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규의 장편소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읽을 무렵은 내겐 일종의 전환기였다. 오류와 실수가 반복되어도 아직은 어리다니는 이유로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는 '학생'이라는 특권을 버리고, 뒤쳐짐과 수치가 동의어로 쓰이는 삶이라는 전장으로 나서던 그 무렵.
사람들은 세상을 향해 막 한 발을 내디디려는 내게 이야기했다.
"뒤쳐지는 것은 수치야. 결국은, '프로'만이 살아남는다"
정말일까.
세상은 프로들만이 살아남는 비정한 곳일까.
프로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걸까.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고, 그것은 이번 소설집 '카스테라'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프로가 아니라도 삶은 계속되고, 프로에게만 행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며, 행복은 결국 우리 안에 있다고. 진부할 수 있는 이 이야기를 그는 기발한 상징과 독특한 문체로 우리에게 이야기해준다.
세상은 언제나 팍팍하게 돌아간다. 우리에게는 그 소용돌이를 멈출 힘이 없고, 어쩔 수 없이 그 속에서 비틀거리며 살아간다. 일흔 세 장의 이력서에도 세상은 묵묵부답이고(아, 하세요 펠리컨), 월급이라고는 말 못하겠고 그저 왔다갔다 차비 수준만 받는 인턴 8명 중의 한 명이 될 수도 있다(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결국은 자신만의 산수를 발견해야 하며, 대개의 경우 그것은 수학이 아닌 산수 수준에서 끝난다. 균등하고 소소한 돈을 가까스로 더하고 빼다보면 어느새 삶은 저물게 마련이고, 그래서 디 엔드.(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냉소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세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우리 평범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한 마디를 건낸다. 너구리에게 등을 맡기고 울컥 하며 고맙다는 말을 건낼 뿐이고(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놀랍도록 거대한 KS에 말라비틀어져 가는 선배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지만(코리안 스텐더즈) 그래도 우리 모두 자기 몫의 카스테라를 만들 수 있고, 그 카스테라는 따뜻하고 부드러울 것이라고 이야기해준다(카스테라)
그의 재치 넘치는 상징물들-이를테면 너구리, 개복치, 대왕오징어, 헤드록 등-에 대해서 미학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소재라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문학의 힘은 창조에 있고, 창조의 원천은 참신함과 독창성이다. 소재의 비문학성을 꾸짖기 전에 아름답지 않은 소재들로부터 일상적이면서도 기발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갈 수 있는 이야기꾼으로서의 박민규의 재주를 먼저 평가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의 글은 일단, 재밌고, 그의 문체는 우선, 참신하니까(콤마를 찍는 방법까지도)
어떤 사람들은 그에게 몽상가라는 딱지를 붙인다. 그리고 묻는다.
"그런 삶이 대안이 될 수 있나? 너무 황당한 것 아닌가?"
대안?
세상 어디에도 대안은 없다. 운명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 있을 뿐이고, 우리는 위로 받고 싶을 뿐이다. 세상은 그렇게 팍팍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그 말 한마디를 듣고 싶은 것이다. 그 위로가 조금 황당하면 어떤가. 그것이 개복치면 어떻고 너구리면 어떤가. 그저 그가 우리를 위해 열심히 만든 한 조각의 카스테라를 즐겁게 음미하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