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려와서 3주씩이나 가지고 있으면서 읽지 않고 반납하는 책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 오늘은 바쁘게 발췌독이라도 해보자며 책을 펼쳤다. 밑줄 긋기를 하다보니 어디서 멈추어야 할지를 모르겠다. 끝까지 다 옮겨 쓰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 번역투의 문장들에 한숨이 나면서도, '삶의 경험들이 우리를 그냥 지나쳐버리지 않도록 하고' 이런 문맥들에 위로 받는 오전이다.
그러나 독자들은 헤겔 텍스트의 일반적인 난해성뿐만 아니라 그의 미학 텍스트가 갖는 특유한 어려움 때문에 곤란을 겪기 십상이다. 그 어려움이란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해겔 철학 전반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이, 또는 적어도 헤겔의 논리학적 저술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이 헤겔 미학을 읽고 이해한단느 것은 거의 불가능한 점이다. 이 책은 독자들이 이러한 장벽을 좀 더 수월하게 넘어설 수 있도록 하는 받침대의 구실을 해주기를 기대하면서 저술되었다. 일단 그 장벽을 넘어서면 그 이후에 펼쳐질 광대하고도 장려한 헤겔 미학의 세계를 독자들은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헤쳐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말이다.7
헤겔은 그가 철학자로서 최고의 명성을 누렸던 베를린 대학 교수 시절에 모두 네 차례에 걸쳐 미학을 강의하였다. 대개 "미학 또는 예술철학"이라는 이름으로 개설된 그의 미학 강의는 자신의 하이델베르크 시절부터 시작되었으나 베를린 시절의 강의를 거치면서 내용의 풍부함과 깊이가 더해졌다. 오늘날 우리가 헤겔의 미락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체로 이 강의에 담긴 그의 미학적 사상을 뜻하는 것인데, 이 사상이 체계를 갖춘 텍스트로서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해준 것은 헤겔의 제자 호토의 공적이다. 호토는 헤겔 사후 강의 노트와 헤겔의 미학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의 필기 노트 및 자신의 노트를 모아 편집하여 모두 세 권으로 된 <미학강의>를 출판하기 이르른다. 18
그의 철학 체계 전체가 기술 되어 있는 <철학 대계>는 크게 보아 논리학, 자연철학, 정신철학의 삼분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신 철학에서 정신 역시 주관 정신, 객관 정신, 절대 정신으로 삼분되어 다루어진다. 주관 정신의 철학이 영혼이나 의식과 같은 정신의 주관적 측면을 대상으로 삼는다면, 객관 정신의 철학은 대상화된 정신, 다시 말해서 정신이 객관화된 것으로서의 법, 사회제도, 국가 등을 그 대상으로 삼는다. 그리고 절대 정신의 철학이 대상으로 삼는 것은 바로 예술, 종교, 철학이다. 예술이 절대 정신의 한 영역 내지는 형식으로 다루어진다는 것은 헤겔에게서 예술이 객관 정신에 해당하는 법, 윤리 또는 국가보다도 높은 차원에 속하는 것인 동시에, 종교 그리고 철학과 함께 가장 고차적인 진리 내용을 드러내는 영역이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헤겔은 "진리에 몰두 한다는 점에서...예술은 ...종교 및 철학과 더불어 그 내용에 있어 동일한 지반 위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하자면 예술이 종교 및 철학과 동일한 소임을 갖는다는 말이기도 한데, 이러한 소임이란 곧 진리의 표현 또는 제시이다. 21
그래서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예술이 종교 및 철학과 공통의 영역 속으로 자신을 위치시켜 오직 신적인 것, 인간의 가장 심오한 관심사, 정신의 가장 포괄적인 진리들을 의시케 하고 표명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존재할 때, 이 때 비로소 예술은 자신의 최고의 과제를 해결하게 된다. 그리하여 예술 종교 철학이라는 세 가지 형식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진리를 드러내며, 또 이러한 방식에 따라 서로 구별된다. 헤겔에 따르면 예술은 진리를 직접적이고 감각(감성)적인 방식으로 드러내며, 종교가 "표상하는 의식" 속에서 진리를 제시한다면, 철학은 이를 "자유로운 사유"라는 방식을 통해 드러낸다. 21
그렇기에 더 나아가서 예술을 위한 내용은 도대체 어떤 것이며 어째서 그 내용이란 것이 표현되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물음이 생겨난다. 이와 관련하여 인간정신에 자리하는 모든 것을 우리의 감각, 느낌, 감동의 대상으로 만드는 일이 예술의 과제이자 목적이라는 흔히 알려진 견해가 우리의 의식에 떠오른다. "나는 인간적인 어떤 것도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는 저 잘 알려진 명제를 예술은 우리 속에서 실현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예술의 목적은 다음과 같이 정립된다. 즉 예술이 목적은 온갖 종류의 잠재해 있는 감정, 경향성 및 열정을 일깨워 활성화하고 가슴을 가득 채우는 것, 그리고 - 계발되었든 아직 계발되지 않았든 간에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 심정의 가장 내밀한 부분이 지니고 경험하며 산출할 수 있는 모든 것, 인간 가슴의 심연과 그 다양한 가능성 및 측면들을 움직이고 자극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절절히 느끼도록 하는 데 있으며, 그 밖에 정신이 사유와 이념 속에 갖는 본질적이고 고차적인 것, 즉 고귀하고 영원하며 참된 것의 찬란함을 느끼고 직관하면서 향유하도록 하는 데 있다. 120
예술은 한편으로는 모든 면에 걸친 이러한 풍부한 내용을 포용하여 우리의 회적 현존재가 갖는 자연적 경험을 보완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앞서 말한 열정 일반을 자극함으로써, 삶의 경험들이 우리를 그냥 지나쳐버리지 않도록 하고 우리로 하여금 모든 현상들에 대한 수용력을 획득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자극은 이 영역에서는 현실적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가상을 통해 발생하는데, 그 이유는 예술의 제작이란 것이 현실성을 기만적으로 대체한다는 점에 있다. 가상을 통한 예술의 이러한 기만 가능성은, 인간에게 있어 모든 현실은 직관과 표상이라는 매체를 거쳐야만 하며, 이러한 매체를 통해 비로소 심정과 의지 속으로 파고든다는 점에 기인한다. 그런데 이 경우에 직접적인 외적 현실성이 가상의 성격을 갖느냐 아니면 이것이 다른 방식을 통해, 즉 현실성의 내용을 내포하며 표현하는 이미지, 기호, 그리고 표상을 통해 나타나느냐 하는 것은 어찌됐든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인간은 현실적이지 않은 사물들을 마치 현실적인 양 표상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내용의 본질에 따라 슬퍼하고, 기뻐하며 감동하며 경악하며 또한 분노, 증오, 동정
불안, 공포, 사랑, 존경과 경탄, 영광과 명예의 감정과 열정을 체험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처지나 관계 또 그 어떤 삶의 내용 일반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그 통로가 외적 현실이든 아니면 단지 그것의 가상이든 우리의 심정에는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안의 모든 느낌들을 이렇듯 일깨우고 우리의 심정이 삶의 모든 내용을 통과하도록 이끌며 오직 기만적인 외적 현재성을 통해 이러한 모든 내적 움직임을 실현하는 것이 무엇보다 예술에서 특유한, 탁월한 힘이라 간주된다.122
예술의 감상과 수용의 관점에서 볼 때 헤겔의 입장은 진리와 구분 된 것으로서의 미를 예술의 목적으로 보는 견해보다도 예술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더 폭넓고도 다양한 측면을 포괄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다. 217
예술은 진리와 구분된 것으로서의 미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예컨대 예술을 통해 얻는, 우리의 심정을 울리는 감동이나 예술이 주는 교훈과 통찰 같은 것은 예술이 그저 미에만 종사한다는 식의 규정을 통해서는 설명 될 수 없는 것이다. 217
예술이 지니는 가치의 관점에서 볼 때 헤겔의 입장은 그러한 가치를 충분히 인정하고 정당화해주는 장점을 갖는다. 예술은 인간의 감각적이고 정신적인 능력이 최고도로 발휘되는 활동으로서 인류가 이룩한 문화적 산물의 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리하여 여기에는 인간이 지닌 다양한하고도 깊이 있는 내면적 요소들이 고도로 구현되어 있다. 그런 까닭에 예술은 그것이 직접적인 즐거움과 만족의 대상이 되는 경우에도 단지 그러한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를 몰두하게 하며 탐구하고 성찰하도록 이끈다. 218
헤겔은 예술적 활동을 그 근본에 있어서는 미를 구현하는 활동이자 동시에 진리를 특수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활동으로 규정함으로써, 예술작품이 사소하거나 잉여적인, 그저 유희적인 제작물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철학적인 고찰의 대상임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해 준다.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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