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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식의 생각
서준식 지음 / 야간비행 / 2003년 3월
평점 :
품절
읽지 않아도 손에 잡는 순간 그 무게감이 느껴지는 책.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목차를 훑어보다 「'한총련'탈퇴가 의미하는 것」이란 소제목에서 눈이 멈춘다. 한동안 그 제목을 바라보다 119페이지를 펼쳐본다.
1997년 8월 6일 인권하루소식에 실린 바로 이 글. 나에게 서준식이란 이름을 강렬하게 기억하게 해준 글. 한총련에 대한 마녀사냥이 극에 달했던 그 때를 떠올리며 이 글을 가장 먼저 읽었다.
국가의 억압적 폭력에 맞서 한총련 탈퇴를 거부하는 것, 준법 서약서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그 폭력에 정면으로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이었지만, 20대 젊은이에게 그것은 또한 감당하기 힘든 무게의 짐이기도 했다. 끝까지 거부하며 수배생활을 하다 결국 감옥으로 붙잡혀 들어가 몇년을 보낸 이도 있었고, 가족의 애절한 권유에 의해 혹은 개인적인 결심으로 그 폭력에 무릎꿇을 수 밖에 없었던 이들도 있었다. 그들뿐만이 아니라 공안세력에 반대하는 정치적 움직임을 보였던 이들은 누구나 국가보안법 7조에 의해 탄압의 대상이었고 언제나 구속가능성을 염두해두고 운동을 해야했다.
내가 서준식이란 이름만 들어도 정신이 서늘해짐을 느끼는 것은 그가 몇 십년을 이러한 폭력에 정면으로 맞서며 자신의 양심을 지켜왔으며, 그 권리를 위해 지금도 변함없이 싸우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가 1998년 2회 인권영화제에서 상영된 <레드헌터>의 이적성 문제로 구속되었을 때 재판부에 제출했던 글로 구성된 1부 <우리 시대 인권을 위한 변명>을 읽으며 그 투쟁의 삶을 보다 자세히 알 수 있었고, 광폭했던 사회에 대한 분노만큼이나 그에 대한 존경심도 비례해서 커지게 되었다.
이 책의 2부 <인권을 찾아서>에는 몇가지 항목에 따라 인권하루소식이나 다른 매체에 실렸던 글들이 정리되어 있고 마지막에는 <레드헌터> 사건으로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되었을때 서준식이 자신의 두 딸에게 썼던 편지들이 실려있다. 그 글들을 읽으며 실제 그를 만나면 따뜻한 아저씨 같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좋은 선배이자 스승 그리고 친구도 될 수 있는 사람. 특히 딸에게 쓴 편지에서는 강팍한 무쇠같은 투사의 이미지에 가려진 인간적인 면모들을 많이 엿볼 수 있었다. 그 또한 자신의 가족과 화목한 한때를 보내며 자신만의 행복한 시간을 가꾸고 싶어했던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인 것이다.
책을 덮으며 이제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해본다. 노조를 만들 규모도 안되는 작은 회사에서 아둥바둥 살아가며, 가끔 '지나가던 민주시민'의 이름(..)으로 집회에 참가해 분노를 표출하는 정도의 생활을 하고 있는 나. 지극히 개인적인 활동에 머무는 생활에 한계를 느끼고 있던 나에게 서준식의 글은 한걸음더 나아가야한다고 이야기한다. 진정 이 사회가 바뀌기를 원한다면 나 또한 하나의 물리적 근거가 될 수 있어야 하리... 그래도 당분간은 여전히 지나가던 민주시민으로 살겠지만 이제 조금은 더 씩씩하게 걸어갈 것이다. 나는 행복해지고 싶고, 이 사회 또한 조금이라도 더 행복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서두르지 말기 바라네. 서둘러 세계나 사회를 설명하려 하지 말기 바라네.
자기에게 세계나 사회를 설명할 능력이 없음을 개탄하지 말기 바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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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존엄이 일상적으로 짓밟히는 이 세계에서, 무엇이든 옳다고 주장되려면
그 옳음을 육체로써 고수하고 육체로써 외치는 물리적 근거가 있어야 하는 법이고
그런 물리적 근거를 갖지 않는 중장은 대체로 허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라네.
두려워 말게, 몸을 던져 주게.
이 어두운 세상에서 항상 옳은 것이 힘있게 주장되기 위한 물리적 근거로서
존재해 주게, 그런 씩씩한 활동가로서 남아 주게.
- <젊은 활동가에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