다. 최신 연구결과에 따르면 OECD국가 중 한국인의 독해능력이 19위였다고 한다. 문맹은 아니지만 글이 무슨 뜻인지는 모른다. 하다못해 일국의 대통령이 쓴 페이스북 메시지는 제대로 된 문장 하나 없이 말줄임표로 끝을 맺는다. 아무리 가벼운 의사소통이 페이스북이란 미디어의 속성이라 해도 그 자리가 기대하는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다. 게다가 대선 전 토론에서 보여준 문장해독 능력으로 볼 때 이것이 의도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그 이의 수준임을 알게 된다. 하긴 '문장에 주어가 없다'며 명명백백한 말을 부인하던 것이 몇 년 전이다. 뉴스에 나오는 정치인의 언어도단은 귀를 의심케 한다. '논리'라는 단어의 뜻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부끄러워 말할 수 없는 것을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공식석상에서 내뱉는다. 일베라는 이들이 쓰는 글은 도저히 해석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다. '자유'를 접두어로 쓰는 집단들의 공통된 특징이기도 하다. 결국 이 모든 것은 한국어 능력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대중의 한국어 능력이 떨어질수록 언어의 호흡은 짧아진다. 긴 글을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SNS의 타임라인은 긴 호흡을 방해한다. 잘 편집된, 즉 가공된 정보만 소화할 뿐 원문이나 원천에 접근하지 않는다. 책은 인용될 뿐 읽히지 않는다. 정보도 마찬가지다. 언어는 파편화되고 논리는 사라진다. 비논리가 일상이 된다. 어느누구도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 논리가 있어야 책임이 성립되는데 원래 논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문장을 찾기 힘들고 유장한 논리가 설자리가 없다. 조지오웰의 소설 '1984'에서 빅브라더는 언어를 단순히 만들고 뜻을 좁히는 것으로 인민의 사상을 통제한다. 즉 언어의 깊이를 없애 단편적이고 기계적인 지시로 역할을 제한한다. 여기서 인민은 언어를 통한 상상과 혁명의 실마리를 놓치게 된다. 나는 학생에게 한국어 대신 영어를 공부하게 하고, 누구보다 한국어의 깊이를 발굴할 대학생들에게 영어 강의를 듣게 하는 이들의 의도를 되묻고 싶다. 생각할 능력을 앗아가고 단지 소비하는 객체로만 존재하게 하는 메커니즘, 그 악순환의 시작은 한국인으로부터 한국어를 빼앗아 간 것이 아닌었던가하는 의심도 함께. 예전에 나는 자주 잘 읽히지 않는 책을 보면 저자를 욕하곤 했다. 물론 쉽게 쓸 수 있는 것을 어렵게 쓰는 것은 나쁘다. 그러나 어렵게 써서 어렵게 읽어야 하는 것들이 있다. 하나하나 짚어주며 떠먹여주는 것이 아니라 빠져들어서 안간힘을 다해 헤엄쳐 나가야 하는 깊이를 지닌 텍스트다. 그 텍스트의 미로 속을 헤매어야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 어려움의 강도만큼 사고가 깊어지는 것은 물론이다. 홍세화씨가 “독서는 사람을 풍요롭게 하고, 글쓰기는 사람을 정교하게 한다”라고 썼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보르헤스의 소설을 읽으며 저자가 아닌 나를 탓했다. 여전히 알아먹기 힘들지라도 가끔 문장 하나가 반짝하고 빛날 때가 있었다. 그 실마리, 놓치지 말아야 할 텍스트의 힘이자 상상력의 가능성이다. 그렇기에 텍스트의 '어려움'이 지금의 '어려움'을 전복시킬 열쇠가 되지는 않을까? 비록 먹고 사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