랫맨
미치오 슈스케 지음, 오근영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출간된다 출간된다 말만 있고 안 나오던 전설의 걸작이 드디어 출간됐다! 고 외치고 싶지만, 실은 제목도 이번에 처음 들어봤고 미치오 슈스케도 이름만 언뜻 들었지 읽어본 작품 하나 없다. 아무튼 출간 당시 "21회 야마모토 슈고로 상 최종 후보에 올랐으며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10 2위, 문춘 미스터리 베스트10 4위, 베스트 미스터리2008 5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0위"에 올랐으며 한국에서도 나온다는 소문만 무성하여 미스터리 팬들을 애타게 하던 책이라고 한다.

출판사 블로그에서 어떤 책인지 홍보하기 어려운 책이라고 난감해 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정말 그렇다. 당장 이 책이 미스터리 중 어떤 하위 장르에 속하는지만 설명하려고 해도 자칫하면 즐거움을 깎아먹을 수 있으니. 나처럼 무슨 내용인지 어떤 작가인지 하나도 모르고 자기 전에 한 챕터만 읽어볼까 하고 잡았다가 한 호흡에 3백 쪽을 달린 다음 날아간 수면 시간에 괴로워하는 편이 가장 이상적인 독서법이 아닐까.

앞부분이랄지 설정만 살짝 소개해볼까 생각해 봐도, 독자가 붙기는커녕 떨어지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다음 설명을 듣고 그런 이야기라면 읽어보고 싶다고 선뜻 손 내밀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시작한 카피 밴드 활동을 의식적이라기보다는 습관적으로 계속하고 있는 나이 서른의 직장인 히메카와에게는 일본 소설/영화 특유의 나른하고 찌무룩한 권태와 우울이 한가득하다. 음악도 인간관계도 열의 없고, 불확실한 욕망과 무기력한 대화가 곳곳에 스며 있다. 여기에 걸핏하면 섞여드는 어린 시절의 기억은 환자의 냄새로 가득하여 현재보다 더 진저리난다. 누나의 죽음에 얽힌 기억과 아직도 진행 중인 가족의 붕괴가 히메카와를 짓누른다. 너도 결국 그런 식일 거야. 네 이야기도 이렇게 끝날 거야. 현재와는 별로 관련도 없어 보이는 과거지사가 주인공의 트라우마를 타고 주술처럼 들러붙어 사태를 좋지 않은 방향으로 쪽으로 몰고 간다. 머리로 이해할 수야 있지만, 당사자가 아닌 독자로서는 아무래도 여름철 물 먹은 공기마냥 답답하다. 귀신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로테스크하고 초자연적인 사건이 벌어지지도 않지만, 자꾸 여분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책 읽는 중간중간 집안 이곳저곳 그늘진 부분을 훔쳐보았다. 이건… 공포 소설이잖아? 그 시점에서 잠시 독서를 멈추고 작가 약력을 보니 역시나 데뷔작으로 호러 서스펜스 대상 특별상을 받았던 사람이다.

그런 감흥에도 물론 가치는 있다. 이렇게 음습한 기분을 느끼게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작가의 실력에 대한 증거다. 하지만 아무래도 호감은 가지 않는다. 더구나 지향하는 바와 실제 작품의 외관도 어긋나 보인다. 심리 공포 소설 쪽에 더 가까울 이야기를 본격 미스터리처럼 풀고 있다. 사건의 트릭을 성실하게 구축하기는 했지만, 본격 미스터리에 약한 나 같은 독자도 트릭을 단번에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상황이 뚜렷하다는 점은 장점보다는 단점으로 작용하겠다. 어찌어찌 공포 분위기를 몰아붙여 결말까지 간다고 해도, 이래서야 책장을 덮는 순간 만족할 수 있을까? 자신이 잘하는 바에 집중하지 않고 괜히 본격 미스터리를 끌어들여 대충 써먹었다는 생각을 떨치기는 어렵겠는데? 나름대로 잘 쓴 글이기는 해. 읽어볼 가치는 있어. 하지만 다시 읽지는 않을 것 같아. 주변 친구들에게도 선뜻 권할 마음은 들지 않는걸. 아무리 피니스 아프리카에의 안목을 신뢰한다고 해도 이번 책은 나랑은 아닌가봐.

바로 그런 기분이 들 때! 독서를 중단하면 안 된다. 위와 같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를 보상할 만한 장점이 기다리고 있어서가 아니다. 일견 단점이나 미흡한 점으로 보였던 것들이 실은 전부 이 소설의 목표에 필요한 전제였으며, 그 최종 결과가 완전히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음을 깨닫는 쾌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반전을 위한 반전이 아니다. 기존의 서사가 사용한 재료를 고스란히 이어받아 재배열하여 새로운 서사를 드러내고 시선과 감정의 방향을 뒤바꾸는 반전이다. 주인공과 독자를 억지로 몰아세우기 위해 대충 겹쳐놓은 듯했던 구성요소들이 비슷한 점과 차이점을 빚어내며 합주를 시작한다. 공포스러운 심리는 심리대로 유효하고, 미스터리는 미스터리대로 촘촘하다. 이것에 저것을 갖다 섞은 것이 아니라 애초에 둘 다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였다. 아니, 고작 "둘"이 아니지. 카피 밴드나 다중 녹음 기계 같은 소재조차 괜히 그 자리에 있던 게 아님을 증명한다. 다케우치의 다소 치기 어린 작품 〈싱 인 디 엘리베이터〉조차 끝에 가서는 사랑스럽다. 각자가 하나의 계(界)를 이루면서 작품 전체와 공명하고 합주한다. 위풍당당하고 공명정대한 '밴드 미스터리'의 풍모가 드러나자 처음 느꼈던 답답함은 다 날아간다. 성실한 미스터리가 주는 희열과 주인공의 오랜 짐이 해소됐다는 상쾌함이 들어찬다. 심지어 불그죽죽하고 어두워 선뜻 손을 뻗기 힘들어 보이는 표지조차도 실은 이 해갈의 기쁨을 극대화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싶을 지경이다. 주저하는 모두에게, 바로 그 주저하는 마음을 안고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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