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인트 메리의 리본 ㅣ 하우미 컬렉션 1
이나미 이쓰라 지음, 신정원 옮김 / 손안의책 / 2015년 9월
평점 :
얼마 전 즐겁게 본 다니구치 지로의 만화 『사냥개 탐정』 1, 2의 원작이라기에 찾아 읽었다. 출간 시기도 비슷하여 출판사 간의 협력이 있지 않았을까 짐작하게 되지만, 실제로는 우연일 뿐, 출판사 관계자들도 놀랐다고 한다.
일단 다니구치의 만화로 먼저 접한 탓에 오해했던 부분이 있다. 나는 이 책이 실종 사냥개 수색 전문 탐정 류몬 다쿠를 주인공으로 하는 연작 단편집이며, 다니구치가 그중 마음에 드는 단편을 뽑아 『사냥개 탐정』을 그렸으리라 짐작했다. 그러나 『세인트 메리의 리본』은 "류몬 다쿠 시리즈 단편집"이 아니다. 이 책에 실린 단편 다섯 편은 각자 주인공과 세계가 다르다. 사냥개 탐정 류몬 다쿠가 주인공인 작품은 표제작 「세인트 메리의 리본」(『사냥개 탐정』 1권의 원작) 하나뿐이다.
또 한 가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관계없겠지만, 이 책은 출판사 손안의책이 국내 최고(最古)의 미스터리 웹사이트 하우미스터리의 운영자이자 미스터리 소설 기획자인 윤영천과 협력하여 준비한 "하우미 컬렉션" 첫 번째 작품으로 소개됐다. 권두에서 기획자 윤영천은 "아직도 국내에는 소개할만한 미스터리 작품이 많이 남아 있다는 점입니다. (…) 더 다양한 미스터리 작품을 소개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당연히 『세인트 메리의 리본』도 미스터리 소설이리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도 추리/미스터리 분야로 분류하고 있고. 그러나 다섯 편의 단편 중 미스터리라고 분류할 만한 작품은 「세인트 메리의 리본」 하나뿐이다(그나마도 탐정과 수사가 나올 뿐, 미스터리 요소는 약하다). 정말 관대하게 봐준다면 「종착역」까지는 일종의 범죄 소설로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모닥불」은 총과 죽음이 나온다고는 해도 미스터리라기보다는 차라리 액션 소설로 부르는 편이 더 바람직해 보이며, 「하나미가와의 요새」나 「보리밭 미션」까지 미스터리로 분류해서야─두 작품 모두 독자를 궁금하게 하고 기대하게 하는 '수수께끼'가 있기는 해도─지나친 아전인수일 뿐이다.
그러나 이 책이 사냥개 탐정에 관한 연작 단편집이나 장르 미스터리가 아니라고 해서 외면당하지 않았으면 한다. 사정이야 어쨌든 이건 좋은 단편집이니까. 적어도 세 편은 훌륭하고, 다른 두 편도 나름대로 풍미가 있다.
몇 달 전 구마가이 다쓰야의 『어느 포수 이야기』를 읽은 뒤 "이 책은 거세된 남자들을 위한 회복과 각성의 묘약이다. 남자가 본래 어떤 동물인지 독자들은 알게 될 것이다."라는 아사다 지로의 추천사를 되짚어 보며 뭐 그럴 수도 있겠다고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는데, 어쩌면 그 추천사는 이 작품에 더 잘 어울리는 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어느 포수 이야기』가 몸으로 자연과 부딪치며 살아가는 남자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작품 전체는 남성성 자체에 심취해 있다기보다는 곰 사냥꾼과 산 생활이라는 이색적인 소재 자체에서 오는 인류학적인 흥미를 다방면에서 다루어내고자 한 설화처럼 다가온다. 반면 『세인트 메리의 리본』에는 흔히 '남성적'으로 분류해온 성향이나 소재에 몰두하여 낭만을 길어올리는 데에 심취해 있고, 그것을 단편 소설의 클라이맥스로 사용하고자 하는 태도가 뚜렷하다.
단, 남성적이라고 하더라도 고약한 테스토스테론 범벅은 아니다. 다섯 이야기의 남자 주인공들의 꿈은 자기 전에 꾸는 소년의 순진무구한 꿈에 가깝다. 내가 하늘을 난다면, 내가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라면. 그 순진무구함은 사냥, 총, 탐정, 구식 카메라, 기차, 폭격기, 전쟁이 끝나고 버려진 군용 시설, 한때 전성기를 누렸으나 이제는 명맥을 다해 가는 육체노동 직종과 같은 '남성적' 소재가 끌어들이기 쉬운 공격성을 탈색시키며 로망의 대상으로 만든다. 자신이 취한 소재에 본래 애착이 있음이 분명한 작가는 디테일을 얹어가며 구체성을 부여한다. 이건 어른의 손놀림이다. 그것이 멀리 돌아와서 다시 남자들의 순진무구한 꿈과 만난다. 현실의 몸을 입은 공상이랄까. 몹시 육체적이고 기계적인 것을 통해 몹시 추상적이고 감상적인 것이 실현된다는 감각의 도약이 있다. 도약의 거리가 멀수록 작품의 위력은 강하다. 「하나미가와의 요새」와 「보리밭 미션」이 유달리 뭉클한 것은 그 두 편이 기계적이고 잔혹하여 일견 꿈과는 멀어 보이는 소재─전쟁 기계─를 다루면서도 가장 환상적인 장면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 아닐지.
사실 이건 위험한 매혹이요, 전략이기는 하다. 그래도 이나미 이쓰라는 적어도 문제적인 맥락을 끌어들여 놓고 '시대야 어찌 됐든 동기는 순수했다' 같은 변명을 내세우는 작가는 아니며, 작품 내적으로 나름의 안전장치를 마련해두고 있다. 그 안전장치마저 약삭빠른 변명으로만 읽힌다면, 거기서부터는 이런 이야기를 쓰는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감내할 수밖에 없는 짐이라고 봐야 할 테고. 다행히 그보다는 관대한 독자인 내게 이 작가는 똥폼과 고독, 자괴감과 인정 투쟁 등을 빼고 몽상을 부끄러움 없이 순순히 인정하며 그 실현을 위해 남을 깔보거나 상처 입히거나 비극을 필요로 하지 않는, 마음씨 좋은 버전의 어니스트 헤밍웨이처럼 다가온다.
하우미 컬력션에서는 같은 작가의 다른 단편집 『사냥개 탐정』도 출간할 계획이라고 한다. 기대한다. 또 당장은 아니더라도 훗날 이나미의 장편 소설이라는 『더블오 벅』도 출간해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