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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먼, 판사가 되다
린다 그린하우스 지음, 안경환 옮김 / 청림출판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작년 말 중앙지방법원장이 중앙지법 판사들에게 선물했다고 해서 매스컴을 탔던 책.
해리 블랙먼은 1970년에서 1994년까지 24년간 미연방대법원 판사로 재직했고, 일정한 제한 하에 낙태를 인정해준 Roe v. Wade 판결의 작성자로 유명하다. 임신 3분기설이라는 기준을 제시한 Roe 판결은 지금까지 끊임없이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아직도 유효하다. 블랙먼은 이 판결 덕분에 낙태판사라는 칭호를 얻었고, 낙태반대론자들로부터 심심치 않게 살해 위협을 당하기도 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낙태반대론자들이 낙태클리닉에 폭탄테러를 가한 일도 있었다. 우습지 않은가? 낙태가 살인이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사람들이 서슴없이 살인을 저지른다는 것이)
온건보수주의자로 대법원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결국 그는 진보주의자로 변해갔고 Roe판결은 아마도 그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낙태를 헌법적 권리로 인정했고, 사생활의 권리에 동성애를 포함시켰으며, affirmative action을 옹호했다. 말년에는 사형제도를 강하게 비판하며 무작위적이며 자의적인 사형선고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 레이건과 부시에 의해 지명된 판사들에 의해 점차 보수화되어갔던 연방대법원에서 수많은 소수의견을 집필했지만, 그 울림은 클 수 없었다.
그가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해 대법원 내부에서 벌였던 논쟁들을 보며 재판이라는 것 역시 하나의 정치과정일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판은 선악만을 판단하는 기계적과정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정책법원의 역할을 하는 연방대법원은 적법과 불법을 넘어 정당과 부당을 다루는 토론의 장이었고, 법관들의 판단 역시 결국은 정치의 과정이었다.
하나의 헌법조항이 하나의 권리로, 하나의 권리가 하나의 해석으로 퍼져나가는 과정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할 수 없기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대립한다. 대법원은 그 갈등해결의 최전방에 서있었고, 그러한 대법원의 막중한 부담 속에서 24년을 살았던 블랙먼의 인생은 그 자체로 하나의 드라마일 수밖에 없다.
우리와는 다른 법체계 속에서 다른 환경을 바탕으로 살아갔지만 지금 우리 나라의 판사들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낙태나 성차별, 소수민족 우대정책, 사생활의 영역과 같이 도덕과 이해관계, 이익집단이 복잡하게 뒤얽힌 사회문제에 대하여 우리 나라 법관들이 얼마나 관심을 갖고 살아가는지에 대해 냉소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