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 메리의 리본 하우미 컬렉션 1
이나미 이쓰라 지음, 신정원 옮김 / 손안의책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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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즐겁게 본 다니구치 지로의 만화 『사냥개 탐정』 1, 2의 원작이라기에 찾아 읽었다. 출간 시기도 비슷하여 출판사 간의 협력이 있지 않았을까 짐작하게 되지만, 실제로는 우연일 뿐, 출판사 관계자들도 놀랐다고 한다.

일단 다니구치의 만화로 먼저 접한 탓에 오해했던 부분이 있다. 나는 이 책이 실종 사냥개 수색 전문 탐정 류몬 다쿠를 주인공으로 하는 연작 단편집이며, 다니구치가 그중 마음에 드는 단편을 뽑아 『사냥개 탐정』을 그렸으리라 짐작했다. 그러나 『세인트 메리의 리본』은 "류몬 다쿠 시리즈 단편집"이 아니다. 이 책에 실린 단편 다섯 편은 각자 주인공과 세계가 다르다. 사냥개 탐정 류몬 다쿠가 주인공인 작품은 표제작 「세인트 메리의 리본」(『사냥개 탐정』 1권의 원작) 하나뿐이다.

또 한 가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관계없겠지만, 이 책은 출판사 손안의책이 국내 최고(最古)의 미스터리 웹사이트 하우미스터리의 운영자이자 미스터리 소설 기획자인 윤영천과 협력하여 준비한 "하우미 컬렉션" 첫 번째 작품으로 소개됐다. 권두에서 기획자 윤영천은 "아직도 국내에는 소개할만한 미스터리 작품이 많이 남아 있다는 점입니다. (…) 더 다양한 미스터리 작품을 소개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당연히 『세인트 메리의 리본』도 미스터리 소설이리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도 추리/미스터리 분야로 분류하고 있고. 그러나 다섯 편의 단편 중 미스터리라고 분류할 만한 작품은 「세인트 메리의 리본」 하나뿐이다(그나마도 탐정과 수사가 나올 뿐, 미스터리 요소는 약하다). 정말 관대하게 봐준다면 「종착역」까지는 일종의 범죄 소설로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모닥불」은 총과 죽음이 나온다고는 해도 미스터리라기보다는 차라리 액션 소설로 부르는 편이 더 바람직해 보이며, 「하나미가와의 요새」나 「보리밭 미션」까지 미스터리로 분류해서야─두 작품 모두 독자를 궁금하게 하고 기대하게 하는 '수수께끼'가 있기는 해도─지나친 아전인수일 뿐이다.

그러나 이 책이 사냥개 탐정에 관한 연작 단편집이나 장르 미스터리가 아니라고 해서 외면당하지 않았으면 한다. 사정이야 어쨌든 이건 좋은 단편집이니까. 적어도 세 편은 훌륭하고, 다른 두 편도 나름대로 풍미가 있다.

몇 달 전 구마가이 다쓰야의 『어느 포수 이야기』를 읽은 뒤 "이 책은 거세된 남자들을 위한 회복과 각성의 묘약이다. 남자가 본래 어떤 동물인지 독자들은 알게 될 것이다."라는 아사다 지로의 추천사를 되짚어 보며 뭐 그럴 수도 있겠다고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는데, 어쩌면 그 추천사는 이 작품에 더 잘 어울리는 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어느 포수 이야기』가 몸으로 자연과 부딪치며 살아가는 남자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작품 전체는 남성성 자체에 심취해 있다기보다는 곰 사냥꾼과 산 생활이라는 이색적인 소재 자체에서 오는 인류학적인 흥미를 다방면에서 다루어내고자 한 설화처럼 다가온다. 반면 『세인트 메리의 리본』에는 흔히 '남성적'으로 분류해온 성향이나 소재에 몰두하여 낭만을 길어올리는 데에 심취해 있고, 그것을 단편 소설의 클라이맥스로 사용하고자 하는 태도가 뚜렷하다.

단, 남성적이라고 하더라도 고약한 테스토스테론 범벅은 아니다. 다섯 이야기의 남자 주인공들의 꿈은 자기 전에 꾸는 소년의 순진무구한 꿈에 가깝다. 내가 하늘을 난다면, 내가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라면. 그 순진무구함은 사냥, 총, 탐정, 구식 카메라, 기차, 폭격기, 전쟁이 끝나고 버려진 군용 시설, 한때 전성기를 누렸으나 이제는 명맥을 다해 가는 육체노동 직종과 같은 '남성적' 소재가 끌어들이기 쉬운 공격성을 탈색시키며 로망의 대상으로 만든다. 자신이 취한 소재에 본래 애착이 있음이 분명한 작가는 디테일을 얹어가며 구체성을 부여한다. 이건 어른의 손놀림이다. 그것이 멀리 돌아와서 다시 남자들의 순진무구한 꿈과 만난다. 현실의 몸을 입은 공상이랄까. 몹시 육체적이고 기계적인 것을 통해 몹시 추상적이고 감상적인 것이 실현된다는 감각의 도약이 있다. 도약의 거리가 멀수록 작품의 위력은 강하다. 「하나미가와의 요새」와 「보리밭 미션」이 유달리 뭉클한 것은 그 두 편이 기계적이고 잔혹하여 일견 꿈과는 멀어 보이는 소재─전쟁 기계─를 다루면서도 가장 환상적인 장면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 아닐지.

사실 이건 위험한 매혹이요, 전략이기는 하다. 그래도 이나미 이쓰라는 적어도 문제적인 맥락을 끌어들여 놓고 '시대야 어찌 됐든 동기는 순수했다' 같은 변명을 내세우는 작가는 아니며, 작품 내적으로 나름의 안전장치를 마련해두고 있다. 그 안전장치마저 약삭빠른 변명으로만 읽힌다면, 거기서부터는 이런 이야기를 쓰는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감내할 수밖에 없는 짐이라고 봐야 할 테고. 다행히 그보다는 관대한 독자인 내게 이 작가는 똥폼과 고독, 자괴감과 인정 투쟁 등을 빼고 몽상을 부끄러움 없이 순순히 인정하며 그 실현을 위해 남을 깔보거나 상처 입히거나 비극을 필요로 하지 않는, 마음씨 좋은 버전의 어니스트 헤밍웨이처럼 다가온다.

하우미 컬력션에서는 같은 작가의 다른 단편집 『사냥개 탐정』도 출간할 계획이라고 한다. 기대한다. 또 당장은 아니더라도 훗날 이나미의 장편 소설이라는 『더블오 벅』도 출간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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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개 탐정 1 - 세인트 메리의 리본
다니구치 지로 지음, 정은서 옮김, 이나미 이츠라 원작 / 애니북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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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된 사냥개 찾아주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탐정이 있다고? 사냥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일단 그런 일이 얼마나 잦은지, 그런 일로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을 정도인지 의문이었다. 설혹 가상의 직업이라고 해도, 그걸로 이야기가 되나? 더구나 말로만 들어도 자상하고 따사로울 것 같은 그런 소재를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로 풀어냈다고? 그걸 『고독한 미식가』를 그린 만화가 다니구치 지로가 만화로 옮겼고? 여러모로 낯선 조합이었다. 사실 그 정도만이었더라면 개 이야기에도, 다니구치 지로에도 관심이 크지는 않은 터라 '그런 책도 다 있구나' 하며 지나쳤을 텐데, 만화가 출간되고 얼마 후에 국내 최고(最古)의 미스터리 사이트 하우미스터리와 출판사 손안의책이 협력하여 하우미 컬렉션이라는 시리즈를 시작, 첫 작품으로 『사냥개 탐정』의 원작인 미스터리 소설 『세인트 메리의 리본』까지 발간하면서 새삼 관심이 더해졌다(그나저나 이 문장은 어쩐지 손안의책 관계자 같은 인상인데, 출판사와 아무런 관련도 없음을 밝혀둔다. 하우미스터리 회원이기는 하고, 하우미 컬렉션에 많은 기대를 하고 있기에 소설 『세인트 메리의 리본』을 알리고 싶은 건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소망일 뿐이다).

직접 읽어보니 전부 사실이었다. 주인공은 실종된 사냥개 찾아주는 일을 전문으로 하며 살아가는 류몬이라는 남자. 그는 상속받은 삼림 속 오두막에서 파트너인 조와 살아가며 사라진 사냥개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아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이다. 이 무뚝뚝한 남자는 삼림을 돌아다니지 않을 때는 복장에서부터 코트에 중절모라는 장르 도상을 사용하고 있으며, 필립 말로나 험프리 보가트 영화 등을 인용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여기에 연줄을 이용해 탐정일을 돕는 친구, 야쿠자와 연결된 미녀 의뢰인 등 전통적인 하드보일드 탐정물에 있을 건 다 있다. 류몬이 겉으로는 무뚝뚝하지만 속으로는 정이 깊은 남자임은 물론이다. 그리고 다니구치 지로는 평소와 다름없는 차분한 어조, 세밀하면서도 다소 평면적인 그림으로 이 이야기를 그려낸다(단, 화마다 제목을 담은 패널과 마지막 패널에서는 펜선으로 그림자를 좀 더 짙게 표현하여 한껏 분위기를 낸다). 여러 단편으로 이루어진 옴니버스 형식의 원작을 해체하고 변형하여 하나의 이야기처럼 엮었지만, 플롯을 억지로 끌어다 하나로 묶었다는 인상은 없다. 우리네 일상이 그러하듯 여러 사건이 한 사람에게 다소간 동시다발적으로 겹쳐 일어날 뿐이다. 억지를 부리지 않으니 애초에 플롯이 성기다는 기분도 들지 않고, 짧으면 짧은 대로 길면 긴 대로 모든 사건 아래로 개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라는 독특한(이 장르에서는) 주제가 흐르며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준다. 『고독한 미식가』가 그렇듯(그렇다, 실은 다니구치의 작품은 아직 이것밖에 본 게 없다) 무언가를 애써 힘주어 하려고 하지 않는 듯한 그 자연스러움이 도리어 야쿠자와의 대립에서부터 맹도견에 관한 학습 만화를 방불케 하는 안내까지 온갖 상황을 선뜻 받아 삼키고 음미하도록 이끈다. 다시 생각해 보면 그런 표면의 침착함은 그야말로 하드보일드가 아닌가. 후기를 읽고 검색해 본 후에야 알았는데 다니구치는 초창기에는 하드보일드 활극을 주로 그렸던 모양이다. 작가 자신은 후기에서 "솔직히 이나미 선생님이 그려낸 작품 세계의 캐릭터나 사고방식이 나에게는 없는 것뿐이라서 동경하는 마음도 있었다"고 말하지만, 다 보고 나니 둘은 참으로 잘 어울리는 조합이구나 싶다.

번역에 관한 작은 딴지. 103쪽 〈소유와 무소유To Have and Have Not〉에 관한 주석에서 감독 이름이 "하워드 훅스"로 표기돼 있는데, "하워드 혹스"다. 그리고 제작연도도 1994년이 아니라 1944년이다. 혹스 팬인지라 〈소유와 무소유〉 인용이 나와서 깜짝 놀라며 활짝 웃었다가 연이은 오류에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한편 일본어를 모르는지라 일본어의 어미가 어떤 식으로 분화돼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원작 소설 한국어판을 보니 류몬은 때에 따라 하오체를 쓰는 모양이다. 원작이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137쪽에서 류몬이 준을 만날 때 "처음 뵙겠습니다. 류몬이라 하오."라는 대사는 어색하다. 처음 만난 사람을 상대로 시차 없이 바로 이어지는 두 대사의 어미가 완전히 달라서 어법에 맞지 않는 데다, 이후로도 류몬은 준에게는 하오체를 쓰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 한국어판에서는 "류몬 다쿠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옮겼다. 아마도 실수일 듯하니 2쇄를 찍는다면─이런 멋진 만화는 꼭 2쇄를 찍었으면 좋겠는데─고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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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맨살 - 하스미 시게히코 영화 비평선 시네마 4
하스미 시게히코 지음, 박창학 옮김 / 이모션북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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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하스미 시게히코라는 빼어난 영화 평론가가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거니와 우리나라에도 진즉 출간된 그의 명저 『오즈 야스지로』라든가 기타 나루세 미키오며 스즈키 세이준 등에 관한 글을 묶은 선집을 통하여 그 기백을 알음알음 맛보고 또 임재철이며 정성일 같은 이를 통해 드문드문 들려오는 일화에 목이 타던 차에 이번에 그의 평론을 엮은 『영화의 맨살』이 출간되어 기념삼아 이 글은 하스미 시게히코의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며 쉼표도 제대로 없어 어디가 머리이고 어디가 꼬리인지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는 문체를 흉내 내 써보려고 하지만 이 서투른 오마주가 이미 개운치 않은 이유는 그의 평론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매 순간 개안의 희열에 전율하기를 바라는 것까지야 과도한 기대요 욕심이라손 치더라도 하다못해 무슨 말을 왜 하는지는 대강이나마 이해하고 나의 의견을 개진하는 역동적인 독자일 수는 있으면 좋겠다고 희망해보건만 실상은 목차에서부터 「〈풀 메탈 자켓〉의 큐브릭은 실패작을 찍는 것조차 실패했다」라든가 「연출가의 지능지수의 이상한 높음: 마이클 만 〈콜래트럴〉」과 같은 호방하기 짝이 없는 제목에 박장대소하고 또 그의 존 포드를 향한 쉼 없는 애정과 더불어 이토록 뛰어나다는 평론가가 프리츠 랑이랄지 자크 베케르뿐만 아니라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에 팬으로서 한 자락 희열을 느끼다가도 막상 흥에 겨운 마음가짐으로 글을 찬찬히 읽어나가노라면 당장에 최초의 영화론 「영화, 이 부재하는 것의 광채」라는 멋진 제목을 지닌 글에서부터 그 글의 제목만은 가슴에 와 닿는 바가 있고 그가 말하는 영화의 농밀한 어둠을 나도 감히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기는 하더라도 그러한 어둠이며 뒷모습이며 시선을 가로막는 시선이며 하는 이야기가 되풀이하며 영역을 넓히다가 어느새 서부극의 풍경이라는 주제에까지 이르고 보니 자연히 존 포드 서부극의 화면 안에 위치하기는 하지만 가 닿을 길 없고 연출할 길 없는 저 광막한 모뉴먼트 밸리를 떠올리면서 그것이야말로 영화라고 짐짓 잘난 척 말하고 싶은 심정은 들지마는 과연 그런 정도가 이 사람이 말하고 있는 것이겠느냐는 불안과 더불어 급기야는 나는 모르겠다는 말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보면 역시 「존 포드, 뒤집어지는 하얀색」과 같은 글에서도 이 위대하다는 평론가가 "가령 하워드 혹스라면 그는 총명함만으로 영화가 될 수 있었던 유일한 인간이고" 라든가 "여기서 말하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영화 자신의 한계라고 할까, 영화 그 자체에 뚫린, 영화가 아닌 함몰점이라고 할 만한 것이고 혹스는 거기서 총명함을 가지고 아름답게 영화에 대항했고" 라고 말하는 순간 나름대로 십여 년 하워드 혹스 팬을 자처했음에도 솔직히 그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서 한편으로 나는 본다는 것에 탐닉하는 이 중독자와 같은 예민함은 없어서 무언가 당연히 보고 칭송해야 할 위대한 어떤 것을 여전히 까막눈처럼 보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한스럽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사람은 자신이 무수한 경험을 통해 이미 확신하는 바를 굳이 풀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으며 더 나아가서는 그것을 풀어 명쾌히 설명하려 드는 순간 영화라는 비가시적인 대상을 가시화하려는 몸부림으로 빠져들고 말기 때문에 그것을 피하고 다만 영화광적인 열정을 쏟아부어 자신의 감흥을 토로하고 언어를 박살 내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을 때 그와 같은 태도의 전제랄까 기본 골자에는 충분히 동의하고 싶지마는 막상 문장을 하나하나 읽고 있으면 그렇다면 이 글은 결국 이미 하스미 시게히코처럼 영화를 보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애당초 받아들일 수 없는 글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들고 만약 영화라는 것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면 사실상 영화에 관한 모든 언설은 무의미로 빠져드는가 하는 회의도 찾아드는데 그런 와중에 「헨리 폰다는 결국 영화와 행복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라는 글에서 헨리 폰다가 감히 존 포드와 불화하고 말년에는 존 포드를 한때 훌륭했던 감독 정도로 치부했다는 사실 때문에 이것이 갓 세상을 떠난 사람을 추도하는 글인 데도 고인을 향해 격렬히 분노를 토하는 대목을 마주하고는 나로서는 이러한 격정을 도저히 품을 수 없음을 자각하고 혀를 내두르며 패배감을 느끼다가도 그가 포드와 결별한 후 폰다의 운명을 거론하면서 "한때는 미래를 걸었던 것처럼 보였던 시드니 루멧 감독도 결국에는 2류 작가에 지나지 않고" 라고 말하는 순간 그래 솔직히 냉정하게 말하자면 시드니 루멧을 2류 감독이라고 할 수는 있겠다고 수긍하기는 하지마는 그와 동시에 얼마 전 큰 즐거움을 느끼며 보았던 시드니 루멧의 〈가해The Offence, 1973〉가 절로 머릿속에 떠오르는데 엄격하게 따져 볼 때 〈가해〉에서 시드니 루멧이 보여준 영화적 경지가 어느 하나 존 포드를 능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존 포드의 자장 안에 있다고 하더라도 나로서는 〈가해〉에서 다룬 것과 같은 서사랄지 숀 코너리와 트레버 하워드의 클로즈업을 함께 잡은 분할 화면에 가까운 구도랄지 숀 코너리의 짐승 같은 육중함을 거의 공포 영화처럼 전달해 내는 촬영이며 〈어둠의 기사The Dark Knight, 2008〉의 취조실 장면을 몇십 분 분량으로 늘려 놓은 듯한 영화의 기백을 생각하노라면 차마 그런 표면적인 즐거움들을 단지 더 빼어난 경지를 보여준 감독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데 역시 그래서 나는 안 되는 건가 한탄도 해보거니와 이런 말을 하스미 시게히코 선생이 들었더라면 내가 언제 존 포드가 있으니 시드니 루멧은 포기하라고 했느냐 할 테고 시드니 루멧을 2류 작가라고 했다고 해서 시드니 루멧 영화를 보지 말라는 소리도 아니라고 말할 게 분명한데 물론 그는 영화에 미리 우열을 두지 않고 아무 영화나 닥치는 대로 보았던 영화 광인으로서 영화와 직접 부딪쳐 가며 쌓은 자신의 경험 속에서 특히 빛나는 옥에게 적절히 화답하고자 하는 마음이 너무나 큰 탓에 이런 글을 썼을지도 모르겠지만 정작 이런 방식의 글이 한국 영화광들에게 소비되는 과정을 볼작시면 그처럼 다짜고짜 영화를 닥치는 대로 보아대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도리어 이러한 사이사이의 평가랄까 위계가 또 하나의 정전으로 자리매김하면서 하스미 시게히코도 말하듯 최고의 이마무라 쇼헤이가 최악의 브레송에 뒤진다는 식으로 잔뜩 뻐기는 말이나 되풀이하면서 존 포드만 보면 됐지 시드니 루멧을 왜 보느냐는 식으로 자꾸 서열화 정전화 경향을 보여 종국에는 영화를 보기도 전에 이미 이것은 볼 필요가 없는 것이며 인생은 위대한 영화를 보기에만도 너무 짧다는 식으로 일관하면서 매양 이미 있는 목록의 위대함을 향해 텅 빈 수사를 쌓아올리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으니 사실은 가령 트위터에서 방귀깨나 뀐다는 어떤 영화광도 해머 공포 영화며 30년대 워너브라더스의 이름 없는 갱스터 영화며 명망 높은 감독들이 만들지 않은 서부극 등을 거론하지 않는 이러한 판국이야말로 하스미 시게히코가 가장 개탄할 일이 아닌가 싶어서 그렇다면 이런 식의 격렬한 자기 확신과 분노와 경탄이 쏟아져나오는 충동적이고 선언적인 글은 도리어 그 격한 어투로 영화광을 세뇌함으로써 영화의 지형을 비좁게 만드는 꼴이 되지 않는 건가 우려스럽거니와 물론 아직 영화사의 정전이 확립되지 않은 《카이에 뒤 시네마》의 시대부터 함께 영화를 보아왔다는 이 평론가로서는 도리어 세간에서 도무지 알아주지 않는 위대함을 고래고래 소리쳐 선동질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하도록 애썼을 뿐일 테지만 우리나라의 정성일만 해도 그렇듯 그런 유형의 전투적이고 선동적인 수사가 특정 영화를 보도록 이끄는 데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정작 영화를 보기 전에 영화광의 머리를 옥죄는 틀을 빚어넣으니 이제 그런 선동의 시대는 집어치워야 하지 않겠냐는 오랜 믿음이 치솟아 오르는 한편으로 그래도 역시 자신은 호객하고 있을 뿐이라는 하스미 시게히코의 겸손하고 진정 어린 말에 절로 웃음을 머금으면서 역시 비평은 영화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향한 충동을 가열하여 견딜 수 없는 결핍 상태를 만들어내고 그럼으로써 독자를 영화 앞으로 데려다 놓는 호객꾼 노릇만 하면 아무래도 좋지 않은 걸까 믿고는 싶은데 이 감상의 정보화 시대에 이르러서는 관객들이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자기 입으로 말하는 대신 영화 보기 전에 정보를 쓸어담고 취득하여 그것을 영화를 보며 '역시 저기에 그게 있구나' 하는 식으로 확인하고 심지어 감상문이라는 것조차도 흡사 감상이 또 하나의 정보인 것처럼 세간에 횡행하는 감상을 그대로 복사하여 되풀이하는 지경이라서 그걸로 괜찮은가 걱정스러운 마음을 떨칠 길이 없는데 하여튼 이런 책이 출간되었다는 사실은 반가운 일이고 이 책이 어려운 것은 번역 문제라기보다는 필자의 기본 태도 때문이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그렇기에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함부로 인용한다든가 자신이 지지하는 감독이나 영화를 지지해준다고 해서 선뜻 희열을 표하며 동의한다고 깃발을 흔들어대는 일은 피해야겠고 그저 가끔 들춰보며 이 사람의 태도와 내 태도를 견주거나 새로이 이해할 수 있게 된 부분이 있나 확인하는 정도로 밖에는 쓰지 못하겠다 생각하다가 문득 그런데 이런 사람의 평론이 일본에서 그토록 인기였다니 역시 인구가 많아서 이 정도로 영화를 보는 사람도 많았고 이런 글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많았던 걸까 아니면 우리나라의 수많은 정성일 키드처럼 '영화에 대해 이렇게 단언할 줄 아는 나 자신'의 이미지에 도취하여 무슨 말인지도 모를 말을 씹어뱉는 이가 그토록 많았던 걸까 궁금히 여기다가도 그런 관객들이며 평론가들을 밟고 펼쳐진 작금의 일본 영화계를 생각해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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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션 - 어느 괴짜 과학자의 화성판 어드벤처 생존기
앤디 위어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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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A. 하인라인, 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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랫맨
미치오 슈스케 지음, 오근영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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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출간된다 출간된다 말만 있고 안 나오던 전설의 걸작이 드디어 출간됐다! 고 외치고 싶지만, 실은 제목도 이번에 처음 들어봤고 미치오 슈스케도 이름만 언뜻 들었지 읽어본 작품 하나 없다. 아무튼 출간 당시 "21회 야마모토 슈고로 상 최종 후보에 올랐으며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10 2위, 문춘 미스터리 베스트10 4위, 베스트 미스터리2008 5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0위"에 올랐으며 한국에서도 나온다는 소문만 무성하여 미스터리 팬들을 애타게 하던 책이라고 한다.

출판사 블로그에서 어떤 책인지 홍보하기 어려운 책이라고 난감해 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정말 그렇다. 당장 이 책이 미스터리 중 어떤 하위 장르에 속하는지만 설명하려고 해도 자칫하면 즐거움을 깎아먹을 수 있으니. 나처럼 무슨 내용인지 어떤 작가인지 하나도 모르고 자기 전에 한 챕터만 읽어볼까 하고 잡았다가 한 호흡에 3백 쪽을 달린 다음 날아간 수면 시간에 괴로워하는 편이 가장 이상적인 독서법이 아닐까.

앞부분이랄지 설정만 살짝 소개해볼까 생각해 봐도, 독자가 붙기는커녕 떨어지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다음 설명을 듣고 그런 이야기라면 읽어보고 싶다고 선뜻 손 내밀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시작한 카피 밴드 활동을 의식적이라기보다는 습관적으로 계속하고 있는 나이 서른의 직장인 히메카와에게는 일본 소설/영화 특유의 나른하고 찌무룩한 권태와 우울이 한가득하다. 음악도 인간관계도 열의 없고, 불확실한 욕망과 무기력한 대화가 곳곳에 스며 있다. 여기에 걸핏하면 섞여드는 어린 시절의 기억은 환자의 냄새로 가득하여 현재보다 더 진저리난다. 누나의 죽음에 얽힌 기억과 아직도 진행 중인 가족의 붕괴가 히메카와를 짓누른다. 너도 결국 그런 식일 거야. 네 이야기도 이렇게 끝날 거야. 현재와는 별로 관련도 없어 보이는 과거지사가 주인공의 트라우마를 타고 주술처럼 들러붙어 사태를 좋지 않은 방향으로 쪽으로 몰고 간다. 머리로 이해할 수야 있지만, 당사자가 아닌 독자로서는 아무래도 여름철 물 먹은 공기마냥 답답하다. 귀신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로테스크하고 초자연적인 사건이 벌어지지도 않지만, 자꾸 여분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책 읽는 중간중간 집안 이곳저곳 그늘진 부분을 훔쳐보았다. 이건… 공포 소설이잖아? 그 시점에서 잠시 독서를 멈추고 작가 약력을 보니 역시나 데뷔작으로 호러 서스펜스 대상 특별상을 받았던 사람이다.

그런 감흥에도 물론 가치는 있다. 이렇게 음습한 기분을 느끼게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작가의 실력에 대한 증거다. 하지만 아무래도 호감은 가지 않는다. 더구나 지향하는 바와 실제 작품의 외관도 어긋나 보인다. 심리 공포 소설 쪽에 더 가까울 이야기를 본격 미스터리처럼 풀고 있다. 사건의 트릭을 성실하게 구축하기는 했지만, 본격 미스터리에 약한 나 같은 독자도 트릭을 단번에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상황이 뚜렷하다는 점은 장점보다는 단점으로 작용하겠다. 어찌어찌 공포 분위기를 몰아붙여 결말까지 간다고 해도, 이래서야 책장을 덮는 순간 만족할 수 있을까? 자신이 잘하는 바에 집중하지 않고 괜히 본격 미스터리를 끌어들여 대충 써먹었다는 생각을 떨치기는 어렵겠는데? 나름대로 잘 쓴 글이기는 해. 읽어볼 가치는 있어. 하지만 다시 읽지는 않을 것 같아. 주변 친구들에게도 선뜻 권할 마음은 들지 않는걸. 아무리 피니스 아프리카에의 안목을 신뢰한다고 해도 이번 책은 나랑은 아닌가봐.

바로 그런 기분이 들 때! 독서를 중단하면 안 된다. 위와 같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를 보상할 만한 장점이 기다리고 있어서가 아니다. 일견 단점이나 미흡한 점으로 보였던 것들이 실은 전부 이 소설의 목표에 필요한 전제였으며, 그 최종 결과가 완전히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음을 깨닫는 쾌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반전을 위한 반전이 아니다. 기존의 서사가 사용한 재료를 고스란히 이어받아 재배열하여 새로운 서사를 드러내고 시선과 감정의 방향을 뒤바꾸는 반전이다. 주인공과 독자를 억지로 몰아세우기 위해 대충 겹쳐놓은 듯했던 구성요소들이 비슷한 점과 차이점을 빚어내며 합주를 시작한다. 공포스러운 심리는 심리대로 유효하고, 미스터리는 미스터리대로 촘촘하다. 이것에 저것을 갖다 섞은 것이 아니라 애초에 둘 다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였다. 아니, 고작 "둘"이 아니지. 카피 밴드나 다중 녹음 기계 같은 소재조차 괜히 그 자리에 있던 게 아님을 증명한다. 다케우치의 다소 치기 어린 작품 〈싱 인 디 엘리베이터〉조차 끝에 가서는 사랑스럽다. 각자가 하나의 계(界)를 이루면서 작품 전체와 공명하고 합주한다. 위풍당당하고 공명정대한 '밴드 미스터리'의 풍모가 드러나자 처음 느꼈던 답답함은 다 날아간다. 성실한 미스터리가 주는 희열과 주인공의 오랜 짐이 해소됐다는 상쾌함이 들어찬다. 심지어 불그죽죽하고 어두워 선뜻 손을 뻗기 힘들어 보이는 표지조차도 실은 이 해갈의 기쁨을 극대화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싶을 지경이다. 주저하는 모두에게, 바로 그 주저하는 마음을 안고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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