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맨살 - 하스미 시게히코 영화 비평선 시네마 4
하스미 시게히코 지음, 박창학 옮김 / 이모션북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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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하스미 시게히코라는 빼어난 영화 평론가가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거니와 우리나라에도 진즉 출간된 그의 명저 『오즈 야스지로』라든가 기타 나루세 미키오며 스즈키 세이준 등에 관한 글을 묶은 선집을 통하여 그 기백을 알음알음 맛보고 또 임재철이며 정성일 같은 이를 통해 드문드문 들려오는 일화에 목이 타던 차에 이번에 그의 평론을 엮은 『영화의 맨살』이 출간되어 기념삼아 이 글은 하스미 시게히코의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며 쉼표도 제대로 없어 어디가 머리이고 어디가 꼬리인지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는 문체를 흉내 내 써보려고 하지만 이 서투른 오마주가 이미 개운치 않은 이유는 그의 평론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매 순간 개안의 희열에 전율하기를 바라는 것까지야 과도한 기대요 욕심이라손 치더라도 하다못해 무슨 말을 왜 하는지는 대강이나마 이해하고 나의 의견을 개진하는 역동적인 독자일 수는 있으면 좋겠다고 희망해보건만 실상은 목차에서부터 「〈풀 메탈 자켓〉의 큐브릭은 실패작을 찍는 것조차 실패했다」라든가 「연출가의 지능지수의 이상한 높음: 마이클 만 〈콜래트럴〉」과 같은 호방하기 짝이 없는 제목에 박장대소하고 또 그의 존 포드를 향한 쉼 없는 애정과 더불어 이토록 뛰어나다는 평론가가 프리츠 랑이랄지 자크 베케르뿐만 아니라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에 팬으로서 한 자락 희열을 느끼다가도 막상 흥에 겨운 마음가짐으로 글을 찬찬히 읽어나가노라면 당장에 최초의 영화론 「영화, 이 부재하는 것의 광채」라는 멋진 제목을 지닌 글에서부터 그 글의 제목만은 가슴에 와 닿는 바가 있고 그가 말하는 영화의 농밀한 어둠을 나도 감히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기는 하더라도 그러한 어둠이며 뒷모습이며 시선을 가로막는 시선이며 하는 이야기가 되풀이하며 영역을 넓히다가 어느새 서부극의 풍경이라는 주제에까지 이르고 보니 자연히 존 포드 서부극의 화면 안에 위치하기는 하지만 가 닿을 길 없고 연출할 길 없는 저 광막한 모뉴먼트 밸리를 떠올리면서 그것이야말로 영화라고 짐짓 잘난 척 말하고 싶은 심정은 들지마는 과연 그런 정도가 이 사람이 말하고 있는 것이겠느냐는 불안과 더불어 급기야는 나는 모르겠다는 말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보면 역시 「존 포드, 뒤집어지는 하얀색」과 같은 글에서도 이 위대하다는 평론가가 "가령 하워드 혹스라면 그는 총명함만으로 영화가 될 수 있었던 유일한 인간이고" 라든가 "여기서 말하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영화 자신의 한계라고 할까, 영화 그 자체에 뚫린, 영화가 아닌 함몰점이라고 할 만한 것이고 혹스는 거기서 총명함을 가지고 아름답게 영화에 대항했고" 라고 말하는 순간 나름대로 십여 년 하워드 혹스 팬을 자처했음에도 솔직히 그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서 한편으로 나는 본다는 것에 탐닉하는 이 중독자와 같은 예민함은 없어서 무언가 당연히 보고 칭송해야 할 위대한 어떤 것을 여전히 까막눈처럼 보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한스럽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사람은 자신이 무수한 경험을 통해 이미 확신하는 바를 굳이 풀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으며 더 나아가서는 그것을 풀어 명쾌히 설명하려 드는 순간 영화라는 비가시적인 대상을 가시화하려는 몸부림으로 빠져들고 말기 때문에 그것을 피하고 다만 영화광적인 열정을 쏟아부어 자신의 감흥을 토로하고 언어를 박살 내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을 때 그와 같은 태도의 전제랄까 기본 골자에는 충분히 동의하고 싶지마는 막상 문장을 하나하나 읽고 있으면 그렇다면 이 글은 결국 이미 하스미 시게히코처럼 영화를 보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애당초 받아들일 수 없는 글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들고 만약 영화라는 것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면 사실상 영화에 관한 모든 언설은 무의미로 빠져드는가 하는 회의도 찾아드는데 그런 와중에 「헨리 폰다는 결국 영화와 행복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라는 글에서 헨리 폰다가 감히 존 포드와 불화하고 말년에는 존 포드를 한때 훌륭했던 감독 정도로 치부했다는 사실 때문에 이것이 갓 세상을 떠난 사람을 추도하는 글인 데도 고인을 향해 격렬히 분노를 토하는 대목을 마주하고는 나로서는 이러한 격정을 도저히 품을 수 없음을 자각하고 혀를 내두르며 패배감을 느끼다가도 그가 포드와 결별한 후 폰다의 운명을 거론하면서 "한때는 미래를 걸었던 것처럼 보였던 시드니 루멧 감독도 결국에는 2류 작가에 지나지 않고" 라고 말하는 순간 그래 솔직히 냉정하게 말하자면 시드니 루멧을 2류 감독이라고 할 수는 있겠다고 수긍하기는 하지마는 그와 동시에 얼마 전 큰 즐거움을 느끼며 보았던 시드니 루멧의 〈가해The Offence, 1973〉가 절로 머릿속에 떠오르는데 엄격하게 따져 볼 때 〈가해〉에서 시드니 루멧이 보여준 영화적 경지가 어느 하나 존 포드를 능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존 포드의 자장 안에 있다고 하더라도 나로서는 〈가해〉에서 다룬 것과 같은 서사랄지 숀 코너리와 트레버 하워드의 클로즈업을 함께 잡은 분할 화면에 가까운 구도랄지 숀 코너리의 짐승 같은 육중함을 거의 공포 영화처럼 전달해 내는 촬영이며 〈어둠의 기사The Dark Knight, 2008〉의 취조실 장면을 몇십 분 분량으로 늘려 놓은 듯한 영화의 기백을 생각하노라면 차마 그런 표면적인 즐거움들을 단지 더 빼어난 경지를 보여준 감독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데 역시 그래서 나는 안 되는 건가 한탄도 해보거니와 이런 말을 하스미 시게히코 선생이 들었더라면 내가 언제 존 포드가 있으니 시드니 루멧은 포기하라고 했느냐 할 테고 시드니 루멧을 2류 작가라고 했다고 해서 시드니 루멧 영화를 보지 말라는 소리도 아니라고 말할 게 분명한데 물론 그는 영화에 미리 우열을 두지 않고 아무 영화나 닥치는 대로 보았던 영화 광인으로서 영화와 직접 부딪쳐 가며 쌓은 자신의 경험 속에서 특히 빛나는 옥에게 적절히 화답하고자 하는 마음이 너무나 큰 탓에 이런 글을 썼을지도 모르겠지만 정작 이런 방식의 글이 한국 영화광들에게 소비되는 과정을 볼작시면 그처럼 다짜고짜 영화를 닥치는 대로 보아대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도리어 이러한 사이사이의 평가랄까 위계가 또 하나의 정전으로 자리매김하면서 하스미 시게히코도 말하듯 최고의 이마무라 쇼헤이가 최악의 브레송에 뒤진다는 식으로 잔뜩 뻐기는 말이나 되풀이하면서 존 포드만 보면 됐지 시드니 루멧을 왜 보느냐는 식으로 자꾸 서열화 정전화 경향을 보여 종국에는 영화를 보기도 전에 이미 이것은 볼 필요가 없는 것이며 인생은 위대한 영화를 보기에만도 너무 짧다는 식으로 일관하면서 매양 이미 있는 목록의 위대함을 향해 텅 빈 수사를 쌓아올리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으니 사실은 가령 트위터에서 방귀깨나 뀐다는 어떤 영화광도 해머 공포 영화며 30년대 워너브라더스의 이름 없는 갱스터 영화며 명망 높은 감독들이 만들지 않은 서부극 등을 거론하지 않는 이러한 판국이야말로 하스미 시게히코가 가장 개탄할 일이 아닌가 싶어서 그렇다면 이런 식의 격렬한 자기 확신과 분노와 경탄이 쏟아져나오는 충동적이고 선언적인 글은 도리어 그 격한 어투로 영화광을 세뇌함으로써 영화의 지형을 비좁게 만드는 꼴이 되지 않는 건가 우려스럽거니와 물론 아직 영화사의 정전이 확립되지 않은 《카이에 뒤 시네마》의 시대부터 함께 영화를 보아왔다는 이 평론가로서는 도리어 세간에서 도무지 알아주지 않는 위대함을 고래고래 소리쳐 선동질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하도록 애썼을 뿐일 테지만 우리나라의 정성일만 해도 그렇듯 그런 유형의 전투적이고 선동적인 수사가 특정 영화를 보도록 이끄는 데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정작 영화를 보기 전에 영화광의 머리를 옥죄는 틀을 빚어넣으니 이제 그런 선동의 시대는 집어치워야 하지 않겠냐는 오랜 믿음이 치솟아 오르는 한편으로 그래도 역시 자신은 호객하고 있을 뿐이라는 하스미 시게히코의 겸손하고 진정 어린 말에 절로 웃음을 머금으면서 역시 비평은 영화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향한 충동을 가열하여 견딜 수 없는 결핍 상태를 만들어내고 그럼으로써 독자를 영화 앞으로 데려다 놓는 호객꾼 노릇만 하면 아무래도 좋지 않은 걸까 믿고는 싶은데 이 감상의 정보화 시대에 이르러서는 관객들이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자기 입으로 말하는 대신 영화 보기 전에 정보를 쓸어담고 취득하여 그것을 영화를 보며 '역시 저기에 그게 있구나' 하는 식으로 확인하고 심지어 감상문이라는 것조차도 흡사 감상이 또 하나의 정보인 것처럼 세간에 횡행하는 감상을 그대로 복사하여 되풀이하는 지경이라서 그걸로 괜찮은가 걱정스러운 마음을 떨칠 길이 없는데 하여튼 이런 책이 출간되었다는 사실은 반가운 일이고 이 책이 어려운 것은 번역 문제라기보다는 필자의 기본 태도 때문이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그렇기에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함부로 인용한다든가 자신이 지지하는 감독이나 영화를 지지해준다고 해서 선뜻 희열을 표하며 동의한다고 깃발을 흔들어대는 일은 피해야겠고 그저 가끔 들춰보며 이 사람의 태도와 내 태도를 견주거나 새로이 이해할 수 있게 된 부분이 있나 확인하는 정도로 밖에는 쓰지 못하겠다 생각하다가 문득 그런데 이런 사람의 평론이 일본에서 그토록 인기였다니 역시 인구가 많아서 이 정도로 영화를 보는 사람도 많았고 이런 글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많았던 걸까 아니면 우리나라의 수많은 정성일 키드처럼 '영화에 대해 이렇게 단언할 줄 아는 나 자신'의 이미지에 도취하여 무슨 말인지도 모를 말을 씹어뱉는 이가 그토록 많았던 걸까 궁금히 여기다가도 그런 관객들이며 평론가들을 밟고 펼쳐진 작금의 일본 영화계를 생각해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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