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눈물 - 서경식의 독서 편력과 영혼의 성장기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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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와라 사쿠타로에 마음이 이끌린 뒤부터 나는 한 권 두 권 시집을 사고, 시인 흉내도 내면서 시 비슷한 글들을 끄적이게 되었다. 따로 공책을 마련해선 마음에 드는 시구들이나 경구, 혹은 자작시 비슷한 글귀들을 적어두었다. 이 공책만큼은 절대로 형들에게 발각되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숨겨둘 장소를 물색하느라 골머리를 앓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 시절 나는 이미 형들에게 '시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시인의 이미지란 베레모에 루바스카 차림을 한 '문약한 무리', 비위를 거스르는 '뇌꼴스러운 놈들', 꼴사납게 '잘난 체 하는' 배부른 자들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나는 행여 행들이 내 기록들을 훔쳐보고 비웃기라도 한다면 가출하는 길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는 고지식한 생각을 하며 괴로워했다.

하지만 그토록 소중하게 간직했던 공책도, 몇 개월인가 흐르자 자기혐오가 점점 심해지는가 싶더니 그만 불을 지펴 모두 태워 없애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는 또 새 공책을 마련해 이런저런 글들을 써두었는데, 이마저도 갈기갈기 찢긴 채 가모가와 강변에 흩날리는 운명을 맞이했다. 똑같은 과정이 계속 되풀이되었다.-129쪽

어디엔가 사람과 사람의 아름다운 힘 없을까
같은 시대를 더불어 살아가는
친근함과 재미, 그리고 분노가
날카로운 힘으로 바뀌어 나타난다.


「유월」이라는 제목의 이 시를 접한 이후, 마음속으로 유토피아의 이미지를 그리려 할 때면 언제나 이 시가 떠오른다. 훗날 옥중에서 『이바라기 노리코 시집』을 읽은 막내형이 이 시를 애송하다 조선어로 번역까지 했던 일이 계기가 되어, 나는 이바라기 씨를 직접 대면할 기회가 있었다. 중학생 시절 연모했던 여류 시인을, 중년 가까운 나이를 먹은 뒤에 비로소 만난다는 것은, 묘하게 멋쩍은 일이었다.-136-137쪽

1970년대 말, 당시 한국에서 영어의 몸으로 고생하고 있던 셋째 형이 "나에게 독서란 도락이 아닌 사명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일이 있다. 서재나 연구실에서 씌어진 말이 아니다. 고문이 가해지고, 때로는 '징벌'이라 부르던, 수개월 간이나 계속된 독서 금지처분을 당하던 상황에서 써 보낸편지였다.

나는 곧바로 형의 이 말을 나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으로 받아들였다. 항변의 여지가 없었다.

한 순간 한 순간 삶의 소중함을 인식하면서, 엄숙한 자세로 반드시 읽어야 할 책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독서. 타협 없는 자기연찬으로서의 독서, 인류사에 공헌할 수 있는 정신적 투쟁으로서의 독서.

그 같은 절실함이 내게는 결여돼 있었다. 꼭 읽어야 할 책을 읽지 않은 채, 귀중한 인생의 시간을 시시각각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146쪽

초등학교 시절 운동능력 면에서 나는 최하위 그룹에 속해 있었고, 스스로도 그러한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어느 해 운동회 50미터 달리기 경주에서 맨 꼴찌로 달리고 있던 나는, 우리 뒤에 출발한 다른 조의 선두주자에게 당장이라도 추월당할 형편이 되었다. 그러자 "어이 거기 너, 그만 됐어. 이제 더 달리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선생님의 호령이 떨어졌고, 나는 결승선을 고앞에 두고서 레인 밖으로 끌려 나와야 했다. 그렇게 중도하차한 상태로 나는 돗자리를 펴고 운동회를 구경하는 가족에게 짐짓 별일 아니라는 듯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그런데 화가 나셨던지 아니면 어이없다고 생각하셨던지 눈가에 눈물이 가득 맺힌 어머니가 "괜찮아, 괜찮다니까" 하시며 나를 꼭 안아주셨다. 그 때문에 도리어 모처럼 부린 오기가 눈 녹듯 풀어져 그만 울음을 떠뜨릴 뻔했다.

킨카쿠지까지 달리는 동계마라톤에서는 총거리의 20~30%도 달리지 못한 지점에서 낙오하고 말았다. 우리 반에서 6단 뜀틀을 넘지 못하는 아이는 나와 사카모토라는 친구 둘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사카모토가 방과 후 맹연습을 거듭하더니 끝내 내 눈앞에서 6단 뜀틀을 훌쩍 뛰어넘게 되자 나는 배신을 당한 듯 씁쓸한 외로움마저 느꼈다.
-155쪽

「아Q정전」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 재미가 없었고 「공을기」같은 작품도 그다지 친숙하지 못했던 모양이나, 「광인일기」를 읽을 때는 이상하리만치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편애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반복해서 읽었기 때문에, 본문 속 쉬시린에 달린 주에, '판아이농'范愛農의 '范'을 '苑'으로 잘못 써 놓았던 사실까지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이 오자는 1981년 개정판이 출간될 때 수정되었는데, 그때는 심지어 약간의 아쉬움마저 들었다.-169쪽

이렇듯 어수선한 와중에, 내가 대학 3학년이 되던 1971년 봄, 한국에 유학중이던 둘째형과 셋째형이 한국 정부에 체포되었다. 나는 그 사실을 "학원에 참투, 학생 데모를 배후에서 조종한 스파이 체포되다"라는 제하의 신문기사를 통해 처음 알았다.

신문기사를 부여잡은 채 주위에 있던 친구들에게 차비를 빌려 양친이 계신 쿄토로 되돌아온 나는, 그 후 거의 학교를 다니지 않게 되었다.

그 뒤부터 두 형을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하지만 재판이 종결되고 두 형이 각각 무기형과 7년형을 언도받고 수감되자 형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중에도, 형들이 어두컴컴한 독방에 갇혀 모진 고문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단 한 순간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럭저럭 1년 늦게 대학을 졸업하긴 했지만, 재일조선인의 취직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두 형의 사건까지 겹쳐 취직할 생각은 아예 할 수가 없었다. 또 지도교수의 권유가 있기는 했지만 대학원에 진학하여 학문연구에 집중하기란 더더욱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형들의 옥중생활이 길어지면서 나 역시 어떻게 천신해야 할지 점점 곤란해졌고, 결국에는 아무 일도 못 하게 되었다.
-175-176쪽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돌아가서' 나는 무엇을 하려 했던 것일까?

비록 지극히 짧은 한 시기에 지나지 않았지만, 토목기사가 되어서 조국의 산하에 다리를 놓겠노라 꿈을 꾸던 때가 있었다. 그야말로 어린이다운 몽상이긴 했지만.-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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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2005년 3~4월 - 통권 81호
녹색평론 편집부 엮음 / 녹색평론사 / 2005년 3월
절판


고고학은 주로 옛무덤에 의존한다. 그런데 남아있는 옛무덤은 거의 당대의 지배자들의 것뿐이다. 예외가 간혹있긴 하지만 백성들이 고고학적 흔적을 가진 무덤을 남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고고학은 지배자의 무덤을 통해, 지배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 일면적인 진실에 함몰되기 쉽다. 그 일면만의 함몰로부터 전면성을 구출해내자면, 인류학, 민속학 같은 인접한 인문과학의 협력이 필요한 것이다.

<가야를 다시 생각한다> 천규석-9~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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