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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에 관한 10가지 신화 - 한울아카데미 537 ㅣ 한울아카데미 537
해럴드 페핀스키 지음, 이태원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형사사법은 국가의 보호를 받고 있는 사기행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빨리 인식할 필요가 있다"
도발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현대의 형사사법정책과 관행들이 오랜 기간 아무런 의심없이 확산되어온 잘못된 가정 위에 수립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바로 범죄에 관한 10가지 신화다.
1. 범죄는 증가하고 있다.
2. 대부분의 범죄는 가난한 사람들이 저지른다.
3. 어떤 집단은 다른 집단보다 법을 잘 지킨다.
4. 화이트칼라 범죄는 비폭력적이다.
5. 규제기관들은 화이트칼라 범죄를 예방한다.
6. 부자와 가난한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
7. 경찰의 노력은 약물사용을 종식시킬 수 있다.
8. 지역사회 교정은 훌륭한 대안이다.
9. 처벌은 범죄에 상응하게 결정된다.
10. 사람들은 법에 따라 행동한다.
어떤가.
이런 명제들이 모두 거짓이라고 한다면?
실제로 범죄는 증가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흉악한 범죄를 더 자주 목격하고 있다면, 단지 그것은 그러한 범죄들이 과거보다 좀 더 쉽게 우리에게 알려지고 있기 때문일 뿐이다. 범죄통계는 수사기관에 의해 (의도적이든 아니든) 조작될 수 있으며, 실제로 수사기관은 얼마든지 그럴 능력이 있다.
일반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범죄를 더 많이 저지른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형사사법의 구조 자체가 그런 사람들이 더 쉽게 처벌받을 수밖에 없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일 뿐이다. 수사기관은 화이트칼라 범죄보다는 절도나 강도에 역량을 집중하고, 절도나 강도와 달리 사기나 횡령, 전문직들의 전문적인 법위반은 밝혀내기도 어렵거니와 밝혀낸다해도 그들은 충분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훌륭한 변호를 받는다. 남의 집에 들어가서 10만원 씩 10번을 훔치면 상습절도로 실형을 받지만, 한 번에 몇 백억 씩 횡령을 한 대기업 총수는 실형을 면한다. (그 횡령 사건이 밝혀진 것도 형제들끼리의 다툼 덕분이었다) 경찰은 밤마다 거리를 순찰하지만, 기업의 분식회계를 감시하지는 못한다.
남의 집에 들어가서 물건을 훔치는 것이 한 가족의 삶을 순식간에 파산지경으로 몰아넣는 불법해고보다 더 악한 짓일까. 마약투약자를 처벌하는 것이 사회보호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 처벌의 수위를 정하는 것이 오직 불법성의 정도 뿐일까. 변호사들이 피고인을 대신해서 법정에서 궁색하게 이야기하는 소위 '정상관계'는 어떤 의미일까. 질문은 이어진다.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형사사법이 아닌 보다 근본적인 힘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공감한다. 저자는 결국 문제는 '정의'가 아니라 '정치와 구조'라고 이야기한다. 세상에 '정의와 도덕'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정치와 구조'가 있다. 언제나 정의를 이야기하는 형사사법이 어쩌면 정치와 구조에 좌우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